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북한이 16일 개최하기로 약속한 남북 고위급회담을 개최 10시간 전에 일방적으로 무기 연기한다고 통보한 것과 관련해 다양한 관측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북한 김계관 외무성 1부상이 이날 담화를 내고 일방적인 핵포기만 강요할 경우 북미정상회담 무산 가능성을 밝혔다.
김계관은 그동안 미국 행정부가 주장해온 ‘선 핵포기 후 보상’을 의미하는 리비아 식 북핵포기 방식,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백악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잠시 언급했던 영구적인 비핵화(PVID)를 거른하며 반박했다.
또 “핵개발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리비아를 핵보유국인 우리 국가와 대비하는 것 자체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지적하며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이 이날 남부 고위급회담을 전격 취소하고 무기한 연기한다고 밝힌 것은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압박해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당초 조선중앙통신이 이날 오전에 남북회담 취소 이유라고 밝힌 한미군사훈련은 남한에 경고하면서 미국을 압박하는 메시지였다는 것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맥스선더는 사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11일부터 훈련이 시작된 다음날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의식에 남측 기자를 초청한다는 통지문을 보내왔다”며 “북한의 메시지는 북미정상회담과 관련해 미국을 향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 센터장은 “북한이 북미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미국측으로부터 핵무기 반출, 생화학무기 폐기, 인권 압박 등을 받고 있어서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로 남북회담 취소를 활용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앞서 북한은 이날 자정 12시30분 리선권 북측 단장의 명의의 통지문을 보내 연례적인 한미연합공중훈련을 비난하며 남북회담의 연기를 통보했다. 스텔스 전투기인 F-22 등 미국 전략 자산의 한반도 전개에 대한 반발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한미훈련에 대해 크게 문제삼지 않던 김정은의 태도가 확 변한 것으로 또 다른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월 우리측 대북특사단을 만났을 때나 남북정상회담 때에도 한미군사훈련에 대해 크게 문제로 삼지 않았고, 심지어 “이해한다”는 말을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 바 있다.
특사단 단장으로 방북해 김정은을 만났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귀환 직후 언론에 “김 위원장이 ‘4월부터 예년 수준으로 진행하는 것을 이해한다’며 ‘한반도 정세가 안정기로 진입하면 한미훈련이 조절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특히 한미훈련은 이미 11일 시작됐고, 이 훈련의 계획 자체도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던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한미훈련 다음날인 12일 외무성 공보를 통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발표하면서 남측 기자 8명을 초청했다.
이날 북한의 조선중앙통신 보도 내용을 보면 지난 14일 탈북한 태영호 공사의 국회 증언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북한 통신은 “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마당에 내세워 우리의 최고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선언을 비방중상하는 놀음도 버젓이 감행하게 방치해놓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어쩌면 태영호 공사의 국회 증언이 없었다면 이번 맥스선더 훈련에 대해서는 북한이 반응없이 묵인하고 지나갔을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북한이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라고 본다”며 “최근 우리 언론에서 북한 여종업원 기획탈북이니 북송이니 등으로 논란 등이 일조했고 지난 14일 태영호 공사의 국회 증언이 결국 북한으로 하여금 한마디 안할 수 없게 만든 본질적인 이유”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중국 변수’가 작용했다는 시각도 나온다. 김 위원장이 지난 7~8일 2차로 방중한 데 따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한미연합훈련과 관련한 문제 제기가 나왔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실제로 중국은 그동안 한반도 문제 해법으로 한미군사훈련과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을 잠정적으로 중단하라는 ‘쌍중단’을 집요하게 요구해왔으며 중국이 이번에 북한에 대미협상 카드로 한미연합훈련을 거론하라는 조언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될 경우 앞으로 있을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비핵화의 조건으로 미국에 군사적 위협 해소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논의하자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의 내부 반발 가능성도 제기됐다. 특히 군부의 불만이 돌출했을 가능성으로 김정은이 속도조절에 나설 수밖에 없는 돌발적인 변수가 북한 내부에서 생겼다는 관측이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처음부터 한미군사훈련이나 북미정상회담 논의 과정에 불만이 있었다면 어제 남북 고위급회담 개최를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동안 김정은이 핵개발 노선을 바꾸기 위해 주민과 군부를 설득해왔지만 군부의 반발을 잠재우는 데 실패해 속도조절로 우회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 선임연구위원은 “리영호 전 총참모장 등 김정은 정권에서 숙청‧처형당한 군부 인사들 가운데 핵개발을 반대했던 인물이 많다”며 “아무리 독재체제라고 해도 권력투쟁은 있는 법으로 이제와서 비핵화를 하겠다는 김정은에 대한 군부 반발이 거셌을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 선임연구위원 말대로 김정은의 비핵화 추진에 대해 북한 내부에서 특히 군부의 반발이 크다면 이는 김정은이 국제사회로 나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이 정권 초기부터 간부들을 숙청하는 ‘공포 정치’를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 이제 역설적으로 표출화되는 셈이다.
결국 북한의 이날 엄포는 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되풀이해온 행태를 답습한 것으로 수개월동안 거침없이 달려온 대화 무드에서 속도조절을 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주도력을 과시하고 주도권을 쥐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일단 청와대는 “북한의 의중 파악이 우선”이라며 북한의 회담 중지 통보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남북 정상간 이미 설치된 ‘핫라인’이 이번 북한의 일방적 통보 직전이나 이후에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서 ‘판문점 선언’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아쉬운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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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8년 1월 1일 오전 9시 30분(평양시 기준 9시)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