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북미 대화 가능성이 제기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고 공개 발언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APEC 방한을 앞두고 ‘깜짝 정상회담’ 가능성을 열어둔 신호라는 분석이 나왔다.
물론 김 위원장은 “미국이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면 미국과 마주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대화의 문턱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처음으로 직접 발언한데다, 이번 발언은 최근 중국 전승절에서 북중러 연대를 과시하고 얻은 자신감에서 기인하는 점에서 또다시 북미 정상회담 테이블이 차려질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됐다.
김 위원장의 발언을 볼 때 이미 북미 간 협상이 시작됐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은 23일 유엔총회에 참석할 인사로 차관급 국제기구 담당인 김선경 외무성 부상을 파견해 29일 연설에 나설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뒤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북핵 협상의 새로운 국면이 열릴 수도 있는 것이어서 주목되는 상황이다.
경주 APEC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할 경우 이를 계기로 북미 정상이 비무장지대(DMZ) 회동을 할 가능성도 언급된다. 그게 아니라면 APEC 기간동안 북미 간 물밑협상이 진척되고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 공개발언이 몇차례 더 오고간 뒤 양측이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았을 때 다른 시기, 제3의 장소에서 북미 정상이 전격 마주앉을 수도 있다.
관건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이 될 것이다. 이번에 김 위원장은 ‘비핵화 대화는 없다’고 못을 박으면서 “우리에게서 비핵화는 절대 없다. 공화국의 핵보유 사실은 변함없다” “제재 풀기에 집착해 적수국들과 그 무엇을 바꾸는 것과 같은 협상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미 간 협상 의제를 제시하고 미국의 정책 변화를 유도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다.
|
 |
|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전격 만나 회담하고 있다. 2019.6.30./사진=조선중앙통신
|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정은의 대미 메시지는 북한의 외교전략에서 트럼프를 특정 타깃으로 삼아 미국의 정책 변화를 유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며 “트럼프의 자존심과 ‘딜 메이커’ 이미지를 자극해 빅딜 가능성을 떠보려는 의도다. 트럼프가 과거 ‘김정은과 좋은 관계’라고 과시하며 재접촉 가능성을 시사한 것에 대한 맞춤형 호응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임 교수는 이어 “김정은은 트럼프의 ‘노벨상 염원’을 자극하면서도 트럼프에게 현실을 인정하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결단하도록 압박하고 있다”며 “결국 트럼프가 결단을 내릴지 여부에 따라서 북미 정상간 만남은 재개될 것이고, 이는 미국이 먼저 양보해야 협상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북한이 협상 문턱을 높인 것은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가 더 강해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누가 주도권을 쥐고 가느냐에 따라 북핵 협상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까지도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해온 만큼 김 위원장의 제안대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다른 것을 받아내는 거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김정은 메시지’와 관련해 “무엇을 주고받는 협상보다는 핵보유국으로서 대등한 대화, 관계 개선 구도로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여기에 지금으로선 북미 대화가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배제되거나 역할이 축소될 가능성이 큰 것도 우리에겐 문제다. 김 위원장은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좋은 추억’을 말하면서도 남한에 대해선 “한국과 마주앉을 일이 없으며,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결단코 통일은 불필요하다. 우리와 한국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케미’에 기대를 걸면서 한국의 북한 비핵화를 포함한 대북정책을 원천 차단하려는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홍민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현재 한국 정부의 ‘유화·관계개선’ 제안을 흡수통일 의도를 숨긴 위선이라고 규정하고, 국방비 증액과 훈련 강화를 비난하는 것을 볼 때 사실상 향후 남북대화는 물론 ‘비핵화’를 내세운 대외 행보에 대해 강하게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이번 메시지는 이재명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대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유엔 연설에서 남북대화와 한반도 평화 공존에 대한 유엔 및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남북관계를 “사실상의 평화적인 두 국가론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적대성 해소’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반면, 김 위원장은 ‘비핵’ ‘평화’를 건너뛰고 ‘미국과 관계 개선’만 강조하며 ‘코리아 패싱’에 직접 나선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