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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 미디어펜 부사장 겸 주필 |
일본 열도가 들끓었다. 역사 이래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처음으로 승전했으나 최고의 전리품인 땅은 없었다. 아니 손에 넣었으나 힘센 강대국들이 돌려주라고 윽박질러서 도로 토해냈다. 1894년 ‘청일전쟁’ 이야기다.
서구열강에 침탈에 멍이 들었으나 청나라는 대국이었다. 이른 개화(開化)로 면모를 일신했다고 하나 일본은 열세였다.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앞두고 모든 일본 국민이 총동원됐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 전시국가 체제 아래 허리띠를 조이고 또 조였다.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생활이 궁핍해지자 가정이 해체되기도 했다. 부인이 집을 나간 장정들은 어린 자식과 부모를 생매장하고 입대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이렇게 국민 모두의 희생 속에 치러진 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다.
전쟁을 매듭짓는 조약식이 1895년 4월 17일 승전국인 일본의 시모노세끼(下關)에서 열렸다. 당연히 승전국인 일본은 뤼순과 다롄이 포함된 랴오둥(요동) 반도를 할양받고 2억 냥(당시 일본 1년 세수의 2.5배)이라는 어머어마한 배상금을 골자로 체결됐다. 일본 국민은 열광했다. 그토록 염원했던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의 강대국과 나란히 섰다는 국민적 자긍심이 하늘을 찔렀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던 생활고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은 일본 사회에 긍정에너지를 공급했다.
그러나 일본의 달콤한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의 비약에 놀란 러시아를 중심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조약을 비틀었다. 삼국의 압력, 삼국의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포기해야 했다. 일본에게 랴오둥반도는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일 뿐 아니라 선진국이 됐다는 증표였고 일본인 모두가 가슴 속에 품은 훈장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사그라들던 중국의 분열로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제국주의의 꽃을 피우던 러시아, 독일, 프랑스를 상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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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일본은 물러섰다. 아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국가를 갈아 넣어 얻은 승리였지만 힘을 앞세운 냉혹한 국제 현실은 일본의 승전가를 분노로 변질시켰다. 본질은 국력이었다. 국력의 뒷받침없이는 국민적 자긍심은 지킬 수 없다. 일본의 이러한 인식구조는 필연적으로 군국주의로 이어졌다. 어쩌면 일본이 태평양전쟁의 잘못된 길로 빠질 수밖에 없던 필연적 동기는 이때 뿌리내렸는지 모른다. 이후 일본은 국민적 모멸감과 힘을 숭배하는 종교적 가치를 구조화시켰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억류됐던 우리 근로자들이 돌아온 지 2주일이 지났으나 국민 충격과 모멸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되고 있다. 미국이 관세로 협박해 지으라고 한 첨단 배터리공장을 건설 중인 근로자들이었다. 우리 돈을 들여 미국에 짓는데 미국에는 관련 전문인력이 없어 한국인이 투입돼 완공을 서둘렀다. 그들이 손과 발, 허리에 쇠사슬로 묶여 불법이민자 수용시설에 감금됐다.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치떨리는 모멸감에 시달리는 국민 여론은 묻는다. “왜 우리가 이 꼴을 당해야 하나?” 세계 10대 경제강국이고 K-컬처로 대변되는 문화강국이 되었다고 자부했으나 이는 서구 중심의 힘의 논리 앞에서는 무용함을 체감했다. 외교라는 매개를 통한 국제질서는 국력이라는 총구에서 나옴을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력과 문화적 영향력이 국민의 안전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고 있었다. 어쩌면 130년 전 일본 국민이 겪었던 힘의 논리 앞에서 무력감과 모멸감을 지금 맛보고 있는지 모른다.
23일 유엔을 찾아 기조연설에 나선 이재명 대통령은 조지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라는 ‘END’ 제안 속에 의지를 녹여냈다. 한반도에서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하고, 궁극적으로는 국제 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았다. 특히, 그는 단순히 군사력 증강을 추구했던 과거의 방식과는 달리,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다자주의적 협력을 강조함으로써 조지아 사태에 따른 해법을 제시했다. 130년 일본이 국민적 분노의 분출구로 제국주의와 전쟁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존을 회복하고 국민 안전을 담보하겠다는 뜻이 확고하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고 세계와 얽혀 국제사회에서 생존권을 지키는 일은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가적 소명이 됐다. 이제 상처 입은 감정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한다. /김진호 미디어펜 부사장 겸 주필
[미디어펜=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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