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법률 변화 예고…손 놓고 있던 의회, 본격 논의 착수 전망
교황청 등 가톨릭계는 강력 반발…'역사적인 결정' 환영 의견도
[미디어펜=온라인뉴스팀] 바티칸 교황청을 품은 가톨릭의 본산지 이탈리아에서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했다.

26일 연합뉴스는 현지 언론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을 인용해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현지시간 기준 지난 25일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돕는 일이 항상 범죄는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다고 인용 보도했다.

이는 '안락사'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안락사의 법적 허용의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이날 "생명유지 조치로 삶을 지탱하고 있으나 되돌릴 수 없는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가 스스로 삶을 끊으려 할 경우 이를 실현하게 한 누군가에 대해 특정 조건에서는 처벌해서는 안 된다"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또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한 사람의 헌법적 권리라고 판시했다.

헌재 결정에 따라 이탈리아 의회도 이제는 이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정은 이탈리아의 유명 음악 프로듀서로 'DJ 파보'로 알려진 파비아노 안토니아니가 외국에서 안락사를 택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여행과 오토바이 경주를 즐기던 안토니아니는 2014년 교통사고로 사지가 마비되고 시력까지 상실했다. 삶을 지속할 의지를 잃은 안토니아니는 2017년 2월 급진당 당원인 마르코 카파토의 도움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로 건너가 죽음을 택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다.

안토니아니는 스위스로 가기 전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새장에 갇힌 기분이다. 고통 없는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안토니아니의 선택을 도운 카파토는 이탈리아에 돌아와 법정에 서게 됐다. 이탈리아에선 극단적 행위를 돕거나 조장할 경우 최소 5년에서 최장 12년의 징역형이 선고된다.

카파토는 당시 불치병 등 불가피한 이유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이들에게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펴 논쟁에 불을 지폈다. 밀라노 법원은 자살을 부추기거나 방조한 혐의를 적용해 카파토를 재판에 넘기면서 동시에 헌재에 안락사 관련 처벌 규정을 담은 형법 580조의 합헌성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헌재는 판단을 일단 보류한 채 작년 10월 의회에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할지 명확히 해달라고 했으나 의회는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카파토는 헌재 결정이 내려진 뒤 트윗을 통해 "파보(안토니아니)와 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은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 오늘부터 우리는 모두, 설사 (이번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됐다"고 환영했다. 카파토는 또 정당들이 이 문제를 회피했다며 이번 결정은 시민 불복종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내 안락사 관련 협회에 따르면 2015년 이후 해외에서의 안락사를 희망한다는 요청이 761건 접수됐으며, 이 가운데 최소 115명이 안토니아니처럼 스위스행을 택했다고 한다. 헌재가 안락사를 법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리면서 의회 차원의 후속 논의가 불가피하게 됐다.

헌재 결정에 대해 정치권에선 이념 성향에 따라 환영과 반대가 극명하게 갈렸다.

최근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과 새 연립정부를 꾸린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당은 의회가 헌재 결정을 따라야 한다며 환영했다. ANSA 통신은 일부 의원들이 헌재 결정 당일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반대로 우파 성향의 정당들은 헌재 결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동맹을 이끄는 마테오 살비니는 "나는 여전히 안락사에 반대한다"며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회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도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환영하는 목소리와 함께 이를 부정하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하늘이 내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안락사를 부정해온 가톨릭계는 헌재 결정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헌재가 인간 생명에 대한 실용주의적 시각에 굴복했다"는 성토도 나오고 있다.

이탈리아주교회의(IEC) 역시 불만을 표시하고 헌재 결정에 거리를 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0일 조력자살이나 안락사에 분명한 반대를 표명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당시 교황은 이탈리아 의사협회 대표단과의 면담에서 "죽고 싶다는 병든 사람의 소망을 들어주고자 의약품 사용을 법적으로 허용하려는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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