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62)-죽는 순간까지 지혜 사랑과 이성적 삶을 추구한 소크라테스
플라톤(BC 427~BC 347) 『파이돈』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Phaedon)>은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의 정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직전까지도 죽음에 의연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친구 파이돈, 그리고 제자들과 진리를 궁구하는 열띤 토론을 했던 것이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절친이다. 이 책은 파이돈이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켜본 사건의 전말을 친구 에케크라테스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의 철학자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매일 감옥에 면회 오는 제자들과 다양한 담론을 즐겼다.

원래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는 곧바로 사형 집행되는 게 상례였다. 그런데 신성한 기간 동안에는 그 집행이 일시적으로 미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시민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사형 집행은 한 달 여가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아테네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델로스 섬에 파견한 사절단이 돌아올 때까지는 국가의 누구도 사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시민법정이 열리기 전에 아폴론의 사제에게 보내는 사절단이 타고 갈 배의 고물을 화환으로 장식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이 보류되었던 것이다.

이 금쪽같은 기간에 소크라테스의 대표적인 철학 주제들이 논의되었다. 감옥 안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 교실이 열렸던 셈이다. ​생을 하직할 날을 기다리는 그 와중이었기에 제자들과의 이야기는 더욱 뜨거웠다. ​

영혼은 불멸한다

그 때 논의된 주제는 크게 셋이다. 하나는 몸은 죽지만 혼이 불멸한다는 영혼불멸론, 다른 하나는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던 기억을 상기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나머지는 특정 사물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무엇인가와 연관되기 때문이라는 이데아론이 그것이다. 세 가지 모두 소크라테스, 나아가 플라톤이 계승한 핵심 철학의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

​먼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억울하고 서러운 심정이었던 제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육신은 죽지만 혼은 영원히 살아남아 있을 것임을 설파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승의 삶을 마치게 되지만, 저승에서의 불멸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영혼은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도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해 있었으며, 지혜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영혼은 순수하고 영원하여 사라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데스(Hades; 지하세계)로 가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데스의 세계로 들어가 신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철학을 깊이 공부하여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완전히 순수한 상태로 떠나는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영혼의 순수함을 위해 진정한 철학자는 모든 육체적 욕망을 멀리하고 영혼의 순수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을 순수하고 맑게 하는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모든 쾌락과 고통이 영혼을 육체에 예속시키게 된다고 보았다. 그런 까닭에 애정과 정욕들을 잠재우고 이성에 따르며, 참된 것을 쫒아야 인간적인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영혼은 죽지 않고 없어지지 아니하며 하데스에 존재하게 되므로, 영혼이 악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선하고 현명해지는 길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철학자들은 사실은 죽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니, 모든 사람들 중에서 죽음을 가장 덜 두려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되도록 혼을 몸으로부터 분리해야만 몸의 욕망에서 벗어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유를 사용함으로써 진리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생의 끝이 아니라 순수한 지혜를 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가 철학하는 사람이란 "죽는 것과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라고 말한다. 지혜로 정화 받은 사람은 저승에 가더라도 신들과 함께 오래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 언젠가 이승에 돌아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지혜 사랑을 추구하는 것만이 혼의 불멸과 환생을 기약하게 해 준다는 의미다.

소크라테스는 늘 육체의 욕망에 휘둘리는 감각적 삶보다 이런 것들에 초연할 수 있는 이성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철학자의 혼은 이성을 따르고 언제나 이성과 함께함으로써, 그리고 의견의 대상이 아닌 참되고 신적인 것을 정관하고 양식으로 삼음으로써 (쾌락과 고통에 얽매이는) 감정들에 초연해야 한다고 믿네. 또한 철학자의 혼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살아야 하며, 그러다가 죽으면 성질과 본성이 자기와 같은 것에게로 가서 그곳에 이르러 인간의 불행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평소 혼을 강조했지만, 혼이 불멸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제자들도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심미아스 같은 이는 혼은 항상 몸과 함께하며 이 둘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각각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혼은 일종의 조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이 죽으면 혼 역시 소멸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혼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비가시적 세계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 케베스도 영혼불멸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혼이 몸보다 더 오래간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해도 혼이 수많은 몸을 잇달아 닳아 없어지게 한 뒤 결국 마지막 몸을 벗어나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심미아스의 "혼은 조화"라는 주장을 이렇게 반박한다. 혼은 조화라고 말할 때는 구성 요소들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혼은 육체의 욕망에 반대하고, 통제할 능력을 갖고 있는 만큼 그러한 조화보다 훨씬 더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조화를 넘어선 "본성상 조율된 조화"라고 말한다. 
​​
​소크라테스는 "혼은 사람의 형태와 몸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존재"하며, 혼이 들어 있기에 몸이 살아 있는 것이므로 죽음은 단지 육신과 혼을 분리시키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혼은 저승으로 여행을 떠나 심판자에 의해 죗값을 치르거나 응분의 보답을 받아 각자 적절한 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이 육체와 혼을 함께 소멸시키는지, 아니면 혼만 홀로 남아 새로운 모험의 길을 떠나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이는 과학적 검증의 문제를 넘어 신학적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혼이 불멸한다면 결국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라면 죽음은 악인들에게는 횡재겠지. 그들은 죽음으로써 혼과 함께 몸과 자신들의 악행에서도 해방될 테니까. 그러나 혼이 죽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지금, 혼이 악행에서 도피하거나 구원받을 길은 달리 아무것도 없네. 최대한 선량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 말고는."

소크라테스가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미덕과 지혜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다.​

"만약 혼이 죽지 않는다면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이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위해 혼을 보살펴야 하며, 만약 누가 혼을 소홀히 하면 무서운 위험에 빠지게 되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네."

소크라테스는 죽음 앞에 담담했다. 혼의 불멸을 믿은 그는 죽음은 삶의 종결이 아니라 지혜로 갈고닦은 맑은 영혼의 '고상한 모험'의 출발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지혜는 상기다

두 번째 화두였던 '상기론'을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우리의 소유였던 지식을 되찾는 것인즉, 이를 상기(想起)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이는 혼을 불멸의 존재라고 인식한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상기는 닮은 것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닮지 않은 것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봄으로써 다른 사물을 생각하게 된다면 두 사물이 닮았건 닮지 않았건 그것은 필연적으로 상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고 듣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어딘가에서 같은 것 자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전에 알고 있었던 어떤 것을 망각하였다가 다시 떠올리는 것을 '상기'라고 본다면 우리가 얻는 배움은 언젠가 알고 있다가 잊어버렸던 것을 다시 생각해내는 '상기'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소크라테스는 '배움은 상기'라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필연적으로 우리의 혼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나아가 우리가 죽은 뒤에도 혼이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혼은 "항상 존재하고 죽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의 영역에 머문다"고 여겼다. 혼의 이런 상태가 '지혜'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혼은 인간의 몸이 해체된 이후에도 비가시적인 영역에 머물게 되지만, 혼이 몸의 욕망에 사로잡혀 정화되지 못한 채 몸을 떠난다면, 혼은 제대로 분리되지 못하고 다시 몸에 갇힐 때까지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혼이 제대로 불멸하도록 올바르게 철학을 수행하며 편안하게 죽는 수련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혼이 신체적인 것에 오염될 경우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떠나지 못하고, "가시적인 세계로 도로 끌려가서 무덤과 묘비 주위를 배회한다"는 것이다.  

"혼이 생각과 기쁨을 몸과 같이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성격과 생활방식에서 몸과 같아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정화된 상태로 보이지 않는 세계인 이승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혼이 이성을 따르고 감정들에 초연해야 인간의 불행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소크라테스는 상기설에서 시작된 혼의 인식을 혼과 육체의 관계를 보다 엄밀하게 규명하는 단계, 그리고 영혼불멸의 여부에 대한 논의로 확장해 갔다. 먼저 혼과 육체의 관계가 '일종의 화음' 또는 '일종의 조화'라는 이론의 검증부터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심미아스는 혼은 일종의 조화인 만큼 몸이 소멸되고 난 뒤 혼 역시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존재한 혼의 작용에 의한 상기설은 부인되고 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혼이 만약 조화라면 올바른 추론에 의해 사악함을 전혀 내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악함은 부조화라고 가정한다면 절대적으로 조화인 혼이 부조화를 내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혼이 몸의 느낌들에 휘둘리기 마련인 조화가 아니라, "혼을 몸의 느낌들을 지도하고 통제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조화보다 훨씬 더 신성한 것"으로 보면서 혼이 조화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혼을 가꾸어야 하는 이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설의 증명을 시도한다. 그는 "아름다운 것 자체 외에 어떤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아름다운 것 자체에 관여하기 때문"이라는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름다운 것 자체가 그 사물에 내재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그 사물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치에 따르면, 어떤 형상들이 존재하며 다른 것들이 이들 형상들에서 이름을 따오는 것은 이들 형상들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어떤 대립되는 다른 것은 이전의 자신으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와 대립되는 것이 되거나, 자기와 대립되는 것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쉬운 예를 들었다. 큼은 자신과 대립되는 작음이 다가오면 양보하고 물러서거나, 작음이 다가왔을 때는 이미 소멸해버림으로써, 큼은 작음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더 들자. "눈이 눈인 한 더위를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눈으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뜨거울 수는 결코 없으며, 더위가 다가오면 눈은 물러서거나 소멸해버릴 것"이다.

이로써 대립되는 것들 자체는 결코 서로가 서로에서 생길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소크라테스는 "대립되는 것만이 대립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점유하는 것 속으로 대립되는 것과 동행하는 것도 있는데, 대립되는 것과 동행하는 것 역시 자신이 동행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삼단논법의 마지막 수순으로 혼을 등장시킨다. 혼은 무엇을 점유하든 항상 그것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만큼 혼은 자기와 동행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생명에 대립되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로써 혼은 불멸한다는 이론은 입증된 셈이다. 혼은 죽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은 채 죽음에 자리를 내주고 저승으로 떠나갈 것이라고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그가 평생 아테네 시민들에게 혼을 가꾸라고 채근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만약 혼이 죽지 않는다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위해 혼을 보살펴야 하며, 만약 누가 혼을 소홀히 하면 무서운 위험에 빠지게 되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라면 죽음은 악인들에게는 횡재겠지. 그들은 죽음으로써 혼과 함께 몸과 자신들의 악행에서도 해방될 테니까. 그러나 혼이 죽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지금, 혼이 악행에서 도피하거나 구원받을 길은 달리 아무것도 없네. 최대한 선량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 말고는."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제자들과의 대담에서 영혼불멸을 설파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사자(死者)의 혼은 저승으로 가서 자신들이 지은 죗값을 치름으로써 정화되기도 하고, 선행에 대해서는 각자 응분의 보답을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철학으로 충분히 정화된 사람들의 혼은 앞으로는 전적으로 몸 없이 살며 더 아름다운 거처들에 이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자신이 그 혼의 거처로 이동하는 것을 '고상한 모험'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장례식 때 시신의 입관 준비를 하거나 운구하거나 매장할 때 소크라테스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당부한 까닭도 생명이 다한 육신 그 자체와 영생하게 될 자신의 영혼을 준별하려는 의도를 강조한 것이리라.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영혼의 새로운 여행의 출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절친 크리톤에게 한 마지막 유언도 이와 무관치 않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그분께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게."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의 아들로 의술의 신이다. 그리스인들은 병이 나으면 아스클레피오스의 은공에 보답하고자 수탉 한 마리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죽음으로써 삶이라는 질긴 ‘질병’에서 벗어나 영혼의 여행을 훌훌 떠날 수 있게 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 보답으로 그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을 봉헌하도록 부탁하였던 것으로 새길 수 있겠다. 이렇게 삶이 고행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사생관은 그가 아테네 시민법정에서 한 최후의 변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착한 사람에게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으며 신들께서는 착한 사람의 일에 무관심하시지 않다는 이 한 가지 진리만은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제는 내가 죽어 노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자신의 영혼 불사를 위해 세상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리를 궁구하였다. 그런 그였기에 죽음 앞에서 한 점 두려움을 갖지 않고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영혼의 영원한 삶을 위해 선과 지혜를 추구할 것을 설파하였다. 그의 육신은 떠났으나, 지금까지 인류에게 무한한 감동과 지혜를 주고 있다. 그의 사상과 영혼은 우리의 가슴에, 우리의 영혼으로 이어져 살아 숨 쉬고 있음에 틀림없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파이돈》,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2), 348쪽.

[박경귀]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