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65)-마음의 평정으로 화를 억제하는 철학적 치유법
세네카(BC 4?~AD 65) 『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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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인간의 정념 가운데 가장 격정적인 것이 화이다. 마음의 평정이 깨지면서 밀려오는 분노의 원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화가 치밀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분노는 거친 말과 행동으로 표출된다. 적의와 분노가 소용돌이치는 시대는 작은 일도 화를 돋운다. 물론 개인의 화와 사회적 일에 대한 공분은 다르긴 하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BC 4?~AD 65)는 인간의 화의 감정을 냉정하고 깊이 있게 탐색했다. 그는 동생 노바투스가 화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책으로 써달라고 요청하자, 이에 화답하여 '화에 관하여'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인간의 화의 특성과 본질에 대한 인류 최초의 심도 있는 고찰이다.
인간은 왜 화를 내게 될까? 화를 낼 때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하면 화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아예 마음에서 화를 몰아낼 방법은 없을까?
세네카는 화는 "고통을 고통으로 갚아주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화는 어떤 심적 고통을 받을 때 나오는 것임은 분명하다. 결국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스런 상황에 대해 흥분하고 자극을 받아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되갚아 주려는 충동적 행동일 것이다.
세네카는 화가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기 위해 태어나고, 화는 서로를 파괴하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렇듯 화는 앙갚음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평화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질책할 때일지라도 가급적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의 행동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결국 화는 이성의 중재를 거부하고 격정에 끌려 행동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꾸짖되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세네카는 화가 낳는 여러 가지 해악을 설명한다. 화는 조급함과 경솔함에 끌려 다닌다. 결국 화는 자신의 마음의 동의하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격정은 우리가 받은 어떤 인상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그 인상에 내맡기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움직임을 끝까지 따라가는 데에서 온다"는 것이다. 결국 화는 자신의 마음의 동의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화를 다스릴 일차적인 관건은 어떻게 이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 낼 것이냐에 달려있다.
세네카는 화를 마음에서 아예 지워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감정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유의하고, 절대 화에게 출입 허가를 내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감정 조절을 하기 어려운 평범한 사람들에겐 매우 어려운 주문이다.
하지만 세네카는 화라는 감정에 빠지지 않는 것과 화를 피하는 방법에 대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어릴 적부터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불같은 성격인 사람이 가장 화를 잘 내는 데 이런 성격의 사람은 활발한 반면 비타협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네카는 사람의 기질에 따라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만, 어릴 적부터 좋은 습관을 들이면 화를 잘 내는 기질적 특성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세네카는 화를 잘 내지 않도록 하는 자녀 교육법도 제시한다. 먼저 아이들의 언행을 자유롭게 해주어 기백을 심어주되, 기를 살리는 게 지나쳐 오만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오만은 장차 마음에 화를 만들어 내는 씨앗이 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구들과 경쟁을 할 때 아이가 결코 지지 않으려고 하거나 화를 내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친구를 해롭게 하지 않는 정당한 경쟁을 통한 승리를 원하도록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칭찬을 통해 기를 북돋아주되 으스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세네카는 아이를 응석받이로 키울수록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게 만든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집에서 입에 발린 칭찬을 받으며 자란 아이가 밖에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쉽게 화를 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화를 내게 만드는 격정의 근본 원인과 맞서 싸워야 한다. 세네카는 화를 피하는 사전 조건을 알려준다. 화를 낼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에 쉽게 귀 기울이지 않는 것도 좋겠다.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쉽사리 믿어버리면 이성적 판단을 하기 전에 화부터 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화를 내게 만드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말자. 세네카는 이를 제대로 실천한 두 사람의 예를 들었다. 하나는 누구보다 화를 잘 냈던 알렉산드로스다. 그는 와병 중일 때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 필리포스가 독을 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지만, 그 말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필리포스가 주는 탕약을 망설임 없이 받아마셨다. 그 덕분에 병이 나았음을 물론이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필리포스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면 필시 분노하게 되고 어쩌면 그를 해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카이사르의 예다. 그는 내란에서 승리하면서 적장 폼페이우스에게로 가는 편지들을 가로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 편지들을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불태워버렸다. 적진과 내통했을 많은 사람들의 잘잘못을 묻지 않고 모두 용서했던 셈이다. 이 둘의 예는 분노를 일으킬 사안을 사전에 차단해서 마음의 격정을 일으키지 않은 좋은 경우다.
화를 유예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맹렬하게 솟구치던 화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누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격동을 이성적으로 돌아볼 시간을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 시간이 약이 되는 경우는 보통 사람들도 많이 경험하지 않는가. "화에 대한 최고의 치유책은 유예다."
화를 억제시키는 방법이 또 있다. 격정으로 화를 낼 때의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 보라. 분명 볼썽사나운 모습일 터다. 세네카는 화의 이러한 추악함과 위험성을 관찰하는 것도 화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를 끼쳤는지, 나아가 자신을 얼마나 피폐시켰는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본다면 화를 자제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화에 대한 세네카의 철학적 치유책이야말로 이성적 해법이다. 화는 인간의 온화한 정신과의 대결에서 매우 폭력적이라고 지적한다. 상대를 파괴하려는 데서 생겨나는 인간의 격노는 오히려 자신을 먼저 광포하게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네카는 이러한 화마저 혹 자신이 먼저 남에게 악한 일을 한 데서 화가 시작된 경우는 없는지 되돌아보라고 말한다. 나아가 화가 자신의 권력의 증표로 휘두르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철학자의 눈에는 화는 악의와 시기심보다, 그리고 사치와 반목보다 더 나쁘다. 화는 증오를 낳고, 권력자의 화는 전쟁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화를 내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사람이다. 진정 자신의 정신이 고매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어떤 말이나 부당한 대우에도 무시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의 수양이 깊은 사람은 남에게 쉽게 화를 내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화를 낸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이 받은 고통을 복수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어떤 일에도 자극받아 격정을 일으키지 않는 이는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일 것임에 틀림없다. 세네카는 그러한 마음의 평정과 고매한 정신을 함양하라고 강조하는 듯하다.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있었던 여러 인물들의 화에 관한 예화들이 숱하게 담겨 있다.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포악한 실수를 한 사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잔악하게 화를 푼 사례, 분노를 이겨내고 자비를 베푼 사례, 화를 유예시켜 결국 화를 스스로 이겨낸 사례, 혈육이 죽음을 당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분노를 이겨낸 사례, 복수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데도 절제와 온유함으로 받아 넘긴 사례 등등이다.
현대인 역시 일상을 살아가면서 화나게 하는 상황에 숱하게 처한다. 그런데 화나게 하는 많은 것들은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실망 시킨 정도의 것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의도하지 않은 언행 때문에 지나치게 화를 내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결국 화는 자신의 지나친 기대나 욕망에서 스스로 자초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스스로 절제의 미덕을 익히는 것도 공연한 화를 만들지 않게 방법이 될 수 있다. 요즘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상대적 박탈감에서 공연한 화를 키우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이들에게 세네카가 던지는 말은 불필요한 질시와 시샘에서 분노를 키우는 요즘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준다.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 행복할 수가 없다. 내가 기대보다 적게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내가 너무 많이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다른 것보다 이 부분에서 생겨나는 화를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파괴적이고, 우리가 무엇보다 신성하게 가슴에 품어오던 모든 것들을 공격하려 들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인간 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화를 다스리는 현명한 방법을 후세에 전했다. 그렇다. 화로 자신을 소비하기엔 짧은 인생이 너무나 소중하지 않은가. 화를 내려는 자신을 두려워하자.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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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도서: 《화에 대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경숙 옮김, 사이(2013), 248쪽. |
[박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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