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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은 해외에서도 뜨겁게 불타올랐다. [사진=수원박물관 제공] |
[글·사진 중국 룽징·뤼순. 미디어펜 윤광원 기자] 3.1운동의 열기는 해외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 일본, 미국, 유럽, 러시아 등 해외 각지에서도 만세운동이 터졌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크고, 해외에서는 최초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해외에선 유일하게’ 군경의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한 곳, 바로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북간도, 중국 지린성 옌벤조선족자치주 중에서도 룽징의 신한촌(新韓村)을 필자가 직접 찾아갔다.
‘명동’이라는 별칭을 가진 이 곳은 만주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의 ‘요람’ 같은 곳이다.
‘간도의 한인 대통령’으로 불리던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선생이 설립한 명동학교가 있던 곳이 바로 룽징 명동촌이다.
규암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태어나, 많은 동포들처럼 두만강을 건너 간도 땅으로 건너가 한인촌을 개척하면서, 후세교육을 위해 1901년 4월 5만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학전(學田)을 삼고, 이를 장학재원으로 하여 규암재(圭巖齋)라고 하는 사설 교육기관을 창설했다. 이것이 훗날의 명동학교다.
점차 북간도의 민족지도자로 부상한 선생은 1908년 4월 27일 규암재를 모체로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고, 초대 숙감(塾監)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해 갔다.
명동서숙은 1906년 12월 룽징에서 이상설 선생의 주도로 설립되어 운영되다가, 그가 헤이그 특사로 떠난 뒤 일제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폐교된 서전서숙(瑞甸書塾)의 민족교육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1909년 4월에는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확대시켜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명동학교에는 북간도는 물론 국내 및 만주 각처와 노령 등지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과 애국지사들이 운집했고, ‘철두철미한 애국애족의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 명동지역은 이제 재만 한국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됐다.
선생은 3.1운동의 밑거름이 된 1919년 2월 ‘무오독립선언’의 주동자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은 북간도에서 독립선언대회를 추진, 정재면․강봉우 등 동지들과 함께 극비리에 거사계획을 세운 뒤, 회령으로부터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해 명동학교에서 대량 등사하고, 명동학교의 애국학생조직인 ‘충렬대’ 대원들로 하여금 북간도 전역에 배포했다.
이어 1만여 명의 북간도 한인동포들은 3월 13일 연길현 룽징 북쪽에 위치한 서전대야(西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명동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대한독립’이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앞세우고 선봉에 섰다.
당황한 일제는 중국 관헌과 교섭하여 중국군대로 하여금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저지하도록 조종, 중국 군대의 발포로 명동학교 충렬대원을 포함한 18명의 만세 시위자들이 피살되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 룽징의 3.1운동은 만주 항일 무장투쟁의 ‘기폭제’가 된 사건이다.
명동학교 교정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김약연 선생의 흉상과 당시 모습들이 잘 재현돼 있다.
룽징 명동촌은 특히 민족시인 윤동주가 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친구 송몽규도 거기서 태어났다. 둘 다 명동학교를 다녔다.
송몽규는 문학에만 매달려있는 윤동주를 비판하며 무장투쟁 노선을 걸었었다.
명동촌에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생가가 남아있다. 윤동주의 생가는 정확히 그가 살던 집이 아니라, 그 터에 지어진 다른 집이다. 하지만 우물은 그가 마시던 것이다.
윤동주 생가터 앞에는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의 집터라고 소개돼 있다. 조선인이나 한국인이 아니라 ‘조선족’인 것이다. 현재 중국 땅에 살던 모든 사람은 ‘중국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송몽규가 태어난 집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윤동주의 생가 터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송몽규의 생가는 들어갈 수 없어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제법 집 규모가 크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이었던 것 같다. 하긴 일본 유학까지 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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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순감옥 별도의 추모관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과 영정 [사진=미디어펜] |
필자는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다가 사형을 당한 뤼순 감옥도 방문했다.
뤼순은 인근 따롄와 함께 제정 러시아가 개발한 항구도시다. 인근에 있는 두 도시를 합쳐 부르는 명칭이 뤼따다.
뤼순 감옥도 러시아가 지었다. 두 도시는 러일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그리고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그래서 안 의사도 여기에 갇힌 것이다.
안 의사는 중국인들에게도 ‘대 영웅’이다.
유해도 찾지 못한 그는 뤼순감옥 내 독립 건물에 모셔져 있다. 안 의사의 흉상과 사진, 그의 글씨들을 ‘신주단지’ 같이 모셔놓았다. 필자도 안 의사께 큰 절을 올렸고, 동행한 일행들도 묵념을 하며 의사의 ‘애국충정’을 기렸다.
한 감방에는 안 의사가 실제 갇혀 있던 방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수금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 적실방’이라 쓰여 있고, 중국어와 한글, 영문 안내문이 있다.
해당 감방은 예상보다 깨끗하고, 그렇게 시설이 나쁘지 않다. 창문이 제법 크고 방도 넓으며, 침대 하나와 책상·의자가 하나 있다. 일본 간수들의 의사에 대한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 일본인도 그런데 하물며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뤼순감옥을 찾아 안 의사께 인사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