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9) 진리 탐구를 위한 규칙과 방법의 발견 
데카르트(1596~1650) 『방법서설』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내가 보고 느낄 수 있으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현실의 실재(實在)는 실제인 ‘듯하다.’ 하지만 꿈속에서 내가 보고 느꼈던 실재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을까? 실제는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식을 통해 파악되는 것일까. 이런 것들은 황당한 의심인가? 

자신의 감각과 인식, 자신이 파악한 모든 지식 그 자체의 본질과 실존에 대해 의문을 갖고 명증하게 확신할 수 있는 진리를 얻기 위해 집요하게 탐구했던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이다. 그는 이를 통해 ‘생각하는 나 (Cogito)'를 강조함으로써 신에 눌려있던 중세의 어둠 속에서 인간 자신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해 주었다. 이는 곧 개인(자아)주의(egoism)의 태동을 의미했다.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배경이다.  

그는 불혹을 넘겨 42세가 된 1636년에 『방법서설』을 썼다. 원 제목은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그의 굴절광학과 기상학 및 기하학에 대한 논고가 본론이고, 우리가 주목하는 ‘방법서설’은 본 학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서론인 셈이다. 

그런데 본론을 제켜놓고 서론이 더 관심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 책의 본론에 해당하는 굴절광학 및 기상학 영역은 아예 번역조차 안 되어있다. 또 연구자들의 관심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내에 데카르트 전문연구자들이 희소한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데카르트가 서론에서 설정한 방법적 회의와 규칙이 실제 굴절광학 등 세 학문의 정립과정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데카르트의 방법적 규칙의 유용성을 검증하기 어려운 점이 아쉽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한 사람, 데카르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보편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학문 분야를 떠나 철학자와 여러 학문 연구자 및 일반인들의 폭넓은 관심을 받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방법서설』은 이성의 올바른 사용설명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지독하게 ‘의심하는 사람’이 된 이유는 뭘까?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다양한 학문 지식을 습득했다. 그는 언어, 역사, 철학, 신학, 도덕 등 모든 학문이 나름대로 유용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제 학문의 인식론적 토대가 부족하거나 비현실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불확실한 학문 세계를 떠나 현실의 실생활에서 진리를 찾아보기 위해 9년간 세계 각지를 여행 다니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학문에서도, 또 현실의 생활에서도 명증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진리 획득을 위한 자신만의 고독한 여정을 결심한다. 그 여정의 결과물이 『방법서설』이다. 이 책은 바로 데카르트가 진리 탐구를 위해 스스로 치열하게 사색하고 번민하며 시험했던 과정을 토로한 자기고백이자 자서전인 셈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단순히 자신의 학문 도야과정의 ‘이야기’라는 가벼운 형식으로 규정했다. 그가 이렇게 겸손하고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은 자신의 책이 사회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잘 인도하기 위해 각자가 따라야 할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이성을 인도하기 위해 내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토로한다. 데카르트가 이 책을 당대 학문세계의 공용어인 라틴어가 아닌 자기 나라의 일상어인 프랑스어로 쓴 이유도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었다(물론 프랑스판이 출판된 지 8년 후인 1644년에 데카르트가 직접 감수한 라틴어 판도 출간되었다).  

데카르트는 옛 학문의 권위에 의지하는 사람들보다 “전적으로 순수한 자연적 이성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더 올바르게 판단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는 조선시대에 모든 공적 업무와 학문의 소통 문자였던 한문을 제켜두고 아녀자들이나 쓰는 속된 글로 멸시받던 언문(諺文, 한글)으로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방법서설』을 대하는 독자들이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듯싶다. 데카르트가 추구한 ‘정신의 여정’을 가볍게 따라 가보자. 어차피 보통 사람들은 데카르트가 발견하고 정립한 방법을 엄정하게 실천하면서 따라 가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가 고민하면서 설정한 규칙의 기본 정신을 나름대로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받아들이기만 해도 이성적 사유 능력이 배가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 탐구의 4가지 규칙

데카르트가 진리 추구를 위해 이것만 견지해도 충분하다고 한 네 가지 규칙만 보아도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실용적 판단과 결정을 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유용한 가치가 있다. 이 규칙들은 진리 탐구의 길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바람직한 규칙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지 말 것.

둘째,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서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본래 전후 순서가 없는 것에서도 순서를 상정하여 나아갈 것.

끝으로,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판단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는가. 그러나 데카르트는 규칙대로 속단과 편견을 피하고 명증하게 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는 이를 위해 ‘명증성의 규칙’과 검토 대상을 분할하는 ‘분해의 규칙’을 제시했다. 

또 순서에 따라 알기 쉬운 대상에서 복잡한 대상으로 인식을 차례대로 확장해 나가는 ‘정렬의 규칙’도 제시했다(이는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합성의 규칙’이라는 명명이 규칙의 취지를 쉽게 이해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필자가 새롭게 명명한 용어이다. 이런 명명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데카르트 연구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나아가 데카르트는 종합적으로 열거하고 검증하라는 ‘열거의 규칙’을 설정했다. 이런 네 규칙은 학문의 범용 규칙, 또는 생활인의 판단기준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실제 각 규칙을 어느 정도의 완성도 있는 단계로 구현해 나가느냐는 각자의 역량에 달려있다.  

이성적 생활의 토대가 되는 4 가지 도덕적 원칙

데카르트는 보편적 회의를 통해 ‘이성의 집’을 지으면서도 행복한 생활을 위한 도덕적 원칙을 설정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잠정적으로 설정한 네 가지의 도덕 격률(格率)은 현실적이면서도 결연한 의지가 담긴 자기실천 준칙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격률이 보수적이고 자기 절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면, 두 번째와 네 번째 격률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규정하고 채택한 방법을 고수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첫 번째 격률은, 내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고, 어렸을 적부터 신의 은총에 의해 배워 온 종교를 확고하게 견지하며,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려 깊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보통 취하고 있는 가장 온건하고 극단에서 먼 의견에 따라 나를 지도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격률은, 행동에 있어서 가능한 한 확고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리 의심스러운 의견이라도 일단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주 확실한 것인 양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격률은, 언제나 운명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세계의 질서보다는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생각밖에 없으므로, 우리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도덕의 결론으로서, 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종사하고 있는 다양한 직업을 살펴보고, 그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려고 했다. 남들의 직업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으며, 나는 다만 내가 지금 종사하고 있는 일, 즉 내 이성을 계발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치고, 진리 인식에 있어 내가 규정한 방법에 따라 가능한 한 계속 나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1581/85~1666)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데카르트의 초상화(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데카르트는 왜 자신의 도덕적 격률을 ‘잠정적’ 도덕 격률이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완전한 도덕 격률, 최종적 도덕 격률은 무엇이란 말인가? 데카르트가 제시한 도덕 격률은 완전한 이성과 지식을 취득하기 이전에 임시방편으로 설정된 것이다. 물론 “임시 도덕학”도 우리에게 일상의 도덕 규칙으로 삼기에 충분하지만 데카르트가 보다 완전한 도덕 격률을 제시했으면 어떠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철학의 제일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사물과 존재의 정신을 확실하게 인식하기 위해 끊임없이 의심한 끝에 철학의 제일원리를 발견한다. 그는 모든 것이 참이 아닐 수 있다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반드시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써,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가 도출되었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은 라틴어이다.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된 『방법서설』에는 “Je pense, donc je suis”로 표현되었다. 영어식으로 하면 “I think, therefore I am”으로 표현된다. 라틴어의 동사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행위의 주체(주어)를 포함하므로 굳이 분석한다면 cogito는 '나는 생각한다(ego cogito)’, sum은 '나는 존재한다(ego sum)'는 뜻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실제 쓰이는 용법이 아니다. 다만 생각과 존재의 주체 ‘나(ego)’가 분명하게 내장되어 있음을 인식하자는 뜻이다.  

‘ergo’는 생각과 존재 사이를 연결지어준다. 'ergo' 즉 ‘그러므로’의 용법은 데카르트의 연역적 사고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든 “Cogito, ergo sum”을 한 단어로 축약하면 ‘res cogitans’(생각하는 나)로 볼 수 있다. 무엇인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는 ‘나(ego)’가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명석(明晳, clear)하고 판명(判明, distinct)한 것이다. 

코기토 명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릴 수 없는 철학적 원리이다. 자신이 다른 것의 진리성을 의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명백하고 확실하게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절감한다. “의심하는 것보다는 인식하는 것이 더 큰 완전성(perfection)”이지만, 자신은 의심만 하고 있을 뿐, 명증하게 인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의심하고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의심의 대상이 참인지 거짓인지 항상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코기토 명제는 데카르트의 방법상의 한계라기보다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코기토 명제는 종국에는 인간이 귀의하고 의지해야 할 또 다른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의 존재 문제로 확장될 수 있는 코드를 담고 있었던 셈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순환 논증에 빠진 데카르트

의심하는 존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완전성을 획득할 방법은 없을까? 데카르트는 보다 완전한 존재의 관념은 결코 불완전한 존재의 관념에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존재의 관념은 불완전한 나로부터 올 수 없고 무언가 완전한 것으로부터 빌려와야 한다. 그게 바로 신이다. 데카르트는 신이 인간에게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불어 넣어준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명제의 진리성조차도, 신이 존재 혹은 현존한다는 것, 그가 완전한 존재라는 것, 또 우리 속에 있는 것은 모두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실재적인 것이며, 이는 불완전한 나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논리대로 본다면, 인간 이성의 명증성은 결국 오로지 신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에 의지하지 않고는 인간은 진리의 토대를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인가? 그라면 어떤 사안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인식은 인간 고유의 인식인가, 아니면 신의 인식인가? 신에게서 나온 관념을 인식하는 주체는 인간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는 인간의 인식작용의 결과가 아닐까? 데카르트는 명석 판명한 것을 신의 계시로 환원시킬 뿐, 인간의 인식의 틀을 통해 나타난 신의 인식이 실재적으로 어디에 귀속되는 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완전성 그 자체인 신은 존재하는가? 데카르트도 “신의 관념이나 정신의 관념이 결코 감각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감각될 수 없는 신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정말 실재하기는 한 건가? 데카르트는 신이 존재한다는 점을 세 가지 차원으로 증명한다.  

첫째, 의심하는 불완전한 자신에게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넣어 준 것으로 봐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자신 이외에 자신의 존재의 근원인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셋째, 삼각형의 개념 속에 내각의 합이 두 직각과 같다는 사실이 명석 판명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가장 완전한 존재의 개념 속에는 존재가 포함되어있음이 명석 판명하므로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이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론적 증명이다. 

데카르트의 신 증명은 철저하게 유신론적 당위론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순환 논증의 오류를 안고 있다. 이 부분은 끊임없이 논란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순환 논증의 오류는 논증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결론 자체를 이미 전제의 일부로 사용하는 오류를 말한다. 

논증의 올바른 순서는 전제가 결론보다 먼저 밝혀져야 하고 결론은 그 전제에 기대어 도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증명되어야 할 것이 이미 그 증명에 전제되어 있다면 논리는 무한궤도를 순환하게 된다. 이것은 논증 규칙의 위반이고 이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는다. 이는 논리의 악순환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이고 유한한 존재이므로 어딘가 완전한 존재가 존재할 것이며, 자신이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참이라고 전제하고, 자신이 신을 명석하게 인식하고 있으므로 ‘신은 실존한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또 신의 존재라는 결론을 통해 그 전제를 완전하게 보증시키고 있다.  

자신이 명석 판명하게 완전한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서 신이 존재하는 것이고, 신이 존재함으로써 자신이 완전한 관념을 받아서 명석 판명한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는 끝없이 돌고 도는 논리의 악순환이다. 데카르트가 순환 논증의 오류에 걸려든 것이다. 아니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순환 논증의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그 증명의 부적정성을 은유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신이 지배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다.

결과적으로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성공한 것인가? 그는 표면적 언술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그 어떤 실마리도 드러내지 않고 있고, 이성의 사유를 통해 나름의 논리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계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신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한 데카르트에게 감사해 했을까?  

신이 절대적 진리이던 중세에 모든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데카르트는 금단의 영역인 ‘신’의 존재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확장한 것이 아닌가? 비록 데카르트가 신을 증명하고 옹호해 냈지만 그가 의문하고 증명해 내는 그 과정 자체가 기독교계에게는 달갑지 않았었을 듯하다. 특히 신의 존재에 대해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으로 의문의 단초를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발칙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데카르트가 조국 프랑스를 떠나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던 네덜란드로 건너가 이 책을 저술한 것이나, 자신의 저술이 종교재판을 받을 수 있다고 염려하여 익명으로 출판했던 것도 자신의 신 존재 증명의 무모성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든 데카르트의 신의 존재 증명을 독자들이 명쾌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과연 누가 신의 존재를 명쾌하게 증명해 낼 수 있을까? 아니 신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 

데카르트는 인간 정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간파한 철학자이다. 그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적 사고를 했다. 그는 인간에게 육체보다 정신이 더 실체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인간의 육체는 기계적 원리에 의해 작동되지만, 정신은 이성적 영혼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인간과 짐승 간의 근본적 차이가 정신의 존재 여부라고 보았고, 정신을 구성하는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었다. 

“우리 영혼이 신체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 영혼은 본성 상 신체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고, 따라서 신체와 더불어 사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들을 훨씬 잘 이해할 것이며, 아울러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원인도 발견할 수 없으므로 영혼불멸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물론 나는 정신이 실체라는 전제를 토대로 정신이 육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카르트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삶의 모든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구”인 이성을 갖고 있으므로 “진정한 인간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영혼은 신체와 결합되고 합일되어 있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통찰에 공감한다.  

물론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는 현대적 관념에서 볼 때 황당한 논리나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어, ‘송과선(松果腺)’이라는 특별한 ‘정신의 자리’가 있어서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이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 그렇다. 또 심장에 불이 있어 피의 순환의 원동력이 된다고 이해한 부분 등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인식은 당대의 기술과 문명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적 한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중세적 사고와 근대적 사고를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경계인이었던 것 같다. 최후의 중세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이었던 셈이다. 그의 신 증명의 시도가 그의 이런 일면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아(ego)'를 중시하고 모든 것에 대해 끝까지 회의하고 증명하려 애썼다는 점에서 인간의 이성과 자아의 존귀함을 자각시킨 최초의 계몽적 근대인이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동등하게 이성이 주어진다는 본유관념을 제시했다. 인간 이성이 동등하다는 전제는 인간의 평등성의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구나 데카르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동등하게 주어진 이성을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리 탐구를 위한 규칙을 제시하고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이를 구현해 나갈 때 자연적 이성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누구나 인간의 이성으로 방법적 회의와 진리 탐구의 규칙을 통해 명석 판명한 진리를 획득하기를 희구했던 것이다. 『방법서설』은 그 가이드북이었던 셈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매스 미디어에 종속되어 주체적 사고가 점점 결핍되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스스로 이성의 힘으로 의문을 던지고, 문제를 식별하고 해결해 나가는 역량을 갖추어가라는 신선한 자극이자 교훈을 던지고 있다. 이는 ‘독단과 편견에 빠지지 말라’, ‘명석 판명한 지식을 얻기 전까지 끊임없이 회의하고 분석하고 증명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2010, 12쇄),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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