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17) 실천적 지식인 크세노폰의 군사 정치 담론집
크세노폰(BC 430?~ BC 355?) 『크세노폰 소작품집』
|
|
|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아테네 출신의 장군이자, 저술가, 철학자였던 크세노폰(Xenophon, 기원전 430?~355?)은 풍운아였다. 그가 아테네에서 태어난 때는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이 발발한 무렵이었다. 그러니 그의 성장기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27년 동안 치른 긴 전쟁기와 겹친다. 아마 그는 이 청년기에 아테네의 시민 전사로서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몇 번 참전했으리라. 하지만 이즈음 크세노폰의 활동 상황을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크세노폰은 플라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동문수학한 사이다. 하지만 플라톤과 인생 항로는 매우 달랐다. 플라톤은 몇 번 현실 정치에 몸을 담그려다 실패한 이후 학자로서 후학의 양성에 몰두했다. 반면에 크세노폰은 30세 초반인 기원전 401년에 리디아 왕국의 태수 소(小) 키루스가 그의 형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에 일으킨 반란에 그리스 용병대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크세노폰의 행적이 알려진 것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이 반란에서 키루스가 전사하고 패전하자 크세노폰은 남은 그리스 용병대의 장군으로 뽑혀, 페르시아의 땅에서 갖은 고초를 겪어내며 이들의 탈출을 이끈다. 이 과정에서 크세노폰의 군사적 전략과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 그가 이때의 경험을 <아나바시스(Anabasis)>에 담아 출간하면서 그의 군사적 활약상과 페르시아의 군사적 취약점이 그리스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크세노폰의 이 페르시아 원정 참전은 그의 일생을 풍운의 세월로 이끌었다. 그가 이끈 그리스 용병대는 페르시아 지역 탈출 과정의 마지막 여정에서 당시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지역 정벌에 나섰던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를 만난다. 이들의 도움으로 그리스 용병대의 험난했던 탈출기가 마무리된다. 그리스 용병대의 일부는 스파르타 군에 합류하고 크세노폰을 비롯한 일부는 그리스로 생환할 수 있었다.
크세노폰은 아게실라오스와의 이때의 인연 때문에 훗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투를 벌일 때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와 대적했다. 그 바람에 크세노폰은 조국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당시 크세노폰은 민주정의 타락으로 힘을 잃어가던 조국 아테네보다 엄격한 규율과 절제 있는 삶을 추구하던 스파르타의 기풍에 더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훗날 크세노폰은 아테네에서 복권되어 자유롭게 귀국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고국 아테네에서 쫓겨난 그는 스파르타 왕의 배려로 올림피아 근처 스킬루스에 정착하고, 농장 경영과 저술 활동에 매진한다. 그 칩거 기간 동안 크세노폰의 역작들이 다수 나왔다. 크세노폰의 친 스파르타 경향은 그가 남긴 여러 소작품집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를 다룬 <라케디아몬의 국제(國制)>, 그와 인연이 깊었던 아게실라오스를 칭송하는 작품 <아게실라오스>가 대표적인 예다.
<라케다이몬 국제>에서는 스파르타가 그리스에서 인구가 가장 적으면서도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국가의 법과 사회 문화, 교육 방식, 풍습의 분석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남아 있는 문헌 가운데 스파르타의 국가 운영 체제와 특징, 그리고 성공요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최고(最古)의 책이다.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와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스파르타인들의 습속이 부분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크세노폰보다 400여년 후에 태어난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 열전>에도 스파르타의 법과 제도를 설계한 리쿠르고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따라서 고대 스파르타를 연구하는데 크세노폰의 이 작품은 우선적으로 참고할 매우 중요한 전거(典據)가 된다.
크세노폰이 분석한 스파르타의 성공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설적인 입법가 리쿠르고스가 확립한 법과 제도였다. 스파르타인들은 리쿠르고스가 지도한 대로 어려서부터 극기와 절제를 몸에 익히도록 간소한 공동식사를 하였고, 끊임없이 신체를 단련하게 했으며, 어른들에게 다른 사람의 자녀까지 관리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어떤 소년이 무슨 일을 잘못하여 다른 어른에게 회초리를 맞았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들은 부모가 그 아들에게 또 회초리를 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명예스런 일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완벽하게 서로를 신뢰하였기에 자녀들에게 부적절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집 자식이든 스파르타 시민으로서의 판단과 아버지들의 권위로써 소년들을 서로 계도하며 올바르게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스파르타 전사들이 불굴의 용맹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기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회문화적 토양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용기 있는 자는 행복해지고, 겁쟁이는 불행해지는 것을 보장하는 생활 풍습을 만들어냈다.
이를 테면, 시민들은 겁쟁이로 불린 사람과는 식당에서 자리를 함께하거나, 레슬링 경기에서 그와 겨루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또 공 게임에서도 겁쟁이는 짝이 없는 사람으로 따돌림을 당했고, 길거리에서 마주칠 때에도 겁쟁이는 길을 비켜 줘야 했다. 이런 사회문화를 통해 겁쟁이는 공동체 생활에서 어울릴 수 없는 존재로 기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최고의 덕목을 삼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 책에는 위 작품 이외에도 <아테네의 국제(國制)>와 참주에게 주는 조언을 담은 <히에론>, 국가의 재정정책을 논한 <수단과 방법>, 그리고 크세노폰이 군 생활을 통해 체득한 경험과 안목을 바탕으로 쓴 <기병대 사령관>, <기마술>, <사냥술>이 함께 엮였다.
이 가운데 <기병대 사령관>과 <기마술>은 매우 독특한 분야에 대한 희귀한 역작이다. 기원전 4세기 초엽에 저술되었을 이 책들은 기병의 구체적인 운영 전술과 기병의 전투 방법, 기마술의 훈련 기법, 그리고 기병 지휘관의 역할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한 세계 최초의 문헌이다. 크세노폰은 이 책에서 기병의 육성과 훈련, 기병을 활용한 전투의 방법, 그리고 보병과 기병의 연합 운용을 통해 적을 기만하는 전술까지 상세히 소개한다.
"기병대의 현재 세력을 과장해 보이는 또 다른 방법은, 기병대가 정지하고 있을 때나 이동하고 있을 때나 기병대를 보이려고 할 때면, 마부들을 창이나 창이 없으면 모조 창으로라도 무장시켜 기병들 사이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병대의 몸집은 보다 밀집되고 보다 커 보이기 마련이다."
또 기병대를 지휘하는 기병대장은 말과 행동 모두에서 능력이 출중해야 한다. 아울러 기병을 적시에 활용하는 탁월한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현명한 기병대장이라면 적이 강을 건널 때 안전하게 뒤를 쫓아 원하는 숫자만큼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때로는 적이 아침이나 저녁 식사를 할 때,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공격하는 것도 적절하다. 이럴 때에 군사들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데, 보병은 짧은 시간 기병은 긴 시간 갖고 있지 않다."
크세노폰의 <기병대 사령관>은 동서양을 통틀어 기병을 활용하는 병법을 독립적인 작품으로 다룬 유일한 고전이다. 기원전 5세기 춘추시대 제나라의 손무가 지은 <손자병법>은 여러 병법을 소개하는 가운데 정병으로 맞붙은 뒤 서서히 기병을 동원해 적의 옆구리를 가격해 들어가는 전술을 한 단락으로 소개한 것이 전부다.
<기마술> 또한 전마를 다루는 섬세한 기법과 기마의 기술들을 망라한 유일한 고전이다. 고대에는 아직 말발굽을 보호하는 편자(horseshoe)나, 기수의 몸을 안정되게 유지해 주는 등자(鐙子)가 개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상적인 기마를 넘어 마상에서 전투를 벌일 만큼의 기마술을 익히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말이 험악한 전투 현장에서 겁을 먹지 않고 기수의 요구에 따라 질주하기, 장애물을 넘기, 갑작스런 방향 전환 등 다양한 이동을 거침없이 해내도록 길들이는 일은 더욱 힘겨웠을 것이다.
크세노폰은 <기마술>에서 이런 일에 필요한 상세한 지침을 제시했다. 말이 다양한 지형에 적응하도록 단계적으로 훈련하는 방식이나, 재갈을 적절하게 물리고 고삐를 적정하게 조이거나 늦추는 방식 등 말과 기수가 서로 호흡을 잘 맞출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두 권의 책의 통해 기마술의 훌륭한 교관이자 경험이 풍부한 기병대 대장으로서의 역량과 경륜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한편 크세노폰은 조국 아테네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늘 아테네의 부흥을 희구했던 것 같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수단과 방법>은 크세노폰이 아테네에 건 희망과 아테네 부흥을 위해 권고하는 국가 운영 전략이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말년에 언제든지 아테네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올림피아 근처 스킬루스를 거쳐 코린토스에 머물며 여생을 마쳤다.
그는 여전히 아테네가 사람이 사는 모든 세상의 중심에 놓여있다고 여겼다. 아테네는 국토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언제든지 육지로 뻗어나갈 수 있고, 바다를 통해 어디로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천혜의 땅이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내륙으로든 해상으로든 상업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특히 그리스에서 가장 훌륭하고 안전한 페이라이에우스 항구가 아테네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크세노폰의 이런 판단은 옳았다.
크세노폰은 아테네의 부흥을 위한 국가 전략으로 우선 항구의 제반 시설 확충과 정비를 제안했다. 선주를 위한 숙박시설, 상인들이 편리하게 상품 교역을 할 수 있는 시장과 방문객을 위한 숙박시설의 확충을 통해 관세의 증대 및 수입과 수출을 진흥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크세노폰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아테네의 재정 확충을 위해 오랫동안 방치했던 라우리온 은광의 재개발을 촉구했다. 개발 자금이 부족할 경우 외국인에게 은광 산업을 개방할 것까지 과감하게 제안했다. 또 10개의 부족에게 동일한 수의 노예를 주고 은광 발굴의 성공과 실패를 모든 부족이 공유하도록 한다면 개발 인력의 부족 문제와 실패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크세노폰은 이런 공공 기업을 만들면 공동 출자로 위험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는 사례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크세노폰은 자신의 구상대로 실행하면 은광 개발에서 대박이 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전폭적인 관심을 촉구했던 것이다. 또 광산 구역을 방호하기 위한 요새 구축 및 방어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으로 아테네 동맹국이나 다른 나라들과의 평화 유지를 위해 '평화 감시 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크세노폰의 이 마지막 역작에서 조국 아테네에 대한 크세노폰의 충심이 절절히 묻어난다. 그가 제안한 은광 재개발 및 항구 정비 등 진취적이고 구체적인 방책들은 상당 부분 아테네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크세노폰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전쟁터를 누빈 장군이었던 동시에 철학자이자 저술가였다. 그럼에도 그는 동시대인인 플라톤의 위광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소크라테스 회상>, <경영론>, <키로파에디아>, <아나바시스> 등의 역작과 위에서 소개한 소작품들은 크세노폰이 군사와 농업 경영, 국가 행정 분야에 이르기까지 실천적 지혜를 갖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
▲ ☞ 추천도서: 『크세노폰 소작품집』, 크세노폰 지음, 이은종 옮김, 주영사(2016), 340쪽. |
[박경귀]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