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용현 기자]정부가 지난 4월부터 중국산 일반 후판에 대해 최대 38.02%의 잠정 덤핑방지관세를 부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수입업체들이 후판 표면에 페인트를 덧칠해 ‘컬러강판’으로 위장 신고하며 관세를 회피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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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중국산 후판을 도색해 컬러강판으로 위장 수입하다 적발된 모습./사진=관세청 |
◆중국산 후판 ‘컬러강판’ 위장 수입 기승
13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11일 관세청은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100일간 ‘반덤핑 기획심사 전담반’을 편성해 특별점검을 실시한 결과 총 19개 업체로부터 428억원 규모의 덤핑방지관세 회피 행위를 적발했다.
점검 결과 이들은 덤핑방지관세 부과 물품을 수입하면서 관세가 부과되지 않는 품목으로 허위 신고했다. 또 덤핑방지관세율이 낮은 공급사의 명의를 이용해 덤핑방지관세를 회피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단속과 처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도적 허점과 신고 시스템의 취약점이 근본 문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실제 정부는 HS코드 7208, 7225 등 비표면 처리 열간압연 후판에 대해서만 반덤핑관세를 부과하고 있지만, 도장이나 코팅 등 2차 가공이 포함된 컬러후판은 별도의 HS코드(7210.70 등)로 분류돼 사실상 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는 ‘서류상 품목 분류’에 의존하는 현행 제도의 치명적인 허점으로 지적된다.
제품의 물리적 성상과 무관하게 품목번호만 바꿔 신고하면 관세 회피가 가능한 구조다 보니, 업계 내부에서는 “현행 HS코드 체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불공정 무역을 막는 데 한계가 크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뿐만 아니라 수입 신고가 거의 자율에 맡겨져 있어 관세 당국이 일일이 현장 검증과 실물 분석을 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를 키우고 있다. 한국 관세법상 수입자는 관세 신고를 자율적으로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며, 신고 후에는 관세청의 서류 검토와 절차적 심사를 거친다.
이를 위해 서면 제출 방식이 아닌 전자 통관 시스템(UNI-PASS)을 활용하지만, 모든 통관이 자동으로 면밀하게 검증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건에 대해 일일이 검사하기엔 한계가 있다보니 리스크 기반 선별·점검(Risk Management) 방식으로 현장 검사가 이뤄지는 구조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후 적발’ 중심의 단속에 그칠 수밖에 없으며, 적발 이후에도 추징금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아 억제 효과가 미미하다는 지적도 많다. 실제 지난 4~7월 관세청이 적발한 덤핑 관세 회피 행위에 대한 추징금은 11억4000만 원에 불과한다.
관세청은 서울·부산·인천 세관 등에서 4개 팀 38명 규모 전담반을 구성해 대응 중이나, 증가하는 불법 행위 속도를 따라잡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이번 점검에서 적발된 사례들은 허위 신고, 명의 도용, 가격 조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고 있어 제도적 보완 없이는 이 같은 문제의 재발을 막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를 들어 반덤핑관세 대상인 후판에 페인트를 칠해 컬러강판으로 위장해 신고하는 수법으로 관세를 회피하거나, 공급자별로 다른 덤핑관세율을 악용해 높은 관세율이 적용되는 공급자로부터 수입하면서 낮은 관세율 공급자로부터 수입한 것처럼 신고하는 방식 등으로 법을 교란했다.
◆'베트남, EU 사례' 우회 수입 선제 차단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업계에서는 베트남의 유사 사례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베트남은 중국산 코팅 강판에 대해 강력한 반덤핑 조치를 시행하며 우회 수입 차단에 나서고 있다. 베트남 뉴스 등 외신에 따르면 베트남 정부는 지난 4월1일부로 중국산 코팅 철강 제품에 최대 37.13%의 잠정 반덤핑관세를 부과했다.
다만 한국과 다르게 베트남 정부는 조사 대상 품목의 HS코드를 세밀하게 관리하며 필요 시 변경 및 보완 권한을 유지하고 있다. 산업부와 외교부가 공동으로 현장 조사도 병행하며, 덤핑 행위와 국내 산업 피해 정도를 면밀히 평가하는 강력한 대응 체계를 갖췄다.
베트남 세관 통계에 따르면 조사 개시 전 12개월 동안 코팅강 수입량은 전년 대비 91% 급증한 45만4000톤에 달했고, 조사 착수 이후에도 수입량이 전년 동기 대비 20% 이상 증가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은 급증세를 저지하기 위해 도장, 코팅이 포함된 2차 가공 강판까지 반덤핑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우회 수입 차단’에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실제 베트남 산업통상자원부(MOIT)가 발표한 잠정 반덤핑관세 부과 결정문(결정 제914호/QĐ-BCT)에 따르면 조사 대상 품목(HS코드) 범위에 도장, 코팅 등 2차 가공 제품이 포함된다.
또한 베트남은 조사 대상 HS코드를 세밀히 관리하며 필요시 변경 및 보완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한국 정부가 ‘서류상 품목 분류’에만 의존해 우회 수입에 취약한 점과 달리, 실물 성상과 가공 상태를 반영한 엄격한 HS코드 관리와 현장 조사를 통해 불공정 무역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최근 몇 년간의 유럽연합(EU) 반덤핑 우회 수입 차단 움직임에도 관심이 쏠린다. EU는 2023년에만 바이오디젤, 러시아산 합판, 스테인리스 제품 등 총 4건의 우회 조사에 착수했으며, ‘기업 환적’, ‘부분 가공 후 수출’과 같이 한국의 사례와 유사한 우회 경로를 단속하고 있다.
또한 직권조사를 확대하고, 수입 흐름에 대한 사후 모니터링과 현장 검증을 강화하는 등 제도 전반을 고도화하고 있다. 한 예시로 2023년 8월 EU 집행위원회는 인도네시아산 스테인리스 냉연 평판 제품(SSCR)이 대만·튀르키예·베트남을 경유해 수입되는 경로를 ‘우회 수입’ 사례로 보고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 EU는 조사 개시와 동시에 해당 3개국산 제품을 즉시 등록해 관세 부과 가능성을 열어두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으며, 지난해 5월 대만과 베트남산 제품의 우회 수입 사실이 확정되자, 인도네시아산 냉연평판스테인레스 제품(SSCR)에 부과하던 반덤핑·상계관세는 대만과 베트남산 제품에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이처럼 EU는 단순 서류 검토나 사후 단속에 그치지 않고, 조사 개시 직후 수입품 등록·관세 대상 확대·현장 검증을 결합한 선제 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있어, 한국이 벤치마킹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우회 수입에 대해 기업이 나서서 반덤핑 제기를 할 수는 있으나 정부 차원의 선제적인 차단이 우선시돼야 한다”며 “제도적 보완과 철저한 통관 검증 시스템이 마련이 마련된다면 국내 철강사들의 우려가 해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펜=이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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