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국내 배터리 업계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돌파구 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떠오른 ESS(에너지저장장치) 시장에서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의 LFP(리튬인산철) 공세에 맞서, 미국과 유럽의 '전력망 안보' 우려를 파고드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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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SDI의 LFP 배터리가 탑재된 ESS 제품 'SBB 2.0'./사진=삼성SDI |
10일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최근 북미 ESS 수주전에서 배터리 셀 자체의 성능보다 BMS(배터리 관리 시스템)의 보안성과 SI(시스템 통합) 역량을 핵심 세일즈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전략 변화는 최근 미국 내에서 확산되고 있는 '중국산 ESS 공포'와 맞닿아 있다. ESS는 단순한 전력 저장소를 넘어, 국가 전력망(Grid)과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충·방전을 제어하는 '지능형 기기'다.
미국 정치권과 보안 전문가들은 중국산 ESS에 탑재된 소프트웨어나 통신 모듈에 '백도어(무단 접속 통로)'가 심어져 있을 가능성을 경고한다. 만약 미·중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중국이 원격으로 ESS를 조작해 전력 공급을 끊거나 과부하를 일으켜 '대규모 블랙아웃'을 유도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업계 관계자는 "데이터센터나 발전소 입장에서 ESS는 전력망의 심장과 같다"며 "중국산 LFP 배터리가 가격은 30% 싸지만, 국가 안보와 직결된 인프라의 '뇌'를 중국 기업에 맡기는 것은 마치 '트로이 목마'를 들이는 것과 같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5G 통신 장비 시장에서 화웨이가 퇴출당했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은 단순한 '배터리 제조사'가 아닌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 파트너'로 포지셔닝을 바꾸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내 ESS SI 법인인 'LG에너지솔루션 버테크(Vertech)'를 앞세우는 것이 대표적이다. 버테크는 배터리 공급뿐만 아니라 설치, 유지보수, 전력 관리 소프트웨어까지 턴키(Turn-key)로 제공한다. 고객에게 "중국산 부품이 섞여 있어도, 전체 시스템을 통제하고 책임지는 건 미국 우방국인 한국 기업"이라는 신뢰를 파는 전략이다.
삼성SDI 역시 'SBB(삼성 배터리 박스)'를 통해 시스템 단위의 안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드웨어적 화재 안전성뿐만 아니라, 사이버 보안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BMS 기술을 부각하며 중국 기업과의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향후 K-배터리의 ESS 사업 모델이 '하이브리드' 형태로 진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원가 경쟁력이 절대적인 배터리 셀(Cell) 등 하드웨어는 중국산 LFP를 소싱하거나 합작사를 통해 저렴하게 조달하되, 이를 제어하는 BMS와 운영 소프트웨어(SW)는 한국 기업이 독자적으로 구축해 납품하는 방식이다. 즉, '몸통'은 가성비 좋은 중국산을 쓰더라도, 전력망과 소통하는 '머리'는 한국산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중국산 전기차(하드웨어)를 막는 것보다 더 시급하게 보는 것이 전력망(소프트웨어) 방어"라며 "한국 기업들이 이 '안보 프리미엄'을 파고들어 시스템 통제권을 장악한다면, 중국의 저가 파도를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승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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