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41)-궁극의 진리 규명과 판단중지의 대립
섹스투스 엠피리쿠스(200~250) 『피론주의 개요』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현대문명의 모든 씨앗은 고대 그리스에 있었다. 그리스 문명을 깊이 탐색할수록 이런 증좌들을 더욱 확연히 느끼게 된다. 고대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원천이자 현대문명의 자궁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철학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철학에 이어지는 모든 논쟁적 사상의 단초가 고대 그리스 시대에 태동했다.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아카데미 학파의 전통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철학의 근간으로 이어졌다. 또한 반아카데미 학파로써의 피론주의 역시 르네상스기에 다시 주목받고 데이비드 흄, 데카르트, 헤겔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관점에까지 그 맥이 이어졌다. ​

고대 중국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백가쟁명으로 쏟아낸 저작들은 하나같이 주로 군주를 위한 통치의 담론으로 정치학의 범주에 머물렀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다양한 영역에 걸친 진정한 지혜 사랑의 철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과 자연,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형이상학, 논리학, 수사학, 자연학, 생물학, 정치학, 윤리학, 의학, 문학, 천문학 등 제 학문분야에서 사색과 탐구의 산출물들을 쏟아냈다.

인식론의 중요한 갈래로 볼 수 있는 회의주의(懷疑主義, Scepticism)로 일컬어지는 피론주의(Pyrrohnism) 역시 이미 고대 그리스기에 등장했다. 우리가 피론주의를 다시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200?~250?)의 저작 덕분이다. 엘리스 출신의 철학자 피론(BC 360?~270?)의 철학을 담은 저작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3세기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저술한 <피론주의 개요>가 르네상스기에 재발견되었고, 1562년에 현대적으로 편집 발간된 것이다. ​

엠피리쿠스는 피론주의의 핵심을 잘 전달하고 있다. 회의주의자들은 스스로 진리를 발견했다고 여기는 자들을 독단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아카데미학파의 주장을 독단주의로 규정하며 플라톤의 제자들의 관점을 반박했다. 아카데미학파가 주장한 진리의 발견이 가능하다는 인식론을 비판했던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하면서 사물과 현상에 대한 단정적 판단을 미루는 '판단중지(epoche, 判斷中止)' 또는 '판단유보'를 선언한다.

회의주의의 길은 '아포리아(Aporia)의 길'이라고도 불리는데, "모든 일에 의문을 품고 탐구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긍정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에 관해 어찌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회의주의가 피론주의로 이름 붙여진 것은 피론이 회의주의를 추구한 사람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를 회의주의의 창시자로 보는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판단중지(판단유보)에 이르게 되는가? 어떤 방식으로든 '보이는 것들'과 '사유되는 것들'의 사태들이나 진술들이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어, 인간 능력의 한계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될 때 '판단중지'에 이르게 된다. 진술들이 힘의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상충하는 진술 가운데 확실하게 어느 것이 더 믿을 만한 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상태이다. 이 때 상충되는 진술 모두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고의 정지가 판단정지이다.

판단정지는 대립되는 진술들의 참이나 거짓을 밝혀내려고 할 때 생기는 갈등을 생성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궁구하고자 했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사유에서 '판단중지'(판단유보)를 통해 '마음의 평안'(Ataraxia)과 '감정의 순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회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실익이다.

회의주의자들이 에포케를 강조하는 이유는 독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식의 판단 근거 그 자체부터 회의(懷疑)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립되는 논의들이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믿는 회의주의자들은 어느 한쪽의 논의가 우월한 가치가 지닐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을 독단적 견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기술하고, 독단적 믿음을 가지지 않고서 자신이 느끼는 바를 보고하고, 외부 대상에 관해서는 확언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들이 이렇게 외부 현상들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갖지 않는다면 일상의 삶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경우에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하는데 제약을 초래하지 않을까 의문이 든다. 이들 역시 그런 국면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인 듯 회의주의자들은 일상적인 삶의 기준을 네 가지로 제시했다. ①자연의 인도, ②느낌의 필연, ③법률과 관습의 전통, ④전문기술의 교육이 그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인도에 따라 본성적으로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으며, 느낌의 필연적 요구가 있기 때문에 목마를 때 마실 것으로 인도하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법률과 관습의 전통에 의지하여 불경함과 경건함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전문기술의 습득을 통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기준에 의지한다면 회의주의자들 역시 일상생활에서 판단중지에 이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할 수 있게 될 듯하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 자연스런 일상의 삶의 기준이 된다는 전제 또한 독단적 믿음의 여지는 없는 것일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판단중지'(판단유보)를 끌어내는 10가지의 대립적 논증을 자세히 소개한다. 회의주의자의 열 개의 논증방식은 피론주의의 핵심적 철학기조이다. 이들은 ①생물의 다양성, ②사람들 간의 차이, ③감각기관의 다양한 구조, ④위치와 거리, 장소, ⑤감각의 혼합, ⑥감각 대상들의 양과 구조, ⑦상대성, ⑧발생 또는 조우가 빈번한지 드문지, ⑨행동규범과 관습, 법률, 신화에 대한 믿음, ⑩독단적 신념에 기인한 열 가지 논증을 정립했다.​

판단중지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한 가지만 설명해 보자. 생물의 다양성과 감각기관의 다양한 구조는 감각의 다양한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즉 생물들의 차이로 인해 "동일한 감각 대상으로부터 동일한 감각표상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논변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대상에 대한 어떤 감각에서 얻은 감각표상이 확고하게 동일할 것이라는 점을 확언하기 어렵다. 그러니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논리다. 엠피리쿠스는 다른 9가지 판단중지를 이끄는 요인들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이런 요인들은 판단하는 주체나 대상의 상대성에 기인한 것들이다.

이렇게 회주의자의 논증은 인간의 범주에서 생물의 범주까지 확대된다. 그들은 인식론의 주체를 인간에 한정하지 않고 다른 동물들과의 비교를 통해 인간의 독단적 믿음과 독단적 결론의 무모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인간이 하얗게 보이는 것을 흰색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하얗게 보이는 것이 누런색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다른 생물들에게는 또 다른 색깔로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이 동일한 색깔로 생각하는 어떤 물체도 사람들 간의 차이, 감각기관의 구조, 위치와 거리 등 다양한 논점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있을 것이란 의미다. 결국 단순히 감각표상만으로 인식된 것을 그대로 확정적인 것으로 볼 경우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무수히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관점을 인정하여 '판단중지'함이 마땅하다는 의미다. ​

그렇다면 회의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표상 역시 믿을 수 없게 된다. "벌꿀이 나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쓰게 느껴진다"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

회의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감각표상을 다른 감각표상보다 선호할 수 없고, 증거나 판단기준을 가지고서도 어떤 감각표상을 선호할 수 없다면, 상이한 조건 하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감각표상들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독단적 믿음이 범하는 오류를 경계한다. 인간의 감각과 인식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확정적 언표(言表)로 인해 빚어지는 오류를 막기 위해 ‘판단중지’(판단유보)만이 옳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들의 주장 역시 허점이 많다. 그들이 주장하는 '판단중지(판단유보)'가 과연 온전하게 옳다고 그들은 믿고 있을까. 만약 그들이 옳다고 믿고 있다면 이 주장 역시 독단적 믿음에 해당한다. 반대로 '판단중지(판단유보)'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잘 모르는 것이라면, '판단중지'를 판단할 대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닐까. 

이러한 질문은 아카데미학파를 논박할 때 사용한 회의주의자들의 질문과 동일한 방식이다. 당연히 역으로 회의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던져질 수 있는 질문이다. 회의주의자 역시 자신들의 '판단중지'의 판단근거가 독단적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일체의 인식에서 확언(確言)과 결론을 피하고 회의를 품고 '판단중지'를 요구하는 피론주의의 철학적 관점은 마음의 평정에 안주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독단적 믿음으로 진리를 확신하는 대신 끊임없이 회의하며 궁극적 진리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주류 철학에 대해 경종과 자극을 준다. 이들이 던지는 철학적 이슈의 의미를 인정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독단주의자들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단언할 때 야기되는 더 이상의 탐구의 중단을 회의주의자들은 경계했던 것이다. ​

그렇지만 회의주의의 난점은 독단주의에 대한 명확한 반대명제를 대립시키고 특정한 인식의 '판단중지'에 멈춤으로써 명제와 반대명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인식의 세계를 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판단중지'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치자. 어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인식과 논의에서 대체 '판단중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은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통해 진보해 나가는 것 아닐까. 회의주의자는 무오류에 대한 지나친 강박과 만사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쉽게 회의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닐까. ​

아무튼 합리적 이성주의와 회의주의는 영원한 대립각으로 철학자들을 괴롭힐 듯싶다. 회의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도 오로지 합리적 이성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가 헬레니즘 시기에 한때 유행했지만, 그리스 철학 사상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 합리적 이성주의가 인류 문명과 인간의 인식을 이끌어 온 주류임도 분명하다.

하지만 당대 여러 관점의 상대적 제약에 늘 유의하며 궁극적 진리를 향해 모든 현상과 인식의 판단을 회의적 시각으로 재검증하는 장치 또한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진리를 규명하고 확언할 수 있다는 자만과 성급함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감각과 사유의 상대적 가치에 집착하여 보편적 진리와 원리를 궁구해내려는 치열함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우도 범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피론주의 개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오유석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2012),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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