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수출과 내수 동시에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발 고율 관세와 규제로 인한 불확실성은 수출 경쟁력을 흔들고, 중국 전기차의 저가 공세는 국내 시장은 물론 해외 시장 점유율까지 잠식할 위험으로 다가온다. 산업 전반을 위협하는 이중 악재 속에 완성차 업계는 생존 전략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본지는 2편의 기획을 통해 대외 규제·관세 리스크와 중국발 전기차 공세라는 당면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 한국 자동차 산업이 직면한 과제와 대응 방향을 진단한다. [편집자주]
[미디어펜=김연지 기자]한국 자동차 업계가 '배터리 딜레마'에 빠졌다. 미국발 고율 관세와 전기차 보조금 동결로 가격 압박이 거세지자 기아와 GM 등 주요 완성차들이 중국산 배터리 채택을 확대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원가 절감과 가격 방어 효과가 기대되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이미지와 공급망 안정성 측면에서 새로운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중국 CATL·BYD 등과 협력 범위를 넓히는 추세다. 가격 경쟁력 확보를 우선시한다는 판단이지만, 국내 업계 안팎에서는 단기적 '저비용 효과'가 장기적으로는 '구조적 취약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계심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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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뮌헨에서 열린 'IAA 모빌리티 2025'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CATL 부스에 전시된 배터리 탑재 차량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제공 |
◆ 수익성 방어 위한 단기 해법…원가 절감·가격 인상 억제
중국산 배터리 채택의 가장 큰 이유는 원가 절감이다. 다만 차량 가격이 소비자가 체감할 만큼 크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가격 인상을 억제하는 효과에 가깝다. 배터리 원가가 차량 제조비의 30~40%를 차지하는 만큼, 1~5% 절감만으로도 완성차사의 수익성 확보에는 의미 있는 영향을 준다는 분석이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중국산 배터리가 국내 배터리 3사 대비 획기적으로 저렴한 것은 아니지만, 1~5%의 절감만으로도 기업 입장에서는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내연기관차보다 전기차의 수익성이 낮은 상황에서 이런 조치는 불가피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원가 절감을 통한 수익성 고도화는 필요한 조치"라고 말했다.
2023년 기준 전기차 수익성을 보면 테슬라는 차종당 연간 40만 대 이상 판매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며 차량 한 대당 1만 달러에 육박하는 수익을 올렸다. 반면 현대차·기아는 전기차 한 대당 1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격차 속에서 중국산 배터리 활용이 단기적 '방어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한다.
최근에는 GM의 볼트 EV, 기아 EV5·PV5 등 주요 차종이 CATL 배터리를 채택하는 등 중국 배터리 활용은 특정 기업의 선택을 넘어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보편적 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산 배터리 채택으로 차량 가격이 대폭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인상 요인을 억제해 판매 확대에 기여할 수 있다"며 "단기적으로는 기업의 숨통을 틔우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이 소비자 수요 확대에도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배터리 원가 부담을 줄이면 완성차사들이 신차 라인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할 여력이 생기고, 이는 곧 시장 내 선택지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 프리미엄 전략 흔들·대미 수출 불확실성 확대…산업 체질 약화 우려
장기적으로는 프리미엄 브랜드 전략과 지정학적 변수에서 뚜렷한 리스크가 예상된다.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소비자 인식은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저가' 이미지가 강해 고급차 전략과는 상충할 수 있다. 이 교수는 "배터리 품질 문제가 불거질 경우 소비자의 부정적 인식은 결국 완성차로 향한다"며 "프리미엄 전략에 부정적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치·외교적 변수는 더 큰 불확실성을 만든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 과정에서 중국산 배터리 부품·소재 사용을 제한하는 '우려국 요건(FEOC)'을 적용해 왔다. 최근 통과된 'OBBBA(One Big Beautiful Bill Act)'는 이 같은 기조를 강화해, 2026년부터 중국 등 금지 외국 기관(Prohibited Foreign Entity)에서 생산한 자재 비중이 60%를 넘는 배터리는 첨단제조세액공제(AMPC)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업계에서는 중국산 배터리 의존도가 심화되면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과 보조금 혜택을 동시에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산업 생태계에도 영향은 적지 않다. 단기적으로는 차량 가격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국산 배터리 기업의 투자 여력이 줄어들고 부품 협력사와 고용 구조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에 따라 특정국 의존도를 줄이고 공급망 다변화를 병행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기업은 가격과 품질을 기준으로 글로벌 소싱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특정국에 올인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부가 전략적으로 공급망 다변화를 지원하고 차액을 보전해 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직접적인 보호무역은 역풍을 부를 수 있어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도 요구된다. 공공조달에서 국산 배터리 탑재 차량을 우선 구매하거나, 충전 인프라 확충과 R&D 지원을 통해 국내 배터리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방식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결국 중국산 배터리 채택은 당장의 원가 절감에는 해법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산업 체질을 약화할 수 있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업계 안팎에서는 단기 효과에만 안주하지 말고 공급망 자립과 기술 혁신을 통해 근본적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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