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서영 기자]3일 타계한 무하마드 알리는 1970년대 숙명의 라이벌이 두명 있었다. 알리는 그들과 세기의 대결을 벌였다.
조 프레이저와 조지 포먼이다. 프레이저는 황소복서, 포먼은 공포의 무쇠주먹을 과시했다. 알리 등 3총사는 70년 복싱 황금기를 주도했다. 지금은 복싱이 쇠퇴하고, UFC가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프레이저와는 첫 대전에선 아쉽게도 패배했다. 추후 복수전에서 KO 승으로 앙갚음했다. 71년 3월 8일 뉴욕 맨해튼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프레이저와의 첫 대결은 세기의 대결로 평가받았다.
알리와 프레이저의 대결을 보기위해 미국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관람했다. 미국의 전설적 팝가수 고 프랭크 시내트라(<마이웨이>를 부른 가수)는 링 앞자리의 표를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시내트라는 마침내 라이프 잡지의 사진기자를 하는 조건으로 앞좌석을 얻었다.
할리우드의 미남배우 고 버트 랭카스터도 중계방송을 한 방송사의 해설요원으로 링 가까이서 관전했다. 알리는 패배했다. 베트남 전쟁 반대로 유형생활을 오래하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겪는 패배했다. 그의 특기인 나비처럼 날아서 쏘는 풋트웍을 하지 못한 것. 춤추는 권투를 하지 못한 것.
알리가 춤추는 권투를 못한 것은 그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따른 오랜 유형생활과 연관이 있다. 법원은 그후 그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종교에 기반을 둔 것이고, 진실하다고 판결했다. 3년이상의 유배생활과 징역형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알리는 이어 당대 무패의 챔피언 포먼과 74년 10월 아프리카 자이레 킨샤사에서 맞붙었다. 소위 정글의 혈전으로 불리었다. 유명한 프로모터였던 돈 킹이 자이레의 모부투 대통령과 협상을 벌여 대전료는 1000만달러로 치솟았다.
도박사들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포먼이 압도적으로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알리는 영리하게 로프타기 기술을 구사했다. 20대의 젊은 포먼이 펀치를 날리면 로프타기로 그의 힘을 뺐다. 포먼이 힘이 빠지는 기색이 보이면서 알리는 포먼에 집중타를 날려 왕의 복귀를 선언했다. 알리의 유명한 어록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것을 실증했다.
|
|
|
▲ 3일 타계한 무하마드 알리는 1970년대 숙명의 라이벌이 두명 있었다. 알리는 그들과 세기의 대결을 벌였다. 조 프레이저와 조지 포먼이다. 프레이저는 황소복서, 포먼은 공포의 무쇠주먹을 과시했다./사진=유튜브 영상 'Muhammad Ali vs. George Foreman' 캡처(https://www.youtube.com/watch?v=ftXqcdy6VKM) |
포먼을 링에 때려눕힌 만든 알리는 이어 라이벌 프레이저와의 복수전에 나선다. 75년 10월1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다. 권투 팬들의 이목이 마닐라로 집중됐다. 알리는 프레이저에 대해 한물간 복서라고 거칠고 빠른 입담으로 프레이저를 자극했다. 신경전도 치열했다. 알리는 프레이저에 대해 “마닐라에서 고릴라를 잡으면 오싹할 거야, 소름끼칠 거야, 죽일거야”라고 말했다.
알리는 복수혈전에서 마지막 15라운드 프레이저를 다운시켰다. KO승.
알리는 이후 척 웨프너, 론 릴 등 이류급 선수들을 상대로 방어전을 치렀다. 76년 4월에는 일본으로 날아갔다. 당시 일본의 최고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와 이색시합을 벌였다. 재미가 없는 졸전으로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알리의 평생 전적은 61전 56승(37KO), 5패를 기록했다.
알리는 복싱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영웅이었다. 그는 은퇴후에도 미국국민들을 물론 전세계 팬들의 존경을 받았다.
[미디어펜=이서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