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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호 기자 |
[미디어펜=한기호 기자]국회 폭력 막자고 만들어놨더니 툭하면 협상 중단에 법안 끼워팔기 식 흥정으로 전락. 이번 예산안 정국에서 ‘상수’로 등장한 국회선진화법이 보여준 민낯이다.
개정 국회법(국회선진화법)이 식물국회를 불러왔다는 사실이 19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선진화’라는 말이 무색하게 의원들은 ‘협상’ 노력대신 ‘바꿔먹기’, ‘끼워팔기’ 등 흥정꾼으로 전락했다.
최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한중 FTA 비준 동의안 처리 합의를 알리는 자리에서 “새누리당은 새정치연합에 큰 빚을 졌다”며 여타 쟁점법안에 있어서 여당의 양보를 요구한 일이 있다. 이상하리만큼 큰 논란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문 대표의 발언은 국회에서 법안을 처리하는 행위를 상대 당에 대한 혜택 정도로 여기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대의제 타락’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거 최루탄을 터트리고, 해머가 등장하고, 공중부양을 해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국회가 이번 새해 예산안 처리과정에서는 국회선진화법을 등에 업고 수시로 합의와 번복을 반복하면서 발목잡기를 일삼았다.
이번에도 국회는 법정 처리시한을(12월2일) 지키지 못하고, 새벽 2시가 넘어서 극적으로 합의문을 도출했다. 당초 본회의도 1일 오후 11시가 되어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예산안·쟁점법안에 대한 유감표명을 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를 수용하면서 가까스로 재개됐다.
하지만 협상에서 야당은 법안 맞바꾸기로 일관했다. 가령 관광진흥법 하나를 놓고 야당은 대리점 거래 공정화법, 모자보건법, 전공의 특별법, 교육공무직법 등을 패키지로 처리하자고 우겼다. 발끈한 여당이 국제의료사업지원법 카드를 꺼내들고 야당의 요구를 쳐내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이번에 예산안과 함께 관광진흥법, 대리점 거래 공정화법 등 쟁점 법안 5개의 처리가 합의됐다. 이 과정에서 여야는 수차례 고성을 주고받았으며, 270분간 협상 중에 합의문을 100번 이상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도 핵심 쟁점이던 노동개혁 5대 입법은 결국 처리 시점도 명시하지 못한 채 좌절됐다. 여야는 이들 법안에 대해 '합의 후 처리'로 논의했다. 합의가 되면 처리한다는 것으로 어느 임시국회에서 합의할 지 합의문에 명시하지 못한 것은 야당이 시한을 못 박지 못한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합의문 초안에 ‘연내 처리’로 들어갔던 것이 나중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분명 여야가 합의를 해놓고도 반나절만에 말바꾸기가 가능한 것은 국회선진화법 하에서 전체 의석의 60%(180석)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법안 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있어도 야당의 이해관계에 맞는 법안만 통과시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선진화법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을 ‘끼워 넣은’ 공무원연금개혁, 1조원 규모의 ‘농어업 상생기금’을 조건으로 비준동의된 한중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이 용두사미로 전락하거나, 경제활성화법안, 테러방지법안 등을 ‘밀린 숙제’로 쌓아놓았다.
일각에서 예산안-쟁점법안 연계로 정부와 여당이 국회선진화법의 덕을 봤다는 평가를 하고 있지만 실제 결론은 국회 각 상임위에 3년 넘게 계류돼 온 경제활성화 법안을 다 처리하지도 못했고, 그나마 통과시킨 법안도 개혁 취지를 적잖게 상실한 ‘반쪽짜리’라는 자조가 나오는 수준이다.
정부와 여당 입장에서는 노동개혁을 비롯한 4대 개혁이라는 큰 과제를 남겨놓고도 이제 예산안 연계 카드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야당 입장에서는 더 이상 여당을 상대로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양측의 이해가 걸린 선거구 획정문제를 제외하고는 그 많은 개혁과제가 20대 국회가 자리잡기 전까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거나 야합을 거쳐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될 공산이 크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해서는 ‘사실상 만장일치법’, ‘야당 독재법’ 등 극렬하게 비판적인 평가가 이미 나와 있다. 의원들 사이에서는 “소위 선진화법이라는 법 때문에 과반을 차지한 책임 여당으로서 국가를 위한 법률안을 제대로 통과시킨 적이 없다”면서 “시작부터 잘못된 법”이라는 불만이 적지 않다.
이렇게 국회선진화법은 민주주의 다수결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불러왔으며, 원내 폭력사태만 없어졌을 뿐 ‘식물국회 방지’라는 취지에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야당이 원내 토론대신 장외투쟁 행보를 이어가는 것도 여전하다.
그런데도 여당은 2009년 한나라당 시절 관련 특위까지 구성해 스스로 이 법을 발의했다는 이유로 공론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여당이 진정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법 개정을 적극 공론화하는 등 사활을 걸어야 한다. 가능하지도 않은 개혁에 ‘표를 잃을 각오’를 운운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