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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
유단자인가?
이 TV 개그콘서트 유행어를 화살촉에 올려 어딘가로 쏘아 올리고 싶어지는 아침이다. 박영선대표가 겪고 있는 정치의 일단락 실패를 목도하면서 과연 좋은 정치인의 조건이 무엇일지에 관해 생각해 본다. 가급적 정치에 관해 언어를 섞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 정치 파동 현상은 미디어산업과 관련해서 뚜렷하게 포착되고 있는 유단자 이슈로서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기자이고 앵커로서 활약해온 언론인 출신 정치인 박영선은 검은 띠 블랙 벨트를 두른 유단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정통 야당 원내 대표에다 비상대책위원장까지 맡겼으니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는 배를 통제할 리 만무하다. 이런 유단자론에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지역구 혈전에서 압승하고 당 대표까지 한 이를 최고 유단자 검은 띠가 아니라고 하고 난파선 책임까지 물으려 한다면 너무 비논리적이고 가혹한 품평이 될 터인가? 그러지 말고 냉정하게 언론인들이 서식하는 미디어기업, 미디어산업 내부 혁신 사례부터 들여다보자.
박영선대표가 유단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기준은 언론인으로부터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그 때 그 과정에 걸려 있다. 언론인이 정치인으로 가거나 내부 조직이라도 경영자로 변신하는 교체 과정에는 반드시 승단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런 전통은 미국 지상파 방송사 NBC가 보여준 전설의 표본에서 시작되었다. 1990년대 GE가 NBC를 인수했을 때 뉴스룸은 결사 항전했다. 보도국장 등 언론인 간부들은 배수의 진을 쳐 놓고 “언론으로서 공신력이 매우 중요하니 GE 잭 웰치 회장은 경영은 하되 언론사 운영에 대해서는 간섭은 하지 말라”고 통첩했다.
당시 미국도 언론인들이 한 번 품은 독기는 서슬이 퍼렇게 등등했던 모양이다. 사회 여론도 NBC 올드보이들 편이었다고 한다. NBC는 자체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새 주인 GE를 포식자쯤으로 몰고 가는 초강경책을 폈다. 결말은 어찌 되었을까? 잭 웰치 GE 회장이 누구인가? 20년 가까이 세계 최대 기업 GE를 키워 온 리더가 아닌가.
부실 계열사를 방문해 사무실 복도를 헤집고 다니면 그 주변은 모두 해고된다 해서 ‘미스터 중성자탄’ 같은 별명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살아있는 경영학 교과서가 잭 웰치였다. 이런 잭이 NBC 언론인들과 곧장 담판을 했다. “GE 회장으로서 내 공신력이 당신들 언론인들 공신력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고 일갈하면서 NBC에 무혈입성했다.
여기까지 무용담이었으면 NBC와 GE 만남, 즉 미디어 언론과 대기업의 만남이 싱거웠을지 모른다. 그저 그런 M&A의 한 장면 정도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NBC와 GE의 사이에는 크로톤빌 연수원이 있었다. 뉴욕시 북쪽 허드슨 강가 GE 사내교육기관인 크로톤빌 연수원은 기업 경영의 국기원이자 사관학교라고 할 비밀병기쯤 된다. 삼성이 이 크로톤빌 연수원을 본 떠 용인 에버랜드 옆에 삼성인력개발원을 조성해 수십 년 모토, 인재제일에 올인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예다.
아무튼 이 연수원은 NBC 언론인을 NBC 경영인으로 전환시키는 압축 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가져갔다. 우선 NBC, MSNBC, CNBC 등 조직에서 기자나 PD로서 10여년 정도 활동한 인력들을 대상으로 경영, 관리직 모집을 실시했다. 자원한 언론인들을 가운데 뽑힌 이들은 곧장 당시 모기업인 GE 크로톤빌 연수원으로 직행하도록 했다. 가자마자 이들은 GE가 스스로 익혀 개척하고 혁신해온 경영의 신 프로그램으로 빨려들어간다.
대표적인 것이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는 6 시그마다. GE가 창안해 전 세계 기업들, 자영업 소상공인으로까지 확산된 이 기법은 한 번도 적용해본 적 없는 미디어 기업 NBC에도 고스란히 주입되고 침투했다. NBC에서 언론인으로 살아온 이들로서는 당황스럽고도 쓰라린 적응과 체험, 학습의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두 개 다른 원자가 융합해 폭발하듯이 6 시그마라고로 하는 제조업 태생 불량률 제로 기법은 CNBC 앵커 스튜디오 인테리어 교체로 직행하며 현장 확인 가능한 성과를 가져왔다. 나무 합판으로 꾸민 스튜디오 데스크에 비해 컴퓨터 가상 효과로 처리한 데스크 공간이 좀 더 나은 시청자 반응을 가져왔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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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오른쪽)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언론인 출신들이 크로톤빌 연수원에 입소해 진짜 경영자로 변신토록 감행한 프로그램의 꽃은 단연 블랙벨트 검은 띠 승단 심사였다. 6 시그마를 비롯해 회계, 마케팅, 경영정보시스템, 리더십, 고객관계관리, 소비자 행동이해 등 경영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교과목들 하나하나가 언론인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겠지만 경영자의 조건에서 어느 하나 뺄 수는 없는 엄중한 과업들이었다.
과목마다 분야마다 NBC 기자와 PD 앵커 출신 경영자 후보생들은 혹독한 심사를 통해 파란 띠 빨간 띠를 차례로 거쳐 검은 띠 심사까지 최종적으로 통과해야만 회사로 돌아가 경영자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했다. 이게 바로 그 저명하고도 악명 높은 크로톤빌 연수원 시스템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에서 눈부신 활약을 해왔던 언론인 출신들은 어떠한가? 어디 언론인뿐이랴. 법조인 출신 정치인, 교수나 연구원 등 학자 출신 정치인, 경영인 출신 정치인, 시민단체 출신 정치인, 운동가 출신 정치인 등등. 우리에게는 검은 띠 없는 선무당 정치인이 너무 많지 않은가?
이번 뉴스, 즉 야당 박영선 대표가 탈당까지 고려했다는 소식은 뉴스 더미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앵커 언론인이 그 뉴스 다발로 검은 휘장을 덮는 막장으로 비쳐 더 더욱 씁쓸해진다. 야당만 보더라도 정동영 앵커가 그러했고 이번 박영선 앵커가 그러하고 자연발생적 팬클럽까지 생겨났었던 인기 짱 신경민 국회의원도 앞으로 그러할지 모른다.
이 모든 업보가 언론인 출신이 정치인으로 변화하는 그 중간, 다시 말해 교체비용이 너무 저렴했기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너무 쉽게 그냥 빨리 언론인에서 떠나 정치인으로 직진해버린 특수성 때문에 야당 지지자는 물론 우리 사회 온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교체비용이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렸다는 지적이다.
GE와 NBC가 만났던 허드슨 강변 크로톤빌 연수원이 실험하고 혁신해냈던 검은 띠 교훈은 미디어산업 전반으로도 확산되어가고 있다. 뉴욕타임스도 퓰리처상 수상자에게 1년 안식년을 선사해 공립학교 교실 같은 현장에서 차세대 고객개발과 같은 경영 훈련을 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우리 미디어업계는 여전히 언론인 해외 연수 같은 고귀한 기회를 폭탄주와 골프 탐닉으로 허비하고 있지 않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이번 정치인 박영선의 패퇴는 곧 언론인 출신 정치인의 나락이다. 동시에 검은 띠 승단 심사 없이 정치인이나 공직으로 직행하는 수많은 기득권 직종들의 참사이기도 하다. 정치인으로 시작해 잔뼈가 굵지 않는 사람이 새롭게 정치나 행정을 하려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철저한 크로톤빌 연수원 과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철저하고 처절한 수업으로 따는 검은 띠 유단자 승단 없이 어찌 어여쁜 꽃 피울 수 있을까? 감히 국민 앞에서.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