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이면 해맞이에 나선 인파로 일출 명소는 몸살을 한다. 새벽의 고단함과 교통체증의 짜증을 무릅쓰고 방한복을 차려입은 남녀노소가 해돋이를 보느라 한풍을 마다하지 않는다. 첫해를 보며 소원을 비는 마음은 무속의 신앙이기보다 자신을 향한 다짐일 것이다.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새해는 바른길을 가기 위한 결심이 그것이다.
짓궂은 충고로도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해맞이하는 우리에게 잠언을 남겼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통찰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인용한 이 통찰로 우리 사회 속살을 비춰 뼈아픈 반성이 필요하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새해 희망을 꿈꾸나 날짜만 바뀌었을뿐 우리의 모든 것은 어제 그대로다. 어제와 똑같이 나와 다른 대상을 향해 분노하고 혐오하면서 무지개빛 미래가 열리리라 기대하는 것은 망상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위험한 키워드는 분노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가장 위험한 키워드는 ‘분노’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분노가 오직 ‘내 편이 아닌 저편’ 혹은 ‘나와 다른 소수’를 겨냥한다는 점이다. 다수의 목소리만 정의로 정의되고, 소수의 가치는 효율과 통합이라는 정서로 뭉개진다. 5천만 개의 다양성이 말살되고 불과 서너가지 획일적 상징이 살아남은 사회에서, 어제와 똑같이 서로에게 분노하며 내일은 평화롭기를 기도하는 모순은 새해에도 여전하다. 이 ‘집단적 광기’를 끊어내지 못하면 2026년의 태양도 어제의 석양과 다를 바 없다.
역사가 보여주는 가르침은 분명하다. 강한 회복탄력성으로 역사의 앞쪽에 섰던 제국들은 예외 없이 상대편을 인정하고 소수를 품었다. 천년 제국 로마가 강성했던 비결은 칼과 창이 아니라, 정복지 이방인에게도 시민권을 주어 ‘우리’로 품은 포용성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폐쇄적인 순혈주의를 고집하며 소수를 억압했던 국가와 집단은 사라졌다. 2026년 대한민국이 혁신해야 할 정치, 경제, 사회의 핵심은 바로 이 역사적 교훈에 있다.
마침 이재명 대통령은 이혜훈 사태에 의식하며 “파란색(민주당 지지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권한을 가졌다고 해서 사회를 통째로 파랗게 만들 수는 없다”며 다양성을 강조해 반갑다.
승자독식의 야만에서 벗어나야
정치는 ‘승자 독식’의 야만에서 벗어나 ‘소수 존중’의 민주주의 본령을 회복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여의도는 다수가 소수를 짓밟아도 된다는 그릇된 관행에 매몰돼 있다. 이는 재래정치라고 비하하는 80~90년대 정치에서도 볼 수 없던 후진정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보호할 때 완성된다. 작금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집권 1년도 안돼 고전하는 이유 역시 동일하다. 소수의견을 묵살하고 숨통을 조이는 정치는 정치인 뒤쪽 서있는 지지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다. 결국 거대한 반작용과 분노만을 낳을 뿐이며, 이는 국가적 위기 앞에 정작 필요한 통합의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소외된 가치를 인정하는 경제
경제는 ‘소외된 자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17세기 프랑스는 종교적 소수자였던 ‘위그노’들을 탄압했다. 기술과 자본을 가진 이들 30여만 명이 영국, 독일, 스위스 등지로 흩어졌고, 밀려난 이들이 훗날 산업혁명과 스위스 정밀산업의 밑거름이 됐다고 역사는 기술한다. 어제와 똑같은 효율성을 따지며 소수의 실패와 도전을 용인하지 않는 경제 구조로는 미래의 틀을 짤 수가 없다. 실패할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구호보다 생태계를 구축하고, 엉뚱한 아이디어를 가진 ‘소수의 현실 파괴자’를 보호해야 한다. 경제의 회복탄력성은 거대한 댐이 아니라, 곳곳에 숨 쉴 구멍을 만들어주는 다양성과 순환에서 나온다.
다름을 틀림으로 낙인찍지 말아야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다름’을 ‘틀림’으로 낙인찍는 폭력적 시선을 거두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세대, 성별, 이념 갈등 속에서 자신과 조금만 다르면 적으로 간주하는 배타성이 극에 달해 있다. 다문화 가정, 장애인, 사회적 약자 등 우리 곁의 소수자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 앞에서 좌절한다. 어제와 똑같은 생각과 방법으로 약자를 혐오하고 배제하면서 글로벌 강대국을 꿈꾸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소수의 가치를 보호하지 않는 사회가 언제 선진 사회로 발돋움한 적이 있었던가. 소수를 향한 따뜻한 연대는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사회적 갈등 비용을 줄이고 공동체의 붕괴를 막고 미래로 나아가는 현실적 자산이다.
어제와 달라져야 내일이 다르다
결국 2026년의 화두는 어제를 벗어나 미래를 만드는 ‘회복탄력성’이다. 어떻게 내란의 악몽에서 벗어나고, 동북아 정세 불안을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지역갈등, 사회 갈등, 세대 갈등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저출산, 소득 증대, 분배 정의를 완성해서 살만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
아마 그 회복의 힘은 획일화된 다수의 함성이 아니라, 다양한 소수의 가치가 존중받는 화음에서 시작될 것이다. 고무공이 튀어 오르는 것은 강해서가 아니라 유연함 때문임을 우리는 안다. 이제 증오와 배제, 혐오의 쳇바퀴에서 내려오자.
어제와 달라져야 내일은 다를 수 있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겸 사장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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