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25)-로마 시대의 아름다운 축제 달력
오비디우스(기원전 43년~기원후 17년 ) 『로마의 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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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호메로스의 뒤를 잇는 로마 최고 작가는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이다. 이 두 사람 모두 고대 그리스의 문학적 유산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로마의 영광과 위대함을 문학을 통해 구현하려 했던 공통점을 지닌다. 호메로스의 불멸의 고전인 『오뒷세이아』를 모방하여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창작했다면, 오비디우스는 그리스의 특정한 고전 작품을 모방하기보다, 그리스 문명이 창출해낸 다양한 신화와 전설, 문화적 유산을 서사적인 여러 작품에 폭넓게 펼쳐 보였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후세대가 그리스 신화를 보다 풍요롭고 흥미롭게 접할 수 있는 자산을 제공했다. 그리스 신화의 백화사전으로 불리는 아폴로니오스의 『비블리오테(Bibliotheke)』보다 스토리의 구성과 서술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의 스토리텔링 역량은 베르길리우스를 넘어 호메로스를 멀리서나마 뒤따른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리스 신화의 생생한 흡인력은 상당히 떨어질 뻔했다. 모든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후대의 저작들은 하나 같이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축제들(fasti)』은 그리스 신화와 고대의 설화, 그리고 로마의 세시풍속에 해박한 오비디우스의 인문적 지식과 작가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저작이다. 특히 『변신이야기』에서 자신이 소개했던 그리스 신화들 가운데 적지 않은 소재들이 이 책에 축약되어 다시 소개 되고 있다. 다만, 본격적인 신화이야기를 담은 『변신이야기』와 달리 『로마의 축제들』에서는 월별 또는 일별로 축제의 기원이나 세시풍속과 전설, 그리고 별자리의 기원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면서 이와 연관된 신화가 압축된 형태로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변신이야기』와 『비블리오테(Bibliotheke)』,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이미 읽어 그리스 신화에 풍부한 이해를 갖는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은 술술 읽힌다. 또 각 작품들 속에서 기술되는 신화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비교해서 살펴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특히 오비디우스가 이 책에서 인용하는 신화와 전설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 신화와 전설에서 시작하여 로마의 전설과 역사로 이어지는 맥락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특장이다.
우리는 오비디우스를 통해 로마의 축제와 역사의 먼 기원이 대부분 그리스 신화와 전설에 닿아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로마 인문의 소재가 그리스 문명의 마르지 않는 원천에 힘입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는 뜻이다. 오비디우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로마의 토착신이나 전설, 신화를 새롭게 발굴하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의 죽음과 관련한 퀴리날리아(Quirinalia) 제(祭), 로마인들이 사비니(Sabini)족 여인들을 납치한 뒤 서로 화해하는 이야기와 관련된 마트로날리아(Matronalia) 제의 소개가 그런 예이다.
또 1월 1일에 등장하는 야누스(Janu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지 않는 로마의 고유 신의 대표적인 예다. 야누스는 "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등을 볼 수 있는" 끝과 시작의 양면을 함께 갖고 있는 신이다. 계절의 마감과 시작을 뜻하기도 하니 새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격이다. 로마인들은 1월은 곧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야누아리우스(Januarius)로 불렀다. 영어의 1월을 뜻하는 재뉴어리(January)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야누스는 하늘의 문의 수호신이다. 모든 문은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야누스는 안팎을 가르는 경계인 문의 통제자이다. 로마인들이 야누스 신을 섬긴 이유는 야누스를 안으로는 집안을 지키고 밖으로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관문의 수호신으로 여긴 까닭이다.
또 로마인들이 야누스를 특별하게 숭배한 것은 그가 일상의 문이라는 의미를 넘어 평화의 문을 지키는 수호신이기 때문이다. 야누스 신전의 문은 평화로울 때는 닫혔고 전시에는 열렸다. 평화로울 땐 평화가 떠나지 못하도록 닫혔고, 전쟁 시에는 전쟁터로 나간 백성이 귀향할 수 있도록 열어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누스 신전이 굳게 닫히는 그 때야말로 태평한 시대가 된다. 로마인들이 모든 신들 중에서 제일 먼저 야누스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기원했던 이유도 평화를 소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인들은 새해 첫 날에 야누스에게 향과 물을 타지 않은 포도주를 바쳤고, 1월 9일엔 가축을 바치고 야누스 신을 달래는 아고날리아(Agonalia) 제를 열었다.
오비디우스는 로마의 축제가 기원한 일자별로 그 신화적 배경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로마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도 기록하여 로마의 역사 연표를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2월 24일은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 왕자가 루크레티아를 겁탈하고 도주함으로써 로마 왕정이 붕괴된 날이다. 오비디우스는 이 사건의 전말과 급박하게 조성된 혁명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또 4월 21일은 가축의 보호신인 팔레스(Pales)에게 제사지내는 파릴리아(Palilia) 제가 열리는 날이다. 사람들은 이날 불타는 세 개의 짚 무더기를 뛰어넘고, 젖은 월계수 가지로 물을 뿌리거나, 양들을 유황 연기를 쐬게 하거나 가축우리에 물을 뿌리고 정화했다. 재앙을 막고 가축의 왕성한 번식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상극(相剋)인 불과 물을 사람과 가축의 몸에 닿게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날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창건한 역사적인 날이어서 특별한 의미가 더해졌다.
『로마의 축제들』은 유난히 별자리의 기원에 대한 기술이 많다. 5월 1일에는 아기 유피테르(제우스)를 염소의 젖으로 키운 아말테아(Amalthea)를 기린 염소자리(Capricornus)의 기원이 설명된다. 5월 11일에는 오리온(Orion)자리의 기원이 등장한다. 그리스 보이오티아 청년이던 오리온은 뛰어난 용모와 사냥재주로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오리온은 "내가 이길 수 없는 야수는 아무것도 없다"고 자만하는 바람에 대지의 여신 텔루스(Tellus, 그리스 신화의 Gaia)의 분노를 사서 전갈에게 물려 죽고 만다. 오리온은 사후에 아르테미스의 어머니 라토나(Latona, 그리스 신화의 Leto)에 의해 별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전갈자리(Scorpius)가 오리온자리를 끊임없이 쫓도록 별자리가 배치된 것은 이 신화의 연장이다. 황소로 변신한 유피테르가 에우로페를 납치했던 신화와 관련된 황소자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아무튼 그리스인들은 신화의 주인공들을 하늘의 별자리로 옮겨놓아 하늘을 신과 인간들의 이야기로 수놓았다. 로마인들 역시 별자리에 얽힌 그리스 신화를 이어받아 기렸음을 알 수 있다. 땅에 얽히고 하늘에 걸린 숱한 신화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관장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신들의 세계와 섭리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하늘의 별자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흥미로운 스토리를 발굴하여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 한 여름 밤 별무리의 아름다움에 빠지거나 하염없는 별을 헤며 사랑을 기약하는 연인들이 별자리에 얽힌 한두 가지 신화를 알게 된다면 더욱 뜻 깊은 시간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케레스의 딸 페르세피나(Persephina, 그리스 신화의 Persephone)의 납치와 관련된 4월 12일 케리알리아(Cerialia) 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케레스(Ceres)는 원래 자연의 생식력을 대표하는 고대 이탈리아의 여신이었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대지의 여신이자 농경과 수확의 여신인 데메테르(Demeter)와 동일시되었다. 오비디우스는 여기서도 그리스 신화를 그대로 로마의 신화로 차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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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의 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 대리석상, 고르티나에서 발굴되었다. 2세기경 작품, 크레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
저승 세계의 지배자인 하데스 신에게 납치된 딸 페르세포네를 찾기 위해 어머니 데메테르가 방방곡곡의 들판을 헤매며 애태우는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다. 신 역시 인간 못지않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일했음은 보여준다.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 헤매다 엘레우시스에서 만난 한 누추한 노인에게 "내 딸은 납치되었소. 아아, 그대의 운명이 내 운명보다 얼마나 더 낫습니까!"라며 탄식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신인지라 눈물인 양 수정을 자신의 가슴위에 떨어뜨린다. 독자의 가슴을 적시는 장면이다. 신은 불멸인데 반해 인간은 필멸의 운명이라는 점만 다를 뿐 똑같은 모습과 정서를 지녔다고 생각한 그리스인들의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 anthropomorphism)이 로마인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데메테르는 실종된 페르세포네를 찾기 위해 횃불을 들고 시칠리아의 바위 곶과 아이트나 화산 기슭을 헤매고, 아테네 외곽 도시인 엘레우시스, 아시아 도시들까지 수소문하며 다닌다. 결국 세상을 지켜 본 태양에게 물어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된 사실을 알게 된다. 데메테르는 제우스에게 간곡하게 탄원하여 딸 페르세포네가 일 년에 여섯 달 동안만이라도 하늘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허락받는다. 오비디우스는 데메테르가 페르세포네를 되찾는 이 긴 과정의 묘사에서 케레스 축제의 기원과 엘레시우스(elesius) 비의(秘儀)의 일부 관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오비디우스는 이 책에서 하루하루 이어지는 날들에 얽힌 로마의 역사와 풍속, 신화와 전설,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 로마인들의 의식과 의례(儀禮), 관습의 배경을 종합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6월 30일로 마무리가 된 미완의 작품이다. 그가 로마에서 먼 흑해 서쪽의 궁벽한 곳에 유배된 상태에서 이 책을 저술하다보니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일 년 열두 달을 그의 유려한 문장의 숱한 이야기로 가득 채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로마 시대의 아름다운 축제 달력을 온전하게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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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도서: 『로마의 축제들』,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0), 400쪽. |
[박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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