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원우 기자]"국책은행의 숙명이겠죠. 하지만 못내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산업은행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 넋두리다. 기업 구조조정 이슈로부터 불똥이 튄 대우조선해양 정치권과 실세권 관련설, 주채권으로서의 조선해운사들의 관리감독 질타, 혈세 논란, 구조조정 고통분담 차원의 경영개선 등 구조조정 실책을 대상으로 여론의 화살이 산은을 정조준하고 있다.
특히 산은으로서 가장 힘든 것은 '명예 실추'다. 홍기택 전 산은 회장의 인터뷰가 화약고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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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은행이 주채권은행으로서 기업 구조조정 관리감독의 질타가 이어지면서 변양호 신드롬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미디어펜 |
최근 산은에 대한 여론에 불을 지른 것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로 중국 베이징 체류 중인 홍기택 전 산은 회장의 경향신문 인터뷰였다. 정식 인터뷰는 아니었다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작년 이뤄진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2000억 원의 유동성 지원이 청와대‧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의 작품일 뿐 산업은행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고해성사처럼 들리기도 했던 이 발언의 파장이 커지자 홍 전 회장은 즉각 해명보도를 내 진화에 나섰지만, 산업은행 차원에서도 '정정'하고 싶은 내용은 없지 않아 보였다.
"지난 일을 얘기할 땐 모두가 현명해진다"고 말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말처럼 산은의 지난날 성과는 간과하고 씻은 듯 잊어버린 세태가 야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은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른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업 회생을 위한 구조조정 과정 속의 산은의 고뇌는 등돌리고 비판만 쏟아지는 통에 내부에서는 '변양호 신드롬'마저 확산되는 모양새다. 변양호 신드롬은 지난 2003년 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을 주도했던 변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헐값 매각 시비에 휘말려 구속된 사건에서 비롯됐다.
변 전 국장은 약 4년간 이르는 기나긴 법정 공받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그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를 계기로 공무원 사회에는 "논란이 있는 사안은 손대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이를 두고 가리키는 말이다.
만일 대우조선해양이 2008년 한화그룹에 매각됐다면 최근 집중포화된 여론은 산은을 비켜갔을지도 모른다. 당시 산은은 한화그룹에 대우조선해양을 6조 원대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결국 무산된바 있다.
이후 세계 1위 수성에 문제가 없어보이던 조선업은 급격한 업황부진과 침체의 늪에 빠져 2013년부터는 계속 손실을 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이 무렵부터 현대‧삼성그룹 계열사를 포함한 주요 회사들의 선박 수주 또한 '0건'을 기록하고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었다.
한 가지 잊어선 안 될 사실은 산업은행에 대한 여론과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은은 국내에서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가장 큰 기대치를 갖고 있는 기관이라는 점이다.
IMF 당시 대우그룹에 대한 구조조정 일화는 여전히 산은 안팎에서 회자되는 대표적 '무용담'이다. 그밖에도 2003년 카드대란 진화,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로 회사채 시장이 어려울 때 '신속인수제'를 통한 시장안정에 기여한 점 또한 산은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최근 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산업은행 구성원은 '아무도 없다'는 게 산은 관계자의 전언이었다. 잘못된 부분에 대한 비판이나 처벌을 피하려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문제는 그러한 몇 가지 과(過)로 인해 산업은행이라는 기관 그 자체가 부정되는 결과를 얻었다는 것.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홍 전 회장의 넋두리가 일파만파되면서 서별관 회의가 여론의 타겟이 됐다. 여론은 정부와 금융당국의 밀실 구조조정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홍 전 회장 자신의 서운함이나 억울함을 토로할 수 있겠지만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산은을 저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또 국책은행으로서 주도적인 구조조정 플레이어 역할을 부정한 셈이다.
왜 서별관 회의일까. 왜 정부가 나서 구조조정을 교통정리할까.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쳐 늙어버린 아이가 된 대상 기업들의 정리는 시장주의 원칙에 입각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에 따라 성장하고 도태되고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해야 한다.
그러나 때를 놓친 것은 업권의 동향과 전망을 제대로 견지하지 못하고 환부를 도려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놓아야 할 때를 놓친 결과다. 구조조정 대상 기업은 더 버티려고 하고 주채권은행은 더 회수하려고 하니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그 중간에 서서 조정자 역할을 누가 해야 하겠는가.
교통정리마저 놓친다면 기업 회생은 커녕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단지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닌 지역경제 더 나아가 한국경제의 현안이다.
여론의 질타에 산은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STX조선이나 대우조선해양의 예를 통해 산은이 국책은행이자 주채권은행으로서 자회사 형식의 조선해운사들을 운영하면서 제대로 된 관리감독을 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십분 감수해야 한다. 국책은행의 몫인 까닭이다. 다만, 맹목적인 비난은 잠시 접어둬야 한다.
정부의 조선·해운 구조조정안에 산은의 구조조정을 포함한 것은 주채권은행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해 책임추궁 선고를 받았다. 국책은행으로서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는 책임도 담겨져 있다.
앞으로 구조조정 속도를 내야 할 일만 남았다. 물론 전제는 해당 기업들의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는 자구책 실행이다. 여기에 주채권은행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줘야 한다.
산은은 굵직한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주채권은행으로서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금융당국은 대부분 주채권은행인 산은을 믿을만한 구조조정 전문가 집단이라며 구조조정 플레이어(Player)로서 인정했다.
괴테는 '재산을 잃었다면 다시 모으면 되지만 용기를 잃었다면 그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만도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100개가 넘는 자회사를 관리해야 하는 숙명을 떠안고 있는 산은의 명예 실추가 '용기의 상실'로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고민해야 할 때다.
중장기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끌어내기 위해 산은의 역할은 분명하다. 과오를 들먹이며 산은을 공격해야 득이 될게 없다. 홍 전 회장의 은행이 아닌 국민들을 위한 은행이기 때문이다.
홍 전 회장의 발언이 기폭제가 돼 구조조정 속 들러리라는 오명을 받게 된 산은이 흔들리면 안된다. 그들에게는 아직 구조조정의 풍랑을 헤쳐가야 하는 위험한 도전이 남아있다.
"산업금융채권 자체 조달 등 국책은행이면서도 시중은행과 함께 경쟁하며 이익을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주요 임원들의 급여 동결‧반납은 더 이상 새로운 일도 아니고요. 성공했을 때의 박수소리가 작은 것이야 국책은행의 숙명이겠지만,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면 곧장 '구조조정 실패의 주범'이 돼버리는 건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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