▲ 석명 연예스포츠팀장
[미디어펜=석명 연예스포츠팀장]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다. 놀라운 기술 발전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야구를 볼 때도 그랬고, 야구 현장을 취재하러 다닐 때도 가끔 생각했던 것이 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에 대한 끊이지 않는 시비를 볼 때다. '기계가 정확하게 스트라이크, 볼 판정을 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심판 판정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때론 심판의 사심이 개입될 수도 있다. '오심도 야구의 일부'라고 두둔하는 이들도 있고, 야구가 갖고 있는 이런 기본 판정의 모호함 때문에 공정이 생명인 스포츠로는 적절치 않다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정말 기계가 심판 대신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정하는 세상이 왔다. 한국 프로야구 KBO리그가 올 시즌부터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BS)'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포수 뒤에 선 구심이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콜을 하는 것은 그대로지만, 판단은 각 구장에 설치된 장비와 기계가 한다. 구심은 인이어로 전달된 스트라이크 또는 볼 판정을 선수들과 관중들에게 알려주는 역할만 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온갖 첨단 장비가 동원돼 일궈낸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시행하지 못한 ABS를 대한민국의 KBO리그가 먼저 시작했다는 것은 놀랍고 자랑스럽다.

ABS가 도입됐으니, 이제 적어도 스트라이크와 볼에 대한 판정 시비는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 류현진이 ABS(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의 문제점을 제기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사진=한화 이글스 SNS


올 시즌 KBO리그 최고 화제 가운데 하나는 '괴물 투수' 류현진의 한화 이글스 복귀다. 신인 때부터 신인왕과 MVP를 석권하는 등 한화의 에이스이자 한국 최고 투수로 군림했던 류현진은 메이저리그로 진출해 11년간 활약하다 국내 무대로 돌아왔다. 적어도 한두 해 정도는 더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었지만, 힘이 남아 있을 때 한화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겠다고 팬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류현진은 다시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재작년 팔꿈치 수술을 받아 1년여 공백이 있었고 30대 후반으로 향하는 적잖은 나이이기도 해 류현진이 시즌 개막 후 예전과 같은 위력적인 구위는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피칭에 다소 기복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코리안 몬스터'라 불리며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투수로 활약했던 류현진이기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팬들의 눈과 귀가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류현진이 ABS에 대해 작심하고 비판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달 24일 수원에서 열린 KT 위즈전에 선발 등판했던 류현진은 5이닝을 던지면서 7실점(5자책점)하는 부진한 피칭을 하고 패전투수가 됐다. 이날 피칭을 하면서 류현진은 '로봇 심판'의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에 여러 차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다음날 류현진은 작심한 듯 ABS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스트라이크 존이 일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구장마다 스트라이크존 판정이 다르고, 같은 구장에서도 어제와 오늘 존에 차이가 있다며 ABS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사실 류현진 이전에도 일부 감독들과 선수들이 ABS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며 '못 믿겠다'는 분위기가 많이 퍼져 있었다. 피칭 감각과 제구 면에서는 KBO리그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괴물 투수' 류현진이 '로봇 심판' ABS의 정확성 논란을 촉발시키는 방아쇠를 당긴 셈이 됐다. '괴물과 로봇의 전쟁'으로 표현될 만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이전까지는 현장의 불만 목소리에 잠잠하던 KBO가 류현진의 문제 제기 후에는 류현진의 투구 분석 자료까지 공개하며 ABS의 오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반박하기도 했다.

와중에 황재균(KT 위즈)의 퇴장 사건도 발생했다. 류현진이 ABS 판정에 고개를 갸웃거린 이틀 뒤인 4월 26일 KT-SSG의 인천경기에서 황재균이 스트라이크 판정에 항의하며 헬멧을 집어던졌다가 퇴장 당했다. 

   
▲ ABS 판정에 항의해 제1호 퇴장을 기록한 황재균. /사진=KT 위즈 홈페이지

SSG 투수 오원석이 던져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은 공은 황재균의 몸쪽으로 파고들었고, 바깥쪽으로 앉아있던 포수 이지영은 이 공을 제대로 포구하지 못하고 놓쳤다. 황재균은 존에서 벗어난 볼로 판단했지만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욱했던 것이다. '로봇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 당한 1호 사례로 기록됐다.

KBO리그가 전 세계에서 최초(1부리그 기준)로 시행한 ABS는 정말 '꿈을 현실로 만들어준' 가장 정확한 심판일까. 아니면 '사람의 기술로 만든 기계'의 판정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일까.

상상이 현실이 되는 많은 일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이 새로운 산업혁명을 일으키더니, AI(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은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속도를 상상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만화나 영화에서나 보던 자율주행 자동차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운행 중이고, 곧 하늘을 나는 자동차도 상용화될 듯하고 우주선을 타고 달 관광도 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 영향이 적게 미칠 것으로 예상됐던 문화예술 창작 분야까지 AI가 빠르게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AI를 두뇌로 장착한 로봇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지배하는 영화 속 상상력의 세계가 곧 현실화될 것 같아 두렵다.

이런 시대에 야구의 ABS 도입은 오히려 늦은 감도 있어 보인다. KBO리그에서 ABS가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면, 메이저리그도 ABS를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앞으로 더 많은 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다만, 그런 변화가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다양한 의견도 수렴하고 개선점도 찾아가야 할 것이다. 현장의 불만이 무엇인지 귀기울여 들어봐야 한다.

'로봇 심판'과 싸운 '괴물 투수'의 뒷 얘기. ABS에 불만을 나타냈던 류현진은 그 다음 등판이었던 4월 30일 SSG전에서 6이닝 2실점(1자책점) 호투로 승리투수가 돼 KBO리그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 아마 류현진은 로봇에게 지지 않기 위해 더욱 집중하며 신중한 피칭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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