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태국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일본 총리와 단독 환담을 나눴다. 정상들 대기실에 들어서는 아베 총리를 발견한 문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권유해 이뤄진 깜짝 만남이었다.
사전에 조율되지 않아 일어통역도 없이 영어통역만 대동한 11분간의 대화였지만 한일 정상이 대화를 나눈 것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처음이고, 작년 9월 한일정상회담 이후 13개월 만의 일이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을지 주목된다. 특히 오는 22일 자정을 기점으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있어 앞으로 3주간동안 문 대통령이 한일 외교의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이날 한일 양 정상이 마주앉기 이전에 앞서 10월22일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 파견된 이낙연 국무총리가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한 일이 있다. 이날에도 양 정상은 문 대통령의 모친상과 일왕 즉위식에 대한 인사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두 정상은 양국 현안을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문 대통령이 “필요하면 보다 고위급 협의를 검토하자”고 제안했고, 아베 총리는 “모든 방법으로 해결책을 모색하자”고 답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자유무역을 거듭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자유무역 질서가 외풍에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내고, 축소 균형을 향해 치닫는 세계경제를 확대 균형‘의 길로 다시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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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가 4일 방콕 임팩트 포럼에서 열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서 기념촬영 전 악수하고 있다./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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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두 정상의 깜짝 만남은 23일부터 시작되는 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마지막 외교 해법을 찾아보려는 생각이 일치하면서 이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최근 들어 미국에 지소미아 종료 철회를 압박하고 있는데다 5일 일본을 거쳐 방한하는 데이비드 스틸웰 미국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의 행보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앞서 스틸웰을 만난 윤순구 외교부 차관보는 지소미아 종료 철회를 위해선 미국의 모종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역할을 요구하기 위해선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대화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언론들은 일단 문 대통령의 제안으로 한일 정상이 대화한 것과 관련해 폄훼하는 보도 행태를 보였다. 5일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정부 고위 관료의 말을 인용해 “(문 대통령이) 내우외환으로 더 이상 한일관계를 악화시켜서는 안될 것”이라고 전했다.
다른 일본정부 관계자는 요미우리에 “아베 총리가 도망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 문 대통령의 대화 요청을 받아들였다”며 “(환담 중) 징용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제안이 없었으니 상황이 움직이지 있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아사히, 마이니치, 산케이,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다른 언론사들도 비슷하게 미국에 대일 관계 개선 노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의 분석을 내놨다. 마이니치신문은 “문 대통령이 환담에서 대화를 강조한 것은 한일 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한일이 대화 가능한 관계라는 것을 미국에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향후 한일 관계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도 드러냈다. 아사히신문은 “강제징용 소송에 대해 문 대통령이 쉽게 양보할 수가 없으니 관계 개선의 길은 멀리 있는 실정”이라고 했고, 마이니치신문은 “16~17일 예정됐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취소되면서 지소미아 유효 기간 내 한일 정상간 접촉할 기회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정부는 지소미아 종료 철회와 일본의 수출규제 해제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을 최상의 해결책으로 꼽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최근까지도 지소미아 종료 철회가 우선될 때 수출규제 해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문 대통령이 방콕에서의 대화 동력을 살려 늦지 않게 한일 간 고위급회담과 한일정상회담까지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동안 문재인정부가 소홀히 해온 ‘4강 외교’ 중 가장 먼저 한일관계를 살려낼 수 있을지에 따라 정부의 외교력이 평가될 전망이다. 문 대통령이 전통적 한미일 협력관계 복원으로 외교안보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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