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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광원 세종취재본부장 |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경제위기 핑계 말고 재벌 곳간 열어라
”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건물 앞에는 지금도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에서 올해 ‘최저임금 줄다리기’ 과정에서 내건 것이다. 올해 최저임금이 결정된 지 1달이 돼 가지만, 여전히 그대로다. 민노총도 그렇지만, 정부청사 담벼락에 한번 걸린 플래카드는 좀처럼 내려지는 게 드물다.
상황이 끝나면 내건 쪽에서 자진 철거해야 하는데, 그냥 ‘나 몰라라’ 방치하고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정부 쪽에서 임의로 철거하면 불법이다. 그래서 이미 끝난 지 한참 된 주장들이 쓰레기가 되어, 정부 담장에 덕지덕지 흉물처럼 나부끼며 대한민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
그 무책임함도 그렇지만, 내용은 더 황당하다. 최저임금을 논의하는데, 재벌 곳간을 열라는 건 대체 무슨 얘기일까?
재벌 대기업 소속 노동자들은 대개 최저임금과 무관하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고임금 계층의 하나로, 민주노총의 ‘주력부대’이기도 하다.
요는 재벌이 고용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최저임금을 올려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곳간을 열고, 돈을 내놓으라는 말이다. 곳간 문은 정부가 강제로 열어야 하고...
그렇다고 민노총이 우리 사회의 ‘밑바닥 계층’인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실제 애쓴 것도 거의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19) 사태로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이 위기에서, 민노총은 협상 초반에 시급 1만770원, 무려 25% 인상을 요구해 현실감각을 잊은 그들만의 딴 세상살이 얘기로 ‘아연실색’케 했다.
그러다 황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질 기미가 전혀 안보이자, 일찌감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 후엔 정부와 사측에 형식적인 비판 제스처만 취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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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의 최저임금 인상요구 플래카드 [사진=미디어펜] |
민노총이 진정 최저임금 노동자들을 위한다면, 한 자릿수 인상률로 현실적 대안을 내고, 조금이라도 더 올려보려고 끝까지 애썼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애초부터 최저임금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 보인다. 대기업 ‘귀족노조’인 자기들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엉뚱하게 재벌 곳간을 열라는 식으로, 결국 대기업 노동자들을 위한 주장만을 해대는 것이다. 물론 당시 ‘운신의 폭’을 제약하는 사정이 좀 있기는 했다.
지난 4월 17일 당시 김명환 민노총 위원장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원 포인트 사회적 대화’를 공개 제안했다. 노사 양측과 정부가 한 자리에 모여서, 경제위기 극복과 일자리 유지에 힘과 지혜를 같이 모으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 일도 아닌 최저임금 인상에 굳이 목을 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최저임금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노사정 사회적 대화는 우여곡절 끝에 합의문이 나오면서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적’은 내부에 있었다. 민노총 조직 내 강경파의 ‘반란’이 일어난 것.
민노총 의결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중집위) 위원들이 합의안에 반대하며, 협약식에 참석하려던 김 위원장을 ‘감금’, 협약식이 무산됐다. 김 전 위원장은 대의원대회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 이 마저 부결되면서, 결국 위원장에서 사퇴해야 했다.
그의 결정이 내부 반발로 무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해 1월에는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조건 없이 참여하겠다는 안을 대의원대회에서 발의했지만, 표결에도 부치지 못하는 쓴 맛을 봤다.
김 전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직선제 선거에서, ‘사회적 대화 참여’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그런 그가 공약을 지킬 수 없게 됐다. 그는 위원장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고질적인 정파’의 문제를 공개 거론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게 노동계 인사들의 지적이다. 바로 직선제로 뽑힌 위원장에게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민노총은 과거 민주화 이전 ‘어용노조’ 시절, 노조위원장이 기업과 결탁했던 시절의 기억 때문에, 위원장과 지도부에 권한을 집중시키지 않는 ‘민주노조’의 전통을 이은 조직이다. 그래서 지금도 위원장보다 중집위원과 대의원들에게 결정권이 쏠려 있다.
이 1980년대 논리가 2020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 바로 민노총이다. 한 민노총 활동가는 “위원장은 사실 선봉에서 투쟁하다가 잡혀가라고 뽑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정부도 재계도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으니, 협상파트너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스스로는 어떤 중요한 결정도, 변화도 추진할 능력도, 주도할 주체도 없는 ‘판단능력 장애’에 빠져버렸다. 이런 조직이 대한민국 제1노총이다. 조합원이 100만명을 넘는다.
최근 우리나라 통화신용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의 노동조합이 민노총 탈퇴를 선언했다.
반면 최저임금제의 적용을 받는 최하층 노동자들, 노조가 없는 하청.영세기업 노동자들, 노조를 만들 수도 없는 특수고용노동자나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들, 비대면 디지털경제의 약자들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이젠 재벌개혁이 아니라, 노동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사실 이전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끝으로, 공정거래위원회 내부에선 법 개정이 되면 재벌개혁은 사실상 끝난다는 분위기다. 앞으로의 관심사는 디지털경제의 ‘공룡’들이다.
거꾸로 공정위는 이제부턴 기업 살리기, 경제 살리기로 위기극복에 나설 태세다. 금산분리 일부 완화가 그 증거다. 자, 이제는 노동개혁이 시급하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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