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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성민 정신과전문의 |
Ⅰ. 절망의 춤, 사탄탱고
2025년 노벨문학상은 헝가리 작가 '라즐로 크라즈나호르카이(László Krasznahorkai)'에게 돌아갔다. 그의 대표작 '사탄탱고(Sátántangó)'는 인간이 절망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에 대한 심리적 해부이자 철학적 실험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희망이 사라진 황폐한 마을에서 비틀거리며 탱고처럼 느리고 절망적인 리듬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움직이지만,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절망이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붙잡고, 정신이 그 속에서 무력하게 반복되는 감옥을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허무의 묘사가 아니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사탄탱고'는 우울과 무력감이 뇌의 신경회로 속에서 반복되는 현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우울증 환자의 뇌에서는 감정의 중심인 '편도체(amygdala)'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판단과 조절을 담당하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의 기능이 약화된다. 그 결과, 뇌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지 못하고 같은 고통스러운 생각과 기억을 무한히 되풀이한다.
'사탄탱고'의 리듬은 바로 이 신경학적 반복의 리듬, 즉 '절망의 신경 회로(Neural Circuit of Despair)'를 상징한다.
Ⅱ. 기억의 과학, 에릭 캔델의 발견
이 절망의 회로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인간이 다시 일어서는 길을 보여준 이는 2000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에릭 캔델(Eric R. Kandel)'이다.
캔델은 뇌의 신경세포가 경험에 따라 형태와 연결을 바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인간의 기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시 쓰여지는(reconsolidation) 것이다.
그는 실험을 통해 "기억은 단단히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이 들어올 때마다 다시 편집된다"고 말했다.
이 발견은 인간 정신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했다. 트라우마와 절망으로 뒤덮인 과거라도, 새로운 감정과 관계 속에서 다시 구성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곧 회복의 신경학, 즉 '엔젤탱고(Angel Tango)'의 과학적 근거다.
Ⅲ. 사탄탱고와 엔젤탱고 — 두 개의 리듬
‘사탄탱고’가 절망의 리듬이라면, ‘엔젤탱고’는 회복의 리듬이다. 하나는 무너지는 인간 정신의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일어서려는 뇌의 생리적 반응이다.
절망 속에서도 뇌는 미세하게 연결을 시도한다. 단절된 시냅스가 다시 연결될 때, 새로운 감정과 의미가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정신의 '자기 치유 메커니즘(Self-Healing Mechanism)'이다.
캔델의 뇌과학은 '사탄탱고'가 보여준 절망의 무대를 새로운 리듬으로 바꿔놓는다. 그 절망의 리듬이 완전히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의 리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Ⅳ. 절망은 뇌의 정지가 아니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절망은 ‘죽음’이 아니라 정지된 신경의 리듬이다. 마치 오래된 피아노의 현이 끊어진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미세한 진동이 남아 있는 것처럼.
캔델의 연구가 보여준 것은 바로 그 진동이다. 시냅스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다. 새로운 감정, 새로운 음악, 새로운 관계가 주어질 때 그들은 다시 연결된다.
'사탄탱고'의 인물들이 끝없이 반복 속을 걷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으며, 그 느린 걸음은 정신이 회복을 준비하는 뇌의 리듬이다.
Ⅴ. 정성민 정신과전문의의 해석 — 기억의 리듬과 회복의 탱고
나는 이 현상을 '정신의 리듬(Psychic Rhythm)'이라 부른다. 인간의 뇌는 파괴 속에서도 새로운 리듬을 찾으려는 본능이 있다.
‘사탄탱고’는 절망의 뇌가 부르는 어둠의 탱고, ‘엔젤탱고’는 회복의 뇌가 다시 써내려가는 기억의 탱고다.
문학은 인간의 절망을 기록하고, 과학은 그 절망이 어떻게 치유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정신의학은 그 둘을 연결하여 인간 정신의 회복 리듬을 조율한다.
결국 인간의 뇌는, 절망조차도 회복의 준비 단계로 바꾸는 창조적 기관이다.
Ⅵ. 결론 —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춤춘다
라즐로 크라즈나호르카이의 '사탄탱고'는 절망의 무한한 어둠을 그린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 정신의 불멸성이 숨어 있다.
에릭 캔델의 연구는 그 불멸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인간의 뇌는 절망을 경험해도, 그 기억을 다시 쓸 수 있다. 그것이 곧 엔젤탱고의 리듬, 회복의 춤이다.
"절망은 인간을 무너뜨리지만, 기억은 인간을 다시 춤추게 한다."
문학은 절망의 무대를, 과학은 회복의 길을, 정신의학은 그 둘의 춤을 조율한다.
그 춤의 이름이 바로 ‘사탄탱고에서 엔젤탱고로.’
“문학이 절망을 노래할 때, 과학은 그 절망이 회복으로 변하는 리듬을 증명한다. 그리고 정신의학은 그 사이에서 인간 정신의 탱고를 완성한다.” /정성민 정신과전문의
[미디어펜=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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