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얼룩진 역사의 정점에는 예외없이 선출된 권력의 잘못된 선택이 자리하고 있다. 선출된 권력은 잠시 위임받은 유한 권력이기에 언제나 달콤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권력의 유혹에 빠지는 순간 브레이크 없는 질주가 시작된다. 그건 곧바로 헌정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독재’라는 또 다른 이름이다.
21세기 자유대한민국이 ‘권력서열’이라는 해괴한 논리에 민주주의를 위협받는 기로에 서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에는 권력의 서열이 분명히 있다. 최고 권력은 국민 그리고 직접 선출권력(입법·행정), 간접 선출권력(사법)"이라고 서열을 매겼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의 발언은 "내란특별재판부, 그게 왜 위헌인가. 사법부 구조는 사법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며 입법부 권한이라고 못 박으면서다. 이는 절차와 의견 수렴을 요구하는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경고성 압박이었다. 이후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의 브리핑 소동이 일어나면서 일파만파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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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대 재판장이 5월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강 대변인은 조 대법원장 사퇴 요구와 관련해 "아주 원칙적으로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논란이 되자 다시 "입장이 없다"고 번복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이 배포한 속기록에서 이 대목을 슬그머니 뺐다가 언론의 항의가 빗발치자 1시간도 안 되어 복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번복 브리핑에서는 "앞뒤 맥락을 자른 채 브리핑 취지를 오독한 것"이라고 언론 탓을 했다.
언론이 오독했다면 차라리 다행일뻔 한 일이다. 대통령 역시 권력서열에 대한 인식이 헌법을 오독한 것이었다면 천만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국민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으니 주워 담기에는 엎질러진 물이 됐다. 오죽했으면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소장 권한대행마저 '권력서열' 발언에 "대한민국 헌법을 한번 읽어보시라"고 했을까.
삼권분립은 서열의 문제가 아니라 입법과 행정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위임받은 권력의 절대적 횡포에 맞서 법을 만들어 국민을 보호하는 것, 그리고 보루로써 그들을 견제하는 것이 임명된 사법부의 권한이다. 민주 사회라면 모두 독립성을 보호받으면서 권력의 일방통행을 감시하고 있다. 사회 정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바른길을 가기 위한 오랜 역사적 결과물이다.
재판권이 입법권과 집행권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재판권이 입법권에 결합되어 있다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권력은 자의적일 것이다. 재판관이 곧 입법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재판권이 집행권에 결합되어 있다면 재판관은 압제자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거꾸로 입법권이 재판권을 흔든다면 이도 같은 결과를 부른다.
사전적 의미에서도 민주주의의 원리인 삼권분립 또는 권력분립은 국가의 권력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셋으로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막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 조직의 원리라고 정의한다.
근대적 의미의 삼권분립을 발전시킨 사람은 몽테스키외다. 몽테스키외는 권력자가 몇 명으로 늘어나더라도 그들이 각각 입법, 행정, 사법 등 국가의 모든 기능에 접근할 수 있다면 결국 민의는 무너지고 권력자들끼리의 암투가 벌어져 누가 이기든 최후의 1인에 의한 독재는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권력분립의 목적은 권력집단이 단합하고 야합하여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은 채 폭주하지 못하도록 권력의 남용을 막고 권리의 보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근대적·입헌적 의미의 헌법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서로의 권력 기능은 침해하지 않고 견제하는 방식으로 구성돼야 궁극적으로는 인권을 수호할 수 있다.
지금 우리 현실은 선출된 입법권과 행정권이 사법권을 위협하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을 향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사퇴 겁박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야만화되고 있다. 롹인되지 않은 제보 내용을 아무런 사실 확인도 없이 면책특권의 뒤에 숨어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과 정상명 전 검찰총장, 김건희 여사 모친의 측근인 김충식,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회동해 이재명 사건 처리를 논의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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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대통령이 17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현대시장을 방문해 시민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9.17./사진=연합뉴스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조희대 대법원장 등 당사자들은 일제히 만남 자체를 부인했다. 의혹해명에도 불구하고 이마저 자격 운운하며 공격의 수위를 올리고 있다. 지금 정부와 여당은 법을 믿지 못한다면 판을 갈아엎으려 한다. 설령 잘못됐더라도 적법한 절차와 충분히 대안을 마련할 시간과 국민의 공감대가 우선돼야 한다. 그 방향은 유한한 선출된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라 임명된 권력이 지속 가능한 원칙과 지켜야 할 규준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권력은 잠시 위탁 받은 것"이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또 다른 발언도 있다. 누구를 겨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력과 권한이 큰 것은 대통령과 집권여당이다. 그들은 대법원, 검찰 등 사법 시스템을 뿌리째 바꾸려 하고 있다. 협치는 고사하고 국가 기본 정책의 틀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위탁받은 권력이 누구를 지칭했던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어야 한다. 일방통행이라면 그거야말로 독주이자 독재다.
문형배 전 헌법소장 대행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했고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재판장이었다. 그런 문 전 소장이 "헌법을 읽어보시라"고 한 고언을 새겨 들어야 한다. 선출 권력이 우위였다면 윤석열 전 대통령은 어떻게 파면되고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의 당선 무효형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 헌법이 입법·행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에도 국민주권을 위임하고 있기 이 때문이다. 국민주권 운운하며 헌법 질서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폭주를 멈춰야 한다. 사법의 정치화를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선출된 권력이었음을 돌아봐야 한다. 지금 현실이 바로 정치가 사법 위에 군림하려 하는 것이다. 헌정질서를 위태롭게 한 대가가 무엇인지는 권력에 취한 정치인들이 더 잘 알 것 아닌가.
[미디어펜=문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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