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희연 기자]"나는 흙수저가 아니라 무수저였다"
21대 대통령 당선을 확정지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자주 언급한 이 말은 그의 인생 역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소년공으로 노동의 세계에 내던져졌던 이재명.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그리고 세 번의 대권 도전 후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이 되기까지, 이 후보는 한국 정치에서 가장 극적인 인생 역정을 보여준 인물 중 하나다.
가난한 소년공, 인권 변호사로 약자 편에 서다
196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 후보는 5남 2녀 중 다섯째로,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했다. 1976년 삼계초등학교 졸업 후 온 가족이 아버지가 일을 하던 경기 성남으로 올라가 터를 잡자,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던 ‘동마고무’ 공장에서 소년공 생활을 시작했다.
나이가 어려 법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하자 취업이 가능한 동네 형님 이름을 빌려 위장 취업을 했고, 무려 6년 동안 '이름 없는' 소년공의 삶을 이어갔다. 그마저도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 일하다 프레스에 왼쪽 팔뚝을 찍혀 장애 등급 판정을 받아 군면제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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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률사무소 운영 당시 모습./사진=더불어민주당 |
고된 노동 속에서도 그는 꿈을 꿨다. 이 후보는 공장에서 본인을 괴롭히던 고졸 출신 대리처럼 간부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공부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마친 뒤 1982년 전액 장학금과 매달 생활비 30만 원을 지급하는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 후보는 대학에서 접한 5·18민주화운동의 실상이 "삶을 통째로 바꾸게 된 계기"라고 밝히기도 했다.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기업이나 권력자가 아닌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이 후보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활동을 하며 노동과 인권 변론에 집중했다. 1995년에는 '성남시민모임'을 창립해 시민운동에도 뛰어들었다.
특히 그는 2000년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 의혹', 2002년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 등을 맡으며 지역 사회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3년 7월 파크뷰 사건과 관련해 통화 녹취록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공무원 자격 사칭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성남 구시가지에 있는 대형 병원들이 계속 문을 닫자 공공 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주민 발의 조례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이 다수였던 성남시의회에서 시의료원 설립안은 부결됐고, 이를 계기로 이 후보는 정치 입문을 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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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시계 만드는 오리엔트 공장 당시 모습./사진=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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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성남으로 이사 후 4년 만에 지하방을 벗어나 1층으로 이사한 날./사진=민주당 |
현실 정치 도전...두 번의 성남시장에 경기도지사까지
이 후보는 2005년 민주당계 정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 이후 성남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2010년 성남시장 선거에 다시 도전해 당선된 그는 성남시의 취약한 재정상황에서도 청년·노인 일자리 확보, 청소용역 노동자·버스 기사 일자리 안정화, 시장실 개방 등의 쇄신 정책을 펼치는 한편 ‘성남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주목을 받았다.
2014년 재선에 성공한 후에는 '청년배당', '무상 산후조리 지원', '무상 교복 지원' 등 3대 무상 복지 정책을 내놓으며 '행정가형 정치인'이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는 훗날 본인이 강조한 '기본사회' 구상과도 맞닿아 있다.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이후인 2017년, 제19대 대선 민주당 경선에 출마했지만, 문재인(57.0%)·안희정(21.5%) 후보에 이어 3위(21.2%)로 최종 후보가 되지는 못했다. 이 후보의 첫 대권 도전이었다.
이후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16년 간 보수 정당이 차지했던 지사직을 탈환해냈다. 취임 후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기본소득’을 실현하기 위한 기본소득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전국구 인지도를 쌓아갔다.
윤석열에 0.73%p차 석패…계양서 뱃지 달고 민주당 지휘봉 잡아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선 그는 2021년 10월 열린 제20대 대선 경선에서 득표율 50.29%로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를 누르고, 민주당 대선 최종 후보가 됐다.
하지만 대장동 개발 관련 의혹과 친문(친문재인)계와의 갈등 등이 발목을 잡으며, 본선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0.76%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대선 패배 두 달 만인 2022년 6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같은 해 8월에는 민주당 당대표로 지휘봉을 잡았다.
이 후보가 지휘봉을 잡은 후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한 견제구를 날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30차례 국무위원 등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고,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 김건희 특검법 등을 추진했다.
이를 바탕으로 민주당은 2024년 4월 10일 치러진 22대 총선에서 175석을 확보하며 압승했고, 이 후보는 8월 대표 연임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 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백현동 용도변경 사건 및 위증교사 사건, 변호사비 대납 의혹, 쌍방울 대북송금 관련 수사 등 사법 리스크가 끊이지 않았다.
2023년 가을에는 자신을 향한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는 24일간 단식으로 저항했고,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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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대학입학식 모습./사진=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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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윤석열 대통령 탄핵촉구 비상시국대회./사진=민주당 |
12.3 비상계엄·윤석열 탄핵...강력 차기 대권 후보 급부상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을 계기로 이 후보는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부상했다.
계엄 선포 후 국회로 달려온 그는 국회의사당 입구가 봉쇄되자 담장을 넘어 국회 안으로 진입해 계엄해제안 투표에 참여했다.
이후 민주당은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당론으로 결정했고, 12월 14일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윤 전 대통령 탄핵을 만장일치로 인용하면서, 이 후보의 대권 가도가 열렸다.
이 후보는 지난 4월 27일 열린 민주당 최종 경선에서 89.77%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경쟁 상대였던 김동연 경기지사와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각각 6%대와 3%대 득표율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승리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치러진 경선 중 가장 높은 득표율로, 1997년 15대 대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받은 78.04%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비상계엄·윤석열 탄핵으로 쪼개진 나라...국민 통합 최대 과제
이 후보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민 통합'이다. 12·3 비상계엄과 헌정사상 두 번째 현직 대통령 파면으로 둘로 쪼개진 나라를 이어붙여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 후보는 대선 유세 내내 통합과 포용을 강조하며 "국민을 하나로 통합해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미디어펜=이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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