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외투쟁으로 땅에 떨어진 국민의 인기를 만회하려다 실패한 제1 야당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이 최근 의원총회를 열어 장외투쟁을 강화키로 했다고 합니다. 투쟁의 칼날을 갈면서 유권자 대부분이 장외투쟁을 중단하고 국회로 돌아가라고 요구하는데도 “우리 지지층의 생각은 다르다”고 억지를 부리며 보다 강한 투쟁노선을 당지도부에 요구했습니다. 의원총회에서 흘러나온 몇몇 의원들의 발언들 중에 이런 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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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민련이 최근 열린 의총에서 박근혜대통령을 독일 나치의 히틀러에 비유해 파문이 일고 있다. 히틀러에 저항하듯 국민들이 박근혜대통령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제기됐다. 의원총회 시국토론 내용은 시장바닥의 허접한 이야기와 대동소이할 정도로 유치무쌍하다. 탈당설이 나도는 박영선원내대표가 문재인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한 여성 의원 = 히틀러의 나치즘에 저항하듯 (국민이) 박근혜에 저항하고 있다. (히틀러에게 저항했던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를 거론하며) 그는 “미친사람이 운전하면 끌어 내려야 한다”고 했다가 단두대에서 죽었다.
한 남성 의원 = (가라앉는 배 안에 있던 학생들에게 한) 기다리라고 한 말은 거부한다. 우리 당의 무책임이 다 드러났다. 지난 두 번의 (여야) 합의안을 백지화 해야 한다.
한 남성의원 = 배가 난파당하게 생겼는데(나라가 침몰하게 생겼는데 라는 뜻) 한가하게 국감할 때가 아니다.
한 남성의원 = 130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지도부에 제출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
남성 중진의원 = 문(재인)의원의 단식을 보고 감동을 받고는 있지만 문의원의 역할은 의원들의 중지(衆志)를 모으는 것이지 단식이 아니다. 단식은 나처럼 허접스러운 의원이 하는 거다. …
일일이 다 소개할수가 없습니다. 시장 바닥의 건달들이 모여 앉아서 시국 토론을 한다 해도 이정도로 허접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세월호 침몰사건 후 넉달동안 국회를 헛바퀴돌리며 세월을 허송한 야당의원들이 세월호 특별법이 희생자 가족들의 요구대로 제정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인식하는데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국회의원의 본분인 새해 예산 심의나 국정감사 민생 법안 심의등은 심심풀이로 하는 소꼽장난쯤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런 <허접한 발언>들 중에 히틀러 운운한 발언은,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 이르킬 가능성이 있어 보여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것 같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저항하듯 (국민이)박근혜에 저항하고 있다.”
이 한 문장에는 여러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어 보입니다. 우선 야당 의원들은 박근혜 대통령과 히틀러를 같은 선상에 있는 인물로 보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히틀러의 나치즘에 저항하듯”이란 말 중에는 당시의 독일국민들이 거족적으로 나치즘에 저항해서 히틀러를 패망케 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독일국민들이 나치즘을 끌어 내렸듯이(?) 한국 국민들이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혀집니다. 그럴듯 하게 들리는 이 세가지 전제가 단 하나만이라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됩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세가지 전제 중에 어떤 것도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무식이 낳은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씩 보겠습니다.
히틀러가 1933년 1월30일 바이마르 공화국 최후의 대통령 힌덴부르그 원수로부터 수상으로 임명되어 정권을 쥐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이 신정권은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겠지 하는 예상을 했습니다. 정권을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나치당의 국회의석은 198명으로 총의석 608명의 1/3 도 되지 못한 약체 내각으로 출발해야 했습니다.
4년 전에 들이닥친 대공황으로 실업자 950만명이(전체 근로자의 1/3) 거리를 메우고 있었고, 독일의 국가경제는 회생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로 보였습니다. 당시의 대공황은 전세계를 공포의 늪으로 몰아넣었지만 세계의 어떤 지도자도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습니다. 회사가 파산하면 사장은 해외로 도피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고,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은 거리를 배회하며 구걸을 하거나 굶어 죽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장점을 총 망라했다는 와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정권들은 이 대공황의 중압에 짓눌려 모두 단기 정권으로 운명을 다했습니다.
아사 직전의 청년 실업자들에게 나치당은 구원의 손길이었습니다. 바로 이들 청년들이 나치당에 입당하거나 열렬한 지지자로 변신했습니다. 따라서 히틀러는 사력을 다해 불황과 싸워 이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당시의 독일 정치인들은 예상했습니다. 독일의 기득권 세력은 히틀러가 선동가(agitator)로서는 꽤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행정경험이라곤 전무한 이웃나라(오스트리아 )출신 건달이 사상 최악의 불황을 무슨 수로 타개하겠는가고 얕잡아 보았습니다.
힌덴부르그 대통령 역시 히틀러에게 기대를 해서가 아니라, 나치당의 골칫거리들이 워낙 거리를 누비며 시끄러우니까 누굴 시켜도 못할 일을 히틀러 일당에게 한번 시켜보면, 곧 그들의 무능함이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치는 발언권을 잃게 되어 스스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겠지 하는 안일한 계산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팩트만으로도 애청자(또는 독자) 여러분은 박근혜 대통령과 히틀러를 같은 평면상의 쌍둥이 정도로 인식한다는게 얼마나 허접한 상상인가 하는 것을 눈치 챌수 있을 것입니다. 히틀러 이야기를 좀더 하겠습니다.
히틀러 정권은 정부의 각료 10명중 히틀러의 사람은 자신을 포함한 단 3명의 각료로 출발했습니다. 허약 체질의 이런 나치정권이 막 조각을 끝냈을 무렵 엄청난 대형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새 정권이 수립되고 채 한달도 되지않은 2월27일 저녁 9시경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쌓였습니다. 누군가에 의한 방화였습니다. 한국의 여의도 국회의사당보다 배 이상 큰 대형 석조건물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그 불속에서 한 젊은이가 반나체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 되었고 폰 룻페라는 알콜중독자가 방화사건의 주범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속주머니에서 홀랜드 공산당의 당원증이 발견된 순간, 나치당의 제2인자 게에링크의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산당원이 국회의사당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뉴스가 임시뉴스로 전국에 특보로 보도되었고 나치당원의 횃불데모가 전국의 대소 도시를 누볐습니다.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인 이날 밤,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당시의 독일 공산당은 의석 100명을 거느린 국회의 제3당이었습니다. 게에링크가 장악한 나치의 경찰이 이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한 것입니다. 게에링크는 공산당 세력을 소탕한 경찰을 향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총알은 심문후 발포하라는 게 아니라 발포후 심문하라는 총알”이라고 특명을 내렸습니다.
제2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기타 정당들은 히틀러에 저항해서 피를 보느니 입을 다무는 게 사는 길이라는 현실론으로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한달 뒤에 히틀러가 국회에 제출한 전권 위임법 역시 나치당원들의 횃불행진이 국회를 에워싼 속에서 속결로 채택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고자 하는 일은 히틀러가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게 이 법의 골자였습니다. 히틀러의 권력은 누구에선가로부터 물려받은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이렇게 창출해 낸 것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는 국민이 그에게 대통령의 권한을 손에 쥐어 준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든 못하든 그 점은 대통령에게 달려있습니다. 전권위임법으로 무장한 히틀러는 국민에게 공약한 경제활성화와 독일을 3류국가로 밀어넣은 베르사이유 체제에서의 탈피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박근혜의 입장과 히틀러의 발판은 전혀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이 글은 재미교포 언론인 양준용씨가 최근 미국 LA 라디오코리아에서 방송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