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1980년 5월18일 당일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에게 “휴교령과 계엄령으로 시위를 통제하지 않으면 베트남처럼 한국도 공산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위 진압을 위한 군사작전을 이행하려면 한미연합사를 거쳐야 하는 만큼 미군을 설득하기 위한 이런 발언은 미 정부의 기밀문서에 담겨있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전후 기록을 담은 미 정부 측 기밀문서 43건(143쪽분량)이 15일 공개됐다. 1990년대 중반 민간 측 요구로 부분 공개됐던 문건이 전면 공개된 것으로, 주한 미국 대사관이 미국 국무부에 보고한 문서가 대부분이다.
기민문서에 따르면 5.18 하루 전날인 1980년 5월 17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광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만나 계엄령 확대 대신 개헌을 통해 한국 정치 발전 계획을 짤 것을 조언했다. 하지만 최 비서실장은 “군 당국이 학생들에 대한 정부의 유화적인 대응(soft tactics)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며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령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본국에 “최규하 대통령은 제야 인사, 대학생의 요구를 들어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정부(최규하 정부)가 군부에 포섭됐고, 군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후 글라이스틴 대사는 5.18 당일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을 면담했다. 이 사령관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휴교령과 계엄령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베트남처럼 한국도 공산화될까 두렵다”며 계엄령 확대를 정당화했다. 그러면서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비무장지대(DMZ)에서 병력을 빼면 북한의 공격 위험이 커진다는 주장이 대통령에게 (계엄령 확대를) 설득하는데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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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국무부가 외교부에 전달한 미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외교부 |
또 기밀문서에는 12.12사태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보안사령관)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 정황도 담겼다. 1979년 12월14일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난 전 전 대통령은 “나는 개인적 야심이 없고 최규하 대통령의 자유화 정책을 지지한다”며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글라이스틴 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에서 12.12사태를 ‘영턱스’(Young Turks·1908년 터키에서 군사혁명을 일으킨 젊은 장교들)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쿠데타로 규정했다. 그는 “군사 반란 동기 중 하나가 권력에 대한 욕망인 점은 명백하다”고 적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은 군부 내 다수의 정승화 지지자가 향후 몇주 동안 상황을 바로잡으려 행동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며 “전두환과 동료들은 군사적 반격을 저지하는데 우리의(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어한다. 우리가 수개월 내 매우 까다로운 선택을 해야 할 수 있다”고 본국에 전했다.
한편, 글라이스틴 대사가 1980년 2월에 작성한 문서에는 당시 28세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이듬해 총선 출마를 희망했다는 내용도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암살된 대통령의 딸에게 갑작스러운 야심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며 “사정을 잘 아는 민주공화당 의원에 따르면 박근혜가 다음 총선에 아버지의 고향을 포함한 지역구에서 출마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또 청와대 경호 근무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 일가와 친해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박 전 대통령에게 출마를 권유하고 있다고도 기록했다.
이번에 공개된 미 정부의 기밀문서는 1979년 12월12일 군사쿠데타 직후인 1979년 12월13일부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이 끝난 1980년 12월13일까지의 기록이다. 일부 내용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 대사가 회고록으로 이미 밝힌 바 있어 내용상으로 새로운 사실은 없다.
하지만 미 정부 문건으로 공식 확인됐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정부는 지난해 11월 외교경로로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문서의 기밀해제 검토를 공식 요청했으며, 미 정부가 기밀 해제한 이 문서를 지난 12일 우리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발포 책임자 규명 등 5.18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핵심인 미 국방부 문서는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어 추가적인 정보공개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우리정부는 미정부 측에 국방 관련 문서 역시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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