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20)-이성과 양심의 준칙 다이모니온
크세노폰(BC 430?~354?) 『소크라테스 회상』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인류가 낳은 최고의 현인 가운데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거리의 철학자였던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어떻게 선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지혜롭게 살 것인가를 궁구(窮究)하게 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러한 실천적 삶을 신이 부여한 소명으로 생각했다. ​

하지만 전성기의 기상이 쇠락하기 시작한 아테네인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질문과 깨우침은 더 이상 신선한 자극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산파(産婆)적 역할을 성가시게 생각하고 있었다.​

BC 399년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하고 사형을 판결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의 어리석은 결정을 질타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시민들을 일깨우는 자신의 소명을 그치지 않겠다며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죽음 앞에서도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철학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
아테네 시민과 불화하여 초래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퇴조를 결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27년 동안 지루하게 계속되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굴욕적으로 항복한다. 그 때가 BC 404년이다. 패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아테네 시민들은 정신적 공황을 겪으며 그리스 문명의 스승, 인류의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세웠다. ​

여기에는 많은 요인들이 결부되어 있었다. 크리티아스와 같은 일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스파르타의 괴뢰정권인 30인 참주정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에 따라 생긴 반감이 소크라테스에게 전이된 측면도 있었다. 아무튼 아테네 시민들은 평소 민주주의에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고, 특히 청년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통해 지혜를 궁구하도록 이끄는 소크라테스를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보았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의 판결대로 그들 곁을 떠나갔다. 그에게 학문과 철학을 배우고 따르던 숱한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애통해 했음을 물론이다. 더구나 소크라테스의 사후 그에게 덧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일이 시급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덕성과 지혜에 이끌려 그의 제자가 되었던 크세노폰 역시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오해를 풀고자 했다. ​

『소크라테스 회상』은 바로 스승 소크라테스의 신원(伸寃)을 위한 소크라테스 평전 성격을 띤다. 크세노폰은 우선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사람들이 내건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신봉하지 않고 새로운 신격(神格)을 수입한 죄"와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소명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한 신, 세상을 만든 조물주와 올림포스 신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신심은 두터웠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모든 면에서 한 번에 일체를 유의(留意)하시는 위대함과 원만자재(圓滿自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인간 사회의 가장 장구하고 가장 현명한 국가 및 국민은 신들을 가장 독실하게 공경하고, 지혜가 가장 원숙한 연배들을 신들은 가장 조심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평소 여러 담화에서 한 이런 얘기들을 전하며 그 누구보다도 그가 신을 공경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 인간에 속하는 것 중에서 무엇보다도 신의 성질을 띠고 있는 영혼은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 본체는 보이지 않는 법일세.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명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말고 모든 현상 속엔 신들의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신령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세."​

소크라테스의 확신에 찬 말에 비추어 볼 때, 신들에 대한 그의 공경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물론 크세노폰은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가 다른 신을 숭배한다고 의구심을 갖는 근거가 되었던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the daimonion of Socrates)'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

사실 소크라테스는 평소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을 할 때, 다이모니온께서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준다고 말하곤 했다. 이 다이모니온은 자연에 깃든 신이나, 아폴론이나 제우스와 같은 올림포스 신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떤 신일까? 다이모니온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당시 아테네인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또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 간에도 다이모니온의 실체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다이모니온이 단순히 양심의 목소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소크라테스가 늘 강조하던 준법에서 나오는 정의(正義)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적 통찰에서 나온 내면의 목소리였을까? 가장 지혜로운 자에게만 깃드는 특별한 정령(精靈)일까? 필자는 요즘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이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언급한 도덕관능(道德官能, moral faculties)과 유사한 측면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부쩍 하게 된다. ​

애덤 스미스는 천성(天性)이나 본능에 내장된 일반준칙들이 있는데, 이런 일반준칙이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 행동의 시인(是認)과 부인(否認)이, 즉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이 일반원칙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

애덤 스미스는 이 준칙들이 "신이 인간의 내면에 세워 놓은 대리인들에 의해 공포되는 신의 명령과 신의 법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신이 무엇인가를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곧 준칙의 신적인 기능을 말한 것이 아닐까. 

아무튼 다이모니온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그것이 아테네 시민들이 숭상하던 신에 대한 믿음과 충돌하는 '새로운 신격(神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은 분명히 아테네인들이 말하는 신적인 영역과는 분명이 다른 차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명령과 신의 법으로 간주"되는 것과, 신 자체의 명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죄목은 분명 무리한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신을 믿었다는 의구심은 그를 기소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언행과 사상, 제자들과 나눈 다양한 대화와 전문(傳聞)의 회상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인간됨과 철학자적 지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이 선을 인식하게 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의 어려움, 즉 무지에 기인하는 것은 지혜를 빌려주어 도와주고, 궁핍에 기인하는 것은 각자의 힘에 따라서 서로 돕도록 가르쳐서 구하려고 했다." 또 "제자들에게 식사․술 방탕․졸음에 대한 극기(克己), 주의의 더위나 간난(艱難)에 대한 인내의 함양을 고취했다." 나아가 "최고의 미와 최대의 금도를 함양하며, 이로써 국가 및 가정의 훌륭한 일원이 될 것을 고취"했다는 것이다. 이런 언행으로 미루어 볼 때,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을 부패시켰다는 죄목은 애초에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교육 철학을 각종 예화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안티폰과의 담화를 통해 절제 있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고, 아리스팁포스와의 대화에서는 극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어머니에게 화를 내던 자신의 장남 람프로클레스에겐 올바른 효도 방법에 대해 갈파하기도 한다. ​

소크라테스 훈육의 주제는 개인적 삶에만 머물지 않았다.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 또 군대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답지 않은 실용적인 혜안을 펼쳤다.​

"장군은 전투를 위한 만반의 군비를 갖추고, 게다가 병사들에게 양식을 공급해야 하며, 그리고 기책(奇策)을 종횡으로 구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활동적이고 용의주도하며, 강의(剛毅)하고 기민(機敏)해야 하며, 유화하면서도 잔인해야 하며, 솔직하면서도 책모(策謀)적이어야 하고, 신중하면서도 교활하고, 낭비적이면서도 약탈적이고, 호기스러워야 하고 탐욕적이어야 하며, 수비를 견고히 하면서도 공격적이어야 하고, 그 외에 광범위한 일에 선천적으로 혹은 수학(修學)에 의해서 삼군(三軍)을 통솔하기 위하여 숙달되어 있어야 하네. 전열 배치에 숙련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네."

소크라테스는 행복한 삶을 위한 개인적 지침뿐만 아니라 국가를 다스리는 방책, 국가의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아들 페리클레스(페리클레스의 정실 아들들이 역병으로 모두 죽자 시민들은 페리클레스의 서자 출신의 아들에게 부친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와의 담화에서는 통치자가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협조와 복종을 얻어낼 수 있는지 가르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일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행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갖추도록 노력"할 것을 공통적으로 주문하고 있다. 이런 점들은 『대학』에서 논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덕목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

크세노폰이 보여주는 소크라테스의 삶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이상화된 측면이 있다면 크세노폰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보다 친근한 이웃집 선비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플라톤의 현란한 문체 속에 담긴 철학적 깊이에 비교해서 이 작품의 내용이 다소 평범한 산문이라는 이유로 버트란트 러셀 같은 이는 이 작품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인간적 면모를 꾸밈없이 드러낸 이 작품이야말로 소크라테스에게 많은 오해를 품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더 와 닿았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청년 교육의 주안점을 선한 사람을 만드는데 두었고, 나아가 모든 분야에 진정한 지혜를 갖춘 인재를 육성하고자 애썼다는 점을 충분히 묘사해냈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이상화되지 않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적 소신과 가치를 꿋꿋하게 전파하려 애쓴 꼬장꼬장한 이웃집 아저씨 소크라테스가 여기에 담겨 있다.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사상을 가졌지만 스스로를 범접할 수 없는 경외의 인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스승을 변호하려 한 크세노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소크라테스 회상』, 크세노폰 저, 최혁순 옮김, 범우사(1998, 3판 1쇄),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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