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EU 15% 관세 확정…한국만 25% '시간과의 싸움'
가격·수익성 압박 심화…EV 세액공제 종료까지 '이중 악재'
생산·수출 전략 재조정…부품·노무 변수까지 연쇄 파장
[미디어펜=김연지 기자]미국이 일본과 유럽연합(EU) 자동차 관세를 15%로 낮춘 가운데 한국은 협상 지연으로 여전히 25% 고율 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협상이 길어지면서 국내 기업의 가격 경쟁력과 수익성 훼손이 누적되며 충격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이에 더해 생산·수출 전략에서 부품사·노동시장까지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 압박이 커지고, 공급망과 투자 계획 전반에도 불확실성이 짙어지고 있다. 정부가 미국 측과 협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대미 투자 방식과 통화안전장치 등 핵심 조건에서 이견이 커 교착이 장기화하는 분위기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지난 24일(현지시간) 유럽산 자동차·부품 관세를 27.5%에서 15%로 낮추는 이행 문서를 공개하고, 시행일을 8월 1일로 소급했다. 일본 역시 지난 16일부터 동일한 15% 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한국은 자동차 관세를 15%로 적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지만 협상 지연으로 여전히 25%의 고율 관세가 유지되고 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연합뉴스 제공

◆ 일본·EU '관세율 역전'…한국 협상 지지부진

일본과 유럽이 잇따라 미국과 관세 합의에 도달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경쟁 구도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주요 경쟁국이 관세 장벽을 낮추고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사이, 한국은 여전히 25% 고율 관세에 묶여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을 펼치고 있다. 관세 격차는 단순한 가격 차이를 넘어 브랜드 전략, 시장 점유율, 유통 구조 전반을 뒤흔드는 구조적 변수로 작용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한국산 승용차는 무관세로 미국에 수출됐고, 일본과 유럽은 기본관세 2.5%를 부담했다. 그러나 조건이 뒤바뀌면서 한국 자동차만 고율 관세 부담을 지는 처지에 놓였다. 주요 경쟁국이 관세라는 짐을 내려놓은 사이 한국만 역풍을 맞는 셈이다.

협상이 지연되는 핵심 원인은 투자 조건에 대한 입장 차다. 양국은 지난 7월 말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지만,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방안을 두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선불(up front)'로 지급해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한국 정부는 외환·재정 리스크를 이유로 보증·지분 투자 혼합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통화스와프 체결, 투자 이익 배분 구조, 비관세 장벽 해소 여부 등 세부 조건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정부는 10월 말 APEC 정상회의 전까지 접점을 찾겠다는 방침이지만 합의문 서명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대통령실은 "국익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미국 측과 협상을 진행 중이며, 국내 산업 경쟁력에 미칠 파장을 면밀히 점검하고 있다"고 밝혔다.

◆ 기울어진 운동장…가격·수익성 직격탄

관세 역전은 곧바로 가격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 동급 대비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점유율을 넓혀왔던 한국차는 이제 가격 우위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반면 일본·유럽 제조사들은 소급 환급과 관세 완화를 기반으로 마진 방어 여력을 확보하며 시장 점유율 확대에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올해 상반기 글로벌 영업이익 2위에 오른 현대차그룹의 실적도 다시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 투싼은 기본가 2만9200달러로 폭스바겐 티구안·혼다 CR-V보다 1000달러 이상 저렴하지만, 25% 관세가 반영되면 3만6500달러로 올라 경쟁 차종보다 모두 비싸진다. 아이오닉5 역시 4만2600달러에서 5만3250달러로 상승해 폭스바겐 ID.4보다 비싸질 전망이다. 오는 30일 종료되는 전기차 세액공제까지 사라지면 가격 민감도가 급격히 커져 판매 전략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

프리미엄 시장에서도 '가성비' 전략이 흔들린다. 제네시스 G80은 현재 5만8450달러로 벤츠 E350·BMW 530i보다 저렴하거나 비슷하지만, 관세를 반영하면 7만3062달러까지 치솟아 경쟁 모델보다 수천달러 비싸진다. 가격 우위를 잃으면 브랜드 인지도와 충성도에서 상대적으로 밀리는 한국 프리미엄차의 입지는 더욱 취약해질 수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가격 구조가 무너진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은 4월 이후 미국 내 가격을 동결하며 시장 방어에 나서고 있지만 업계는 이 같은 전략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관세 부담이 누적되면서 비용 압박이 커지는 만큼 결국 가격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실제 현대차·기아는 2분기에만 관세로 인해 1조6142억원의 영업이익이 줄었고, 재고 효과가 사라지는 3분기 이후에는 월 7000억원 수준의 비용이 고정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 수익성이 급락하고, 올리면 소비자 이탈이 불가피한 '양자택일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 관세 장기화 연쇄 충격…수요·고용·경영 전략까지 흔들

관세 불확실성은 완성차를 넘어 자동차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내 완성차 업계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동화 라인업 재배치, 북미 생산 비중 확대 등 전략 재조정에 나서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내 전기차 생산 능력 확대와 부품 공급망 현지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현대차는 오는 29∼30일 국내 전기차 생산라인을 일시 휴업하기로 했다. 관세 불확실성과 전기차 세액공제 종료를 앞둔 소비 위축이 맞물리면서 미국 시장 공급 계획에도 조정이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다. 협상이 장기화될 경우 전동화 투자와 생산 전략 전반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글로벌 부품사들도 신규 투자·증설 결정을 미루는 등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 미국에서 한국 기업인 구금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현지 경영 리스크가 높아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불확실성이 커지자 완성차 업체들은 단기 출장 의존도를 낮추고 장기 체류 비자 활용과 현지 인력 채용 확대를 통해 구조적 리스크 관리에 나서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조건을 전면 수용할 경우 한국 경제 전반에 충격이 불가피하다"며 "일부 산업이 단기적으로 어려움을 겪더라도 실익을 확보하며 협상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안보·외교 요소를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고, 투자금을 국내 산업 지원과 수출 다변화 전략에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