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진-김창범 ‘외교 전문가’ 라인업, 국내 입법 대응은 ‘무력’
정부 규제엔 논리적 대응에 그쳐…4대 그룹은 아직 거리두기
[미디어펜=조우현 기자]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의 현 리더십이 글로벌 공급망 위기 대응에는 최적화돼 있으나, 정작 기업들을 옥죄는 국내 규제 입법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류진 회장(풍산그룹 회장)과 김창범 상근부회장(전 주인도네시아 대사)으로 이어지는 ‘외교통’ 지도부가 국내 현안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4대 그룹 총수들의 실질적 복귀도 요원한 상황이다.

   
▲ 사진 왼쪽부터 이웅열 코오롱 명예회장, 류진 한경협 회장, 김창범 한경협 부회장. /사진=한경협 제공


◆ 9년 만에 곳간 채운 4대 그룹, 실무 참여는 ‘전무’

삼성전자는 지난 2024년 10월 31일 이사회를 열고 한경협 연회비 약 18억 원 납부 안건을 의결했다. 앞서 현대차그룹(7월), SK그룹(8월), LG그룹(10월)이 차례로 회비를 납부한 데 이어 삼성까지 합류하면서 4대 그룹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약 9년 만에 한경협의 실질적인 회원사 지위를 회복했다.

이는 2023년 8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 한경협으로 명칭을 변경한 지 약 2년 7개월 만에 이뤄진 통합이다. 각 그룹은 계열사별 분담 과정을 거쳐 약 35억 원 수준의 연회비를 완납하며 회원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다만 외형적 통합에도 불구하고 4대 그룹 총수들의 한경협 내 실질적 활동은 여전히 전무한 상황이다.

지난 2월 27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열린 제65회 한경협 정기총회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현재 한경협 회장단에도 4대 그룹 총수의 이름은 없는 상태다.

회비 납부를 통해 회원사로서의 ‘금전적 도리’는 다했지만, 조직의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회장단 합류에는 모두가 선을 긋고 있는 모양새다. 과거 정경유착의 고리로 지목됐던 ‘회장단’에 이름을 올렸다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하겠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

사실 4대 그룹 총수들의 ‘거리두기’는 소위 국정농단 사태 이전부터 반복돼 온 고질적인 현상이다. 지난 2016년 당시에도 4대 그룹 총수들은 전경련 회장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채 회원사 지위만 유지해 왔다. 


◆ ‘외교적 신중함’의 역설…대정부 협상력 약화로 이어져

하지만 4대 그룹의 이러한 조심스러운 행보가 역설적으로 한경협 지도부의 국내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딜레마로 이어지고 있다. 

류진 회장과 김창범 상근부회장으로 이어지는 ‘외교 전문가’ 라인은 트럼프 2기 행정부 대응 등 글로벌 이슈에는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국내 입법 현안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고 절차를 중시하는 외교 특유의 ‘신중한 문법’이, 기업 생존권이 걸린 국내 입법 전쟁터에서는 오히려 메시지의 선명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상속세 문제로 정부의 질타를 받는 상황에서도, 한경협은 재계의 목소리를 결집하는 ‘스피커’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한경협이 국내 현안에서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배경에는 과거 국정농단 사건 이후 강화된 ‘정경유착 차단’ 기조와 현 정부의 강력한 기업 규제 의지가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처럼 기업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정치권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능이 사실상 약화되면서, 한경협은 정부의 상법 개정이나 노동 규제 공세 앞에서 논리적 방어 이상의 액션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자칫 목소리를 높였다가 ‘적폐’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조직 전반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재계 일각에서는 한경협이 수행하는 ‘공적 기록’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개별 기업이 정부의 규제 기조에 직접 항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경협이 내놓는 보도자료나 성명서는 재계의 목소리를 공식화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의 화살을 대신 맞으면서도 기업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문서화하는 작업만큼은 한경협 외에 대안이 없다는 진단이다. 특히 10일자로 노란봉투법이 본격 시행된 만큼 재계에서도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을 제재하는 법안 위주로 입법화가 진행되고 있어 제재 완화에 대한 목소리를 낼 필요도 제기되는 시점이다.

재계 관계자는 “공식적인 반대 목소리를 내주는 창구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며 “한경협이 기록으로 남기는 논리적 대응들이 당장은 힘이 없어 보여도, 향후 입법 과정이나 여론 형성에서 기업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4대 그룹이 회비를 낸 것은 최소한의 창구 유지와 글로벌 대응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며 “지도부가 국내 현안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총수들이 책임 있는 직책을 맡지 않는 한, 한경협은 ‘무늬만 맏형’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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