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탐험] 21- 낙천가가 되라. 건망증있는 사람이 골프잘친다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이어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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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아름다운 샷은 빈 마음에서 나온다. 힘찬 샷이 힘이 빠진 상태에서의 부드러운 동작에서 나오듯 아름다운 샷은 거의 투명에 가까울 만큼 마음이 비었을 때 저절로 만들어진다. “오늘은 잘 해봐야지!” “저 친구한테는 지지 말아야지!” “지난번 참패를 설욕해야지!” “오늘은 기어코 90대를 깨야지!” 등의 각오로 잔뜩 욕심을 먹고 티잉 그라운드에 서면 어김없이 쓰디쓴 맛을 보게 되는 게 골프다.
골프에서 욕심만이 만병의 근원은 아니다. 욕심 대신에 다른 생각이 차 있다면 역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스스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멋지고 아름다운 샷은 우연히 나오기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툭 쳤는데 볼은 경쾌한 타구음을 내며 멋진 포물선을 그리고 허공을 날아간다. 작심하게 쳐서 마음에 드는 샷이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선이나 정신훈련을 안 해본 사람이라도 가끔씩은 아무 생각이 없을 때가 있다. 스윙하는 순간 이런 상태가 되면 근육들은 가장 순수한 기억들만 가지고 아름다운 샷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은 욕심이나 전의(戰意)는 물론 좋은 기억까지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적어도 샷을 하는 순간만은 공(空)에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무념무상(無念無想)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야 아름다운 샷을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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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에서 욕심만이 만병의 근원은 아니다. 욕심 대신에 다른 생각이 차 있다면 역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삽화 방민준 |
전 홀의 버디 퍼팅이나 기막힌 벙커 샷은 물론 악몽의 3퍼트나 연속 OB도 마음에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샷 하는 순간에는 좋았던 일은 비슷한 결과를 바라는 욕심이나 요행심을 깃들게 하고 나빴던 일은 마음을 강박관념과 전의의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낙천가에다 심한 건망증이 있다면 그는 아마 천부적인 골퍼의 자질은 갖춘 셈이다. 부단한 육체의 훈련을 감내할 수 있는 인내심도 이보다 더 골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골프장에서 일상사를 잊고 골프에 몰두하듯이, 골프를 하면서 골프를 잊어버린다면 아마 최고의 경지가 될 것이다.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가능한 한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뜻에서 골프는 망각의 게임이다. 누가 얼마나 지난 홀의 결과를 빨리 잊어버리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느냐에 결과가 달라진다.
호주의 백상어 그레그 노먼은 당대 최고의 골퍼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가 공저로 지은 「INSTANT LESSONS- ONE HUNDRED WAYS TO SHAVE STROKES OFF YOUR GOLF GAME」이라는 골프 교습서가 있다. 이 교습서에서 노먼은 골프를 잘 칠 수 있는 비결, 즉 스코어를 줄일 수 있는 비결을 현장감 있게 소개하는데 특히 마지막 100번째 레슨이 백미다.
100번째 레슨의 제목을 ‘모든 것을 털어 버려라’로 달았는데 요지는 그 동안 가르친 비결들은 물론 골프와 관련된 악몽들을 모두 잊으라고 강조한다. 골프의 진수를 터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노먼은 이렇게 실토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골프를 사랑하지만 골프는 항상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얄궂은 운명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나의 승리를 가로막았던 래리 마이즈나 밥 트웨이, 로버트 가메즈, 데이비드 프로스트의 망령이나 그들의 기적 같은 샷에 대한 악몽을 완전히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배운 것은 골프에는 여러분이 제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노먼은 이어 이렇게 당부한다. “여러분은 이기는 것보다는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당신이 주말골퍼라면 좋은 샷보다는 나쁜 샷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털어 버려라. 잠시 옆으로 물러나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아라. 그리곤 그 동안 일어난 모든 저주스러운 것들을 잊어라. 골프코스에서 분노나 자기연민을 위한 피난처는 없다. 당신이 가능한 한 빨리 평정과 결단을 되찾을수록 좋은 샷이 빨리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노먼은 필드에서 최악의 사태를 맞을 때 1946년 US오픈 참피언인 로이드 맨그럼의 말을 떠올려라고 말한다. “골프가 너의 인생도, 사랑하는 아내도 아니다. 단지 게임일 뿐이다.”
추락은 언제나 있다. 아무리 탁월한 기량을 갖춘 골퍼라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참하게 무너지는 게 골프다. 도저히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사소한 미풍에 마음의 평정을 잃고 혼미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골퍼는 추락하면서도 살아남는다. 노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추락의 순간, 모든 것을 털어 버리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마치 악몽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나 안도의 숨을 몰아쉬듯.”
채근담(菜根譚)은 중국 명나라말엽 유학자 홍응명(洪應明)이 쓴 책으로 유교의 사상을 중심으로 노장(老莊)철학과 선(禪)사상을 접합시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길을 제시하는 주옥같은 350구절을 담고 있다. 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가 위태롭고 돈이 쌓이면 도적이 노린다. 어찌 기쁨이 걱정이 아닐까 보냐.’
어떤 기쁨도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어떤 슬픔이라도 기쁨으로 이어진다. 지혜를 갖춘 사람은 슬픔과 기쁨, 빛과 어두움, 순경과 역경, 선과 악 등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자의 가치를 공평하게 보는 눈을 갖고 있다. 즉 두 생각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다. 이를 양망(兩忘)이라고 했다.
채근담에는 또 ‘風來疎竹 風過而竹不留聲(풍래소죽 풍과이죽불유성)’이란 구절이 있다. ‘바람이 성긴 대나무 숲에 불어오면 대나무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가면 벌써 대나무는 그 소리가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즉 덕이 높은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마음을 움직여 이에 대응하지만 그 일이 끝나면 마음을 비워 언제까지나 그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을 흔들만한 실패와 성공을 모두 잊어버리고 허허로운 마음으로 다음 티잉 그라운드에 오르는 골퍼가 진정한 골퍼일 것이다. ‘승리는 원한을 가져오고 패한 사람은 괴로워 누워있다. 이기고 지는 마음 모두 떠나서 다툼이 없으므로 스스로 편안하리.’라는 법구경의 구절은 골퍼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