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64)-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찰과 탐구
아리스토텔레스(BC 384년 ~ BC 322년) 『자연학소론집』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고대기 동양과 서양 학문의 큰 차이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학술적 궁구의 대상으로 파고들었느냐이다. 탈레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 생명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궁구했다. 

반면에 노자, 공자, 맹자, 장자, 순자 등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영혼의 속성은 탐색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천명으로 주어진 천자(天子)가 지배하는 주어진 세계관 속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역할과 행동양식에 대한 교훈을 찾는데 집중했다. 고대 중국 사상가들은 한마디로 통치술과 윤리학의 교사였던 셈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 자연학자들은 인간의 영혼과 생명현상을 다각적으로 궁구해냈지만, 중국의 사상가들은 생명의 원인과 본질적 속성을 탐구하는 제 학문에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추구한 자연 연구는 실은 인간 연구의 출발이었다. 그들은 사물의 본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생물과 무생물의 속성이 어떻게 다른지 끊임없이 의문했다. 그 결과로 서양에서는 자연철학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학문 영역을 발전시킨데 반해, 중국에서는 정치학에 편중된 학문이 발달하는 결과를 낳았다.   

서양학문, 특히 인류의 과학적 발견과 탐구의 주류 성과들은 고대 그리스 자연학자들의 선구적 착상과 궁구에 절대적으로 힘입은 바 크다. 탈레스(BC 624?~546?)는 만물의 근원을 물로, 아낙시메네스(BC 585?~528?)는 공기로 보았다. 기원전 6세기 말에 활동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요소로 불을 주목했다.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3∼433)가 만물의 근원을 물, 공기, 불, 흙의 네 가지 요소로 규정한 것도 그런 연구의 결과였다.  

만물의 근원을 궁구하던 자연학을 만물 가운데 독특한 역량을 가진 인간에 대한 연구로 초점을 맞춰 나가면서 큰 학술적 성과를 거둔 이는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이다. 그 위대한 산출물이 바로 《자연학 소론집》이다. 이 자연학적 성과들은 중국의 정치 사상가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미답의 영역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는 위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의 감각이란 어떤 속성을 지녔는가? 동물의 수명은 왜 길거나 짧은가? 인간의 죽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잠과 깨어 있음의 원인과 감각은 어떠한가? 동물 호흡의 양태는 생명과 어떤 관계일까? 2300여 년 전에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고자 한 그의 조사와 분석활동은 현대의 의학, 감각생리학, 생체 에너지학, 분석심리학의 원초적 발상이 되었다. 제 학문의 기초를 닦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궁구한 주요 테마 가운데 몇 가지를 들여다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을 가진 동물들의 능력들을 두루 살폈다. 먼저 혼과 몸에 공통된 것들인 감각과 감각 대상을 고찰했다. 그는 동물의 감각능력들 가운데 시각이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지만 정신의 발달을 위해서는 청각이 간접적으로 더 뛰어나다고 보았다. 그는 시각이 겪는 성질의 원인을 선행 자연학자들의 견해로부터 탐색했다. 그는 눈에서 빛이 나옴으로써 시각의 기능이 발휘된다고 생각한 엠페도클레스의 생각은 틀렸다고 말한다. 또 눈이 본질적으로 물이라고 한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맞지만, 본다는 것은 곧 상(像)이 비친다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밝힌다.  

"눈이 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맞지만, 봄이 이루어지는 것은 눈이 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눈이 투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혈동물들의 눈이 지방이 많고 기름진 이유도 액(液)이 얼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눈이 몸에서 가장 추위에 무감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분석은 치밀한 관찰에서 얻어낸 결론이다. 

그는 미각이 발생하는 원인도 밝혔다. 그는 닮과 씀의 혼합으로부터 다양한 맛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맛들이 원자들의 여러 가지 모양들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여긴 데모크리토스는 비판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운 맛은 뾰족한 원자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식의 데모크리토스의 설명을 부인한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의 감각이 어떤 겪이를 통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혼의 능력으로 보았다. 혼은 모든 것들을 감각하는 단일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의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감각과 더불어서가 아니라면 이성은 외부 사물들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각은 여러 한계를 지닌다. 모든 물체는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감각 성질들은 감각을 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크기를 갖기 못하면 지각할 수 없다. 또 두 개의 대상을 분할되지 않은 같은 시간에 동시에 감각하지 못한다. 한 가지 감각으로써 동시에 두 사물을 감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억과 기억해냄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도 흥미롭다. 기억 역시 감각의 경험(겪이)으로 형성되는데 "기억력은 간접적으로 이성 능력에 속하지만, 그 자체로는 중추 감각 능력에 속한다." 기억은 감각과 더불어 일어나는 움직임(자극)이 감각에 대한 인상 같은 것을 사람의 혼 안에 찍어 놓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태나 경험이 생겨난 뒤에야 비로소 기억이 있게 된다. 

기억해냄은 달리 말해 기억된 것들을 상기(想起)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주 마음에 품었던 것들, 반복적으로 일어난 일들은 더 잘 기억해낼 수 있게 된다. 물론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기억해내는 능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기억해냄은 일종의 추론과 같아서, 숙고 능력이 있는 동물들에게만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밝혀낸 기억의 원리에 비추어 본다면, 무엇인가를 잘 기억해내기 위해서는 영혼에 찍힌 관련된 영상(映像)들을 이리저리 무엇인지 헤아리고, 기억의 움직임 속에서 시간과 장소 같은 단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런 추론 능력이 탁월한 사람은 기억해내는 상기 능력 또한 우수할 것 같다. 

잠과 깨어 있음 또한 동물들에게만 고유한 현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의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동물들의 활동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는 육상동물은 물론 물고기들과 연체동물들까지 관찰했다. 동물들은 잠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자는 동안 어떤 감각들은 겪이가 일어나고, 어떤 감각들은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작동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한 무감각 상태에 놓이거나 감각 불능 상태에 이를 필연성은 없다. 감각의 휴식이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 

잠을 자거나 깨어 있거나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이 오는 현상이 음식물로 인한 발산물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음식물의 섭취로 인해 발생한 열이 몸의 위로 올라가게 될 때, 머리 부분에서 이 따뜻한 기운을 밀쳐 낼 때 잠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식후에 졸음이 오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발산물 가운데 굳은 것이 따뜻한 것에 의해 혈관들을 통해 머리로 올라 갈 때" 잠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두뇌 혈관들의 냉각 작용이 잠의 원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수면을 지배하는 것이 대뇌라는 현대 의학의 지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잠이 일어나는 과정이 뇌 안의 어떤 메커니즘에 의한 것인지 아직도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말이다. 

또 피로도 잠을 몰고 온다. 피로에 의한 분해 작용에서 습하고 따뜻한 잉여물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잠을 부른다는 것이다. 잠은 피로의 회복을 돕고 동물의 성장 활동을 촉진시킨다. 유아기에 잠을 많이 자면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도 같은 이치다. 

꿈이 감각 능력의 현상인지, 사유 능력의 현상인지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 영역이었다.  꿈은 감각 능력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깨어 있을 때와 다른 방식으로 자극을 받는다. 또 꿈속에서도 영상들 외에 다른 어떤 것들을 마음속에 품고 판단하기도 하지만, 깨어 있을 때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키거나 잠을 깬 후에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꿈을 판단 능력과 사유 능력에 속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는 꿈을 꾸는 것은 그것이 상상 능력인 한에서 감각 능력에 속한다고 보았다. "상상은 발휘 상태에 있는 감각 능력에 의해 생겨나는 움직임이고 꿈은 일종의 영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꿈속의 영상들이 감각 능력의 자극과 상상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감각 대상이 떠난 뒤에도 감각 결과는 감각되는 것으로서 잔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의 경험에서 두려움이나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감각과 기억을 강하게 갖고 있을 때, 여러 가지 상상과 곁들여진 이와 관련한 영상을 꿈꾸게 되는 현상으로도 쉽게 이해된다. 결국 꿈은 이전에 작동되었던 '감각물의 잔존물'인 셈이다. 즉 꿈은 감각물의 움직임에서 나온 영상이다. 

이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꿈의 예언적 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꿈에 나타난 영상들은 자신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나 행위의 원인이나 시초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 근원이 자신에게 들어있지 않은 꿈은 여러 경험과 환영들이 뒤섞여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꿈은 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다. 꿈이 어느 정도 신의 계시적 특성을 갖는다고 여기던 당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주장이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 현상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생물 수명의 길고 짧음, 그리고 소멸되는 원인에 대해서도 탐구했다. 동물은 본래 습하고 따뜻한데 늙게 되면 마르고 차갑게 되어 간다고 한다. 따뜻한 습기가 성장과 긴 수명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반면 식물은 잘 마르지 않는 습기를 갖고 있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오래 산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호흡에 대한 논의에서 이전에 이루어진 자연철학자들의 다양한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는 허파가 없는 동물들에 관해서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 모든 동물은 호흡한다고 말하는 아낙사고라스나 디오게네스의 견해를 비판한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아가미로 호흡한다고 하는 데 어떤 방식으로 들이쉼과 내쉼이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 그들의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류와 곤충류의 호흡 방식을 좀 더 깊은 관찰을 토대로 설명한다. 

동물에게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열의 냉각도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호흡 활동을 냉각 작용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 허파와 아가미가 공기와 물의 들이쉼과 내쉼을 통해 열기를 식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열이 많은 동물들이 과도한 열을 피해 물속으로 옮겨 살게 된다는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은 맞지 않다고 비판한다. 마른 땅에서 태어나 서식처를 물속으로 바꾸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모든 생명체의 본성들은 각기 그것이 있는 지역과 같은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에게 죽음은 어떻게 올까. 유혈동물은 심장의 정지로, 무혈동물들에서는 심장에 상응하는 것들의 기능 정지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호흡을 할 수 없는 질식도 죽음의 원인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치밀하게 관찰을 통해 얻은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해부학적 지식을 보태어 동물들의 호흡의 원인과 생명과 연결되는 방식 등을 규명하고 있다. 그의 과학적 정신이 빛난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 대한 관심의 폭은 매우 넓고 깊다. 그의 전체 저작 분량의 삼분의 일 가량이 생물학에 관련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이다. 그는 정치학자, 철학자 이전에 생물학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그가 그렇게 생물과 자연 현상들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인간을 자연계의 생명체 가운데 하나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한편으론 인간의 속성과 독특한 특질을 보다 뚜렷하게 구별해 보려는 시도의 하나였다고 보인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생리학적 실험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불모기에 다양한 생명체의 여러 현상들을 해부학적 관찰과 비교 검토를 통해 규명함으로써 경험주의와 과학주의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자연학 소론집》,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진성 역주, 이제이북스(2015),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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