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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
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분노의 시대-5·6
5
그들이 슬그머니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새벽같이 일어나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던 늙수그레한 집주인 김 영감이 깜짝 놀라서 후다닥 달려왔고, 인기척에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던 김 영감의 아내 완도 댁도 부엌문을 열고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자네들 어쩌자고 아직도 안 갔능가?"
"전위대원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야지요."
"그렇다고 어쩌자고 집으로 왔능가, 이 답답한 사람들아, 조금 전에 전위댄가 뭔가 허는 젊은 놈들이 눈깔이 새빨개갖고 동인이 학생 잡는다고 온 집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갔는디."
"얼마나 됐습니까?"
"한 30분 됐으까? 참말로 속이 타서 죽어 버리겠구먼."
혀를 끌끌 차고 있는 김 영감 곁에서 완도 댁도 한마디 거들었다.
"좌익들 눈에 뜨이면 큰일 난께, 방으로 들지 말고 싸게 저 광으로 들어가 있어, 잉, 동인이 총각" "그려, 그기 좋겠구먼."
완도 댁과 김영감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 눈빛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동인과 동신의 손목을 호들갑스럽게 잡아끄는 통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거처하는 방을 눈앞에 놓아두고 어쩔 수 없이 사랑방 옆에 판자를 얼기설기 붙여서 만든 허술한 광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하지만 바닥에 깔아놓은 볏짚 때문인지 광 안은 생각보다 훈훈해 잠시 사람들 눈을 피해 쉬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차가운 밤공기에 밤새 몸을 떨었던 두 사람은 광 안의 온기에 긴장이 풀려 한 순간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
완도 댁은 이들의 동정을 살피러 찐 고구마와 김치를 들고 광으로 왔다가 이들이 잠을 든 것을 확인하고는 늘어진 엉덩이를 흔들며 부리나케 김 영감에게 달려갔다.
"영감, 총각들이 잠 들었소, 잔당께요, 언능 인민위원회에 가서 말을 해야 안되것소? 나중에 알게 되면 우리가 경을 칠틴디?"
완도 댁은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사람이라 3년을 한 지붕 밑에서 살아 온 총각들이었지만 이들의 안전보다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래도 우리하고 한 집에서 살아 온 총각들인디."
"아따 이 영감이 오늘따라, 왜 전에 않던 짓을 허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허면 죽는답디여, 그랑케 딴소리 말고 싸게 인민위원회나 갔다 오시오, 잉"
늙은 아내의 채근에 김 영감은 그 동안 쌓아 온 동인·동신 형제와의 인간적인 정리를 생각한 탓인지 아무 소리도 않고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다가, 잠시 후 이들 형제에게 들으라는 듯이 투덜거리며 자기변명의 넋두리만 늘어놓았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참말로 미치겠구먼, 아니 그런데 집을 나갔으면 들어오지를 말어야지, 시국이 시방 어떤디, 철딱서니 없이 우리보고 어쩌라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여 시방"
"그래요, 영감 말이 맞소, 우리라고 그 총각들이 안 불쌍허겠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당께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일단은 우리가 먼저 살고 봐야제, 안 그렇소, 영감? 그라고 그 썩을 놈들이 징그럽게 허던 협박 소리 못 들었소? 야들 숨기두면 우리 죽인다고 안 합디여, 그랑께 딴 생각 하덜 말고 영감은 총각들 잘 때 싸게 인민 위원회나 갔다 오시오, 잉."
"어허, 고얀, 세상이 어쩌려고 원"
김 영감은 광에 갇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동인과 동신 형제에 대한 알량한 연민은 있었는지, 대문간을 나서다 말고 잠시 등을 돌려 광을 한번 쳐다보더니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린 한 숨을 크게 한번 뱉어내고는 중얼거렸다.
"나 너무 원망 말어, 세상 잘못만난 죄 밖에 없응께."
나이가 들면서 욕심을 하나 둘 내려놓을 줄 아는 인생의 의미를 아는 노인들도 있는 반면 나이가 들수록 물질과 목숨에 집착을 더 보이는 망령 난 노인 같은 소위 주책이 심한 노인들도 있다. 김 영감과 완도 댁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두 늙은이는 안팎으로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늙은 목숨을 얼마간이라도 연명하려는 얄팍한 생각에 김 영감이 인민위원회에 날랜 걸음으로 동인 형제가 돌아 왔다는 사실을 고하러 간 사이에 완도 댁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광 앞으로 걸어가 슬며시 광문을 잠가버렸다. 부창부수가 따로 없었다.
얼마나 잤을까? 동인은 꽤 긴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흔들며 부르고 고 있었다.
'누구지?'
부스스 뜬 눈 사이로 문살을 헤집고 들어온 햇살이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온 세상에 하얗게 보였다. 그 햇살 위에 서 잇는 누군가도 하얀 옷을 온 몸에 두른 것처럼 하얗게 보였다.
'누굴까?'
소복을 입은 사람 같기도 했다. 덩치도 엄청 큰 것 같았다. 전봇대처럼 말이다.
"야, 손동인, 이 반동새끼 안 일어나!"
거한의 구둣발이 동인의 엉덩이를 거칠게 걷어찼고, 그때서야 동인은 정신이 번쩍 났다. 동신도 덩달아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살펴보고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던 전위대원들이 어떻게 다시 불쑥 나타난 것일까? 동인과 동신은 그저 눈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다시 동인은 더 깜짝 놀랐다.
"아니, 넌!"
검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 오뚝한 콧날, 매보다 더 예리하게 빛나는 날카로운 눈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동인은 일 년 반이 흐른 지금에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반동새끼, 날, 기억하는 걸 보니 머리는 좋아, 하하하!"
그는 동인과 한때 남로당 가입 문제로 큰 갈등을 빚었던 박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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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스틸 컷. |
6
"동신아 넌 나가 있어."
"형, 싫어."
"나가 있으라고 해도!"
"안 나가, 난 안 나간다니까!"
전위대원들이 동신을 형 동인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동신은 형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인민재판을 받은 경찰서장이 죽창에 찔려 죽는 것은 보았던 터라, 붙잡혀 온 자신의 형도 무슨 화를 당하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사실 인근에서는 총성도 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신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세 명이나 되는 전위대원들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동신은 조사실 옆방의 대기실로 끌려 나갔고, 조사실엔 동인과 박태수 그리고 조사 기록을 문서에 남기는 서기만 남았다.
박태수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금방 동신이 끌려 나간 문 쪽을 한번 힐금거리더니 의자를 당겨 동인 앞에 앉았다.
"손동인, 자 그럼 인자 우리도 설설 시작해보자!"
"맘대로 하게."
"그래?"
손동인의 무덤덤한 태도가 가소롭게 느껴졌던지 박태수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이름은?"
"손동인"
"나이는?"
"스물 둘"
"직업은?"
"순천사범 학생이다."
"여기 왜 붙잡혀 왔는지 아나?"
"모른다."
"모른다......? 그럼 내가 가르쳐 주지"
차가운 눈빛의 박태수는 시니컬한 미소를 짓고는 서기에게 손짓을 해서 손동인의 혐의가 적힌 메모를 가져 오게 했다.
"여기 보니 혐의가 세 가지나 되는 구먼."
"무언가?"
"그래 궁금할텐께 내가 읽어는 주지, 첫째는 너의 친일행적에 것이고?"
"무어라고?"
손동인은 박태수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눈살을 찌푸리고는 파르르 성을 냈다.
"이봐, 난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고 학도병 모집에도 응하지 않고 산속으로 도망을 쳤던 사람이야, 이런 나를 보고 친일이라니? 무슨 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화 그만 내고 들어나 봐, 둘째는 예수병을 퍼뜨려 인민들의 건강한 정신과 마음을 타락하게 한 죄고, 셋째는 네 놈이 미국 놈의 앞잡이라는 사실이야."
동인은 박태수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기만 찼다. 분명 조선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다른 나라말처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황당해하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네 표정을 보니 내가 읽어준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인디, 차차 하나씩 알아보더라고, 잉, 그려, 네가 친일 활동을 안했다고 한번 믿어보자, 그런디 우째서 너는 일제 식민지 시절을 미화하는 소리를 허고 다닌다냐?"
"무슨 소리야?"
"몰러? 허, 그런 뜬금없는 표정 짓지 마라 야, 재수 없당께, 그럼 알기 쉽게 풀어주지, 잉, 내가 좀 친절하거든, 그러니까 말이지 네가 학교 예수쟁이들 모임에서 우리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36년이나 고난을 당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말했다며, 시방, 그기 무슨 뜻이여, 싸게 말혀봐!"
"그래, 좋다, 내가 한 말에 대한 곡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했던 말의 의미를 설명해주마."
"그려, 네 잘난 입으로 시방 한번 떠들어 봐!"
"우리 신앙인들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지, 그래서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감사하고 고통은 고통대로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럼 시방 너는 우리 민족이 고난을 당한 일제의 식민지 생활 36년까지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냐?"
"오해하지 마라, 그것이야말로 내 말을 곡해한 것이다, 나는 일제 식민지 36년을 미화한 적이 없다, 다만 우리 민족에게 식민지 생활이라는 시련을 준 하느님의 뜻을 한번 마음에 새겨보자는 거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고,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나가 홍해를 건넌 다음, 하느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38년 동안이나 힘든 시련의 시기를 보냈다.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하셨다. 이스라엘의 사례에서 보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늘 시험하사고 시련과 고통을 통한 다음에야 하느님께서는 항시 축복을 내려 주신다.
그러니 일제 식민지 36년을 신앙적으로 보자면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린 시련이라 볼 수 있고, 이 시기를 잘 견디어 내면 하느님이 우리 민족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 말이 어찌 친일이란 말이냐?
포 떼도 장 떼고, 거두절미하고 단순한 말 몇 마디만 가지고 파편적으로 보면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는지 몰라도,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내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서 감옥을 살았고, 난 학병에 가지 않으려 산속으로 도망을 놓은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감히 나한테 친일이란 그런 더러운 말을 붙이느냐?"
물 흐르듯 하는 손동인의 정연한 논리에도 박태수는 그의 말에는 애초 관심이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허공만 쳐다보고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그가 말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려, 니가 말하는 신앙은 나가 잘 모르지만, 너 참 말은 잘헌다, 근디 말이여, 우쨌든 니는 일제 식민지 36년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헌 거는 사실이 아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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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남부군' 스틸 컷. |
박 태수는 전후 맥락은 무시한 채 손동인의 발언 가운데 단편적인 말 한 마디를 채집해서 이에 집중하면서 이것이 사태의 본질인양 침소봉대를 하여 손동인을 친일파로 엮으려 들었다.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새끼, 참말로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구먼. 한두 사람이 들은 기 아닌디, 내 앞에서 거짓부렁을 늘어놔!"
박태수는 깨알만한 반성의 기미도 없이 자신에게 또박또박 말대꾸를 해대는 손동인에게 본때를 한번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눈을 부라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동인의 뺨을 후려 갈겼고,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동인의 얼굴이 선혈로 낭자했다.
"이 반동새끼, 잘 들어, 우리가 널 체포해서 이리 데려 온 건 니 설명이나 변명을 듣고잡아서 데려 온 기 아니여, 알었냐? 여기서 니가 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여, 니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을 혀서 용서를 구하든가 아니면 죽음을 택하든가, 둘 중의 하나여, 잉, 나도 사람 죽이는 것은 싫응께, 또 우리가 초면도 아니고......., 그래서 널 살려 주고 싶어, 그러니 지금부턴 개소리 그만하고 여기 이 빈 종이에다 반성문을 써 알것냐!"
박태수는 서슬퍼런 눈으로 동인을 쏘아보며 그의 면전에 연필과 함께 빈종이 10장을 내밀었다. 얼음장 같은 박태수의 싸늘한 얼굴 표정, 하얀 회벽 칠이 된 방 모퉁이 구석에 잔뜩 세워 놓은 한 다발의 몽둥이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밧줄들.
손동인은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금방 알아챘다.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한 살아서 이 방을 나가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분명했고, 손동인으로선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폭력과 협박이 두렵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구차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고백으로 그들에게 굴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명분 없이 무릎을 꿇는 것은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손동인은 탁자 위에 놓인 하얀 종이를 바라보며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와 삶을 생각했다. 아버지 손양원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끝내 감옥행을 택했다. 또한 광주 교도소에서 조선인 간수 김관출에게 모진 구타를 당하면서도 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아들답게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걸을래요.'
손동인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다짐했다. 그에게는 신앙이 인생의 전부였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숭앙하는 대상에게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그 대상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어떤 사람은 돈에 인생을 걸고, 어떤 사람은 권력에 노예가 되고, 어떤 이는 명예에 눈이 멀고, 어떤 이는 사랑만을 좇고 다니는 연애지상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념과 신념에 목숨을 건다. 또 어떤 이는 가족에게 또 어떤 이는 조국과 민족에 자신을 바치기도 한다.
박태수가 지금 개인적으로 아무런 원한이 없는 손동인을 잡아다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우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라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신앙을 자기 인생의 전부로 알고 있는 동인으로서는 박태수의 요구를 터럭만큼도 수용할 수 없었다.
손동인은 박태수가 건넨 빈 종이를 채우기 위해 연필을 놀리는 대신 눈을 감고 박태수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놓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자신도 한 때는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동경심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대를 갈이 살아가고 있는 박태수를 동인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이 땅엔 조선 유교의 봉건적 잔재인 사농공상의 뿌리가 깊이 남아 있어, 이 땅이 평등한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 사회에 큰 변혁을 몰고 올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필요한 것도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 순천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을 보면 하나 같이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크고 희망을 갖기 보단 절망스런 쓰라린 기분에 더 빠져드는 게 사실이었다.
스스로 혁명에 나섰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떼를 지어 몰려 가 그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려 들었고, 자신들의 뜻이 통하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이들에게 유무형의 집단 린치를 가하고 그도 효과가 없으면 아예 목숨을 빼앗거나 이 세상에서 없애야 할 근원적인 악으로 규정해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을 시켰다.
결국 이들은 공포와 두려움을 조성하여 감히 완전무결하다고 믿는 자신들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도덕적 완고함과 인색함을 보여, 동인의 눈을 어아하게 만들었다.
대체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것 중에 완전하고 완벽한 것이 어디 있던가? 나사렛 예수가 전해준 용서와 사랑의 정신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이에 의지해서 다부지게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 동인의 마음이었다.
동인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눈앞에 놓인 빈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기에다 뭘 적으라는 거지? 허참!'
동인은 아무리 궁리를 해도 박태수가 건네 준 빈 종이의 여백을 채울 엄두가 나지 않아,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박태수의 진짜 속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박태수는 정말 보기 드물게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다. 키가 훤칠했고, 얼굴 윤곽선이 굵은 데다 이목구비도 다 큼직큼직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까지 맑아서 한눈에 보아도 참으로 마음이 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미움이 가득 차 있다는 게 동인은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박태수 하나만 묻자."
"뭘?"
"난 이 땅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이것이 꼭 부수어야만 하고 피를 흘려야만 되는 것인지 묻고 싶어."
"이 새끼 정말, 말이 허벌나게 많네, 그래 기왕 주둥이가 터졌으니, 하나만 일러주지, 너 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들어 봤는가?"
"그게 무슨 말이야?"
"기존의 낡은 것들은 버리고 보다 효율적인 새로운 것을 창조해서 변혁을 일으킨다는 뜻이제."
"그래 말뜻은 알겠는데, 그것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상관이 있지, 당연히 상관이 있지, 가망이 없는 악질들, 이런 육시랄 놈들은 세상을 좀 먹는 기생충 같은 놈들이니께 당연히 없애버려야 허지 않겠어?"
"그래, 물론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런데 자네가 말한 악질의 기준이란 게 대체 무언가?"
"알고 싶어, 잉?"
"그래. 알고 싶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악질 반동인가?"
순천시 인민위원회는 정상적인 재판 과정은 생략한 채 여론 몰이를 하는 인민재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악질반동이라는 낙인을 찍어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있었다. 첫날은 죽창으로 경찰서장을 둘째 날은 도끼날로 전당포 주인을 죽였다.
동인이 박태수에게 정작 따져 묻고 싶은 것도 바로 그들의 생명경시 풍조였다. 풀을 베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면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몸서리를 칠 일이었다.
동인은 인간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사람을 그토록 무참하게 죽이는 것이 합당한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박태수는 손동인의 물음에 화가 불끈 났다. 동인이 질문을 가장해서 사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은근히 비판을 가하고 심지어 자신에게 가르치려 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동인이 무척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박태수가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나운 눈빛으로 동인을 한참 쏘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가르쳐 주지, 아주 친절허게, 잉, 어떤 새끼가 악질반동인지, 잉"
눈썹을 씰룩거리던 그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주먹이 날아가 동인의 안면을 강타했다.
"바로 너 같은 후레자식이 악질반동이여, 알것는가, 이 씨팔 놈아!"
박태수의 강펀치에 동인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에 고꾸라져 발라당 드러누웠다. 동인은 충격이 컸던지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금방 축 늘어져서 꼼작도 않고 있었다,
"야, 이 씨팔 놈아, 안 일어나, 이 새끼 맛 좀 더 봐야 되겠네."
다시 그의 구둣발이 체중을 실은 채로 동인의 허벅지를 자근자근 밟아댔다. 허벅지를 짓이기는 박태수의 모진 발길질에도 동인은 미동도 않았다.
"어, 이 새끼 봐라!"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지 박태수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가 긴장된 얼굴을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조심스럽게 동인의 얼굴 쪽으로 가슴을 구부렸다. 순간 박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이리 와 봐, 이 새끼 지금 숨 안 쉬고 있는 거지?"
박태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책상에 앉아 심문 내용을 기록 하고 있던 서기를 급하고 불렀고, 서기가 동인의 코에다 손을 대어보고는 그 역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씨팔, 그럼 이 이 새끼 죽은 거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여, 잉!"
박태수는 자신의 주먹 한방에 동인이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허둥거리며 동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야, 새끼야, 손동인, 야 새끼야 일어나봐 이 새끼야, 눈 좀 떠봐 새끼야!"
태수는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동인이를 몹시 미워했지만 죽이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미운 마음에 정신이 번쩍 나도록 패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동인의 죽음에 당황해서 잠시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동인의 사인은 경추 골절에 따른 숨골 파열이었다. 그가 바닥에 넘어지면서 목이 꺾이고 이 때 부러진 목뼈가 숨골을 우연히 찌른 것이었다. 사색이 된 박태수의 머릿속도 하얘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술에 취해 갈지자를 걷는 사람처럼 그의 머릿속도 온갖 생각이 난마처럼 얽히고설키어서 갈 곳을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 때 허둥거리고 있는 그를 보고 서기가 무심코 던지 한 마디를 던졌다.
"대장, 어차피 이놈 미국 놈 앞잡이요, 누가 죽여도 죽였을 거요, 신경 쓸 거 없당께요!"
서기의 말에 박태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고 마음을 어지럽혔던 눈앞의 자욱한 안개가 개운하게 걷힌 기분까지 들었다.
'그려, 이 놈은 친일파에다 미국놈 앞잽이여 죽어도 싸당께, 씨팔 내가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했지, 잠시 돌았었나봐'
판단의 기준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자 박태수의 생각에는 거침이 없어졌다.
'나는 혁명의 전사여, 사회주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기로 한 혁명의 전사랑께, 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한 것이여, 내가 하는 것이 진리지, 암, 그렇고 밀고'
그는 자신의 살인 행위를 편리하게 혁명의 이름으로 합리화해서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는 옆방 대기실에서 손동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동생 동신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동신은 나이도 어리고 죽을죄를 지은 것도 없었지만, 살려 둘 경우 자신의 살인 행위가 소문이 나 만에 하나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혁명의 길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도 없애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지금은 혁명의 시간이여, 공과 사는 구분 해야제, 암만, 인정사정 봐주면 안돼야, 그놈도 예수병에 크게 들어 있어, 어차피 미국 놈 앞잡이가 될 놈이여, 화근은 일찌감치 그 싹을 싹둑 잘라야 한당께.'
동인의 시신을 밖으로 끌어 낸지 두 시간 후에, 세무서 뒷마당에서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신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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