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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산 정상에 복원돼 있는 아차산 봉수대 [사진=미디어펜] |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봉화산(烽火山)은 서울의 동북부인 중랑구 상봉동, 중화동, 묵동, 신내동에 접해 있고 정상 높이는 160.1m로, 평지에 돌출되어 있는 독립구릉이다.
낮은 산이지만 동쪽 아차산 주능선을 제외하고는 북쪽으로 불암산, 도봉산과 양주 일대까지 잘 조망되며, 서쪽과 남쪽으로도 높은 산이 없어 남산과 이남 지역도 잘 보이는 지역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주요 교통로였던 중랑천(中浪川) 일대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봉화산이란 산은 사실 전국에 흔하다. 정상에 봉화대가 있었던 곳을 흔히 통칭하기 때문.
이곳은 북쪽 양주의 한이산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목멱산(남산)으로 전달하는 아차산 봉수대(烽燧臺)가 있던 곳이다. 아차산 봉수대는 함경도 지역의 전란을 도성에 알리던 ‘제1 봉수노선’의 마지막 봉수로, 서울시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됐으며, 지난 1994년 11월 7일 복원됐다.
봉화산인데 왜 아차산 봉수대인지 의아해할 수 있는데, 거리는 약 2㎞ 정도지만, 조선시대 지도에는 이곳까지 아차산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아차산 봉화가 여기다.
전망 좋은 전략적 요충이었던 만큼, 고구려(高句麗)의 보루 유적도 남아있다.
봉화산의 고구려 보루(堡壘)는 둘레 268m로, 아차산 주변 일대에 있는 20여 개의 보루 유적 중 큰 규모에 속한다.
정상에서 약간 남쪽에는 봉화산 도당인 산신각(山神閣)이 있으며, 이 곳은 약 400년 전에 주민들이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해마다 음력 3월 3일에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산신각(도당)에서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봉화산 도당제(都堂祭)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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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현된 봉화산 옹기가마 [사진=미디어펜] |
지하철 7호선 중화역에서 이 봉화산을 올라본다. 2번 출구에서 왼쪽 언덕길을 오른다.
잠시 후 골목 안에 ‘봉우재 마을마당’이 숨어있다.
봉우재(烽牛峙)는 이 동네의 옛 지명이다. 소의 힘을 시험하던 장소였다는 촌로들의 체험담이 전해진다고 한다. 따라서 봉화산의 ‘봉’자와 소 ‘우’자, 그리고 작은 언덕이라는 ‘재(치)’자가 결합된 이름으로 보인다.
다시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왼쪽에 경동제일교회 뾰족탑이 우뚝하다. 구한말인 1904년 창립된 유서 깊은 장로교회다.
조금 더 가면 골목 안에 있는 성덕사는 건물이 2개뿐인 작은 사찰인데, 대웅전(大雄殿) 1층이 주차장인 특이한 구조다. 그 앞 5층 석탑과 그 양쪽 석등 2개는 고졸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1970~1980년대 모습 그대로인 낡은 이발관 앞을 지나 조금 더 가니, 산이 나타난다. 애기똥풀 군락이 반겨준다.
신내12단지아파트 옆 골목길로 들어서면, 곧 왼쪽으로 보현정사(普賢精舍) 가는 길이 나온다.
조금 오르면, 오른편에 괴이한 동물의 석두 3개가 나란히 보이는데, 입에 PVC 파이프들이 꽂혀 있다. 약수터는 아니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하수도로 흘려보내기 위한 것 같다.
조금 더 가면 보살 입상이 서 있고, 그 위가 보현정사다. 대웅보전과 부속 건물 1채로 이뤄진 소박한 사찰로, 5층 석탑과 석등(石燈) 각 1기가 있다.
보현정사 왼쪽으로 산을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숲길은 고요한데, 산책하는 사람들은 제법 많다. 인근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처다. 예나 지금이나 군사적 요충지여서인지, 산책로 주변에 교통호 등 군사시설이 꽤 많다.
이윽고 오른쪽으로 신내동 아파트단지들이 내려다보인다. 조금 더 가니, 왼쪽으로도 조망이 트이기 시작한다.
낮은 산이라서 곧 정상이다.
복원된 봉수대 모형이 우뚝 서 있다. 그 오른쪽 한옥건물이 도당제가 열리는 산신각이다. 또 정상부 평탄면 외곽 경사면에 있는 석축(石築)이 고구려 보루 유적으로 추정된다.
정상의 전망은 역시 감탄사를 자아낸다. 정면으로 남산이 솟아 있고 왼쪽엔 관악산, 오른쪽 도봉산까지 손에 잡힐 듯하다. 반대편에는 봉화산 안내판이 있고, 그 앞 정자와 평상에는 어르신들이 ‘바둑 삼매경’이다.
중랑구청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바로 내려가면 너무 금방 끝날 것 같다. 마침 나타난 ‘옹기테마공원’ 이정표가 호기심을 자극, 왼쪽 둘레길로 접어든다.
조금 가니, 산림치유(山林治癒) 공간 안내판이 있다.
기존에 있던 배드민턴장이 철거된 후, ‘2019 서울시 시민참여예산’ 사업을 통해 재탄생한 곳으로, 진달래와 국수나무 등 산림수종과 꽃들을 식재해 시민휴식 및 치유공간으로 조성했다.
잠시 후 관리가 안 돼 벌거벗은 무덤 2개 너머 갈림길에서 하산하면, 옹기테마공원이다.
대형 옹기(甕器) 가마가 복원돼 있는 이 곳은 1990년대 초까지 서울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옹기점이 있던 신내동, 망우동 지역을 상징한다. 한국전쟁 이후 번창하던 이 지역의 옹기산업 종사자도 2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현재의 옹기가마는 서울시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제30호인 옹기장 배요섭 씨의 자문을 받아 전통 가마를 복원한 것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인 ‘용가마’ 형태라고 한다.
옹기는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 용기로, 잿물을 입히지 않고 구워 낸 질그릇과 잿물을 입혀 고온에서 구워 윤이 나고 강도가 있는 오지그릇을 통칭하는 말이다. 세계에서 우리 한민족만이 가진 독특한 음식 저장용기다.
원래 옹기테마공원 자리는 총포 및 화약류 도매업체가 사용하던 화약고(火藥庫)였다.
약 10톤에 달하는 화약류들이 저장돼 있어, 주민들의 불안감과 이전 요구 민원이 많았다. 이에 따라 2014년 화약고가 이전하고, 과거의 지역 옹기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2017년 3월 옹기공원으로 재탄생했다.
공원 내에는 복원된 가마와 옹기항아리 및 옹기장인(匠人) 조형물, 옹기와 목공예 및 한지 체험장, 카페 ‘옹기종기’ 등이 그야말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옹기로 생활하던 조상들의 소박한 모습을 재현한 조명물들이 미소를 자아낸다.
옹기테마공원을 나서면, 오른쪽에 신내공원이 있다.
울창한 메타세콰이어 숲 속에 작은 정자가 있고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는 도시공원이다. 도로를 만나는 네거리 입구에는, 독을 빚는 부자를 표현한 봉화산 옹기테마공원 상징 조형물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6호선 봉화산역이 나오고, 경춘선(京春線) 폐철길을 공원으로 꾸민 ‘경춘선숲길’이 지척이다. 하지만 사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흔치 않은 자율형 공립학교인 원묵고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또 왼쪽 길을 따라간다. 봉화산 유아숲체험장도 왼편에 보인다.
조금 더 가니 ‘숙선옹주(淑善翁主) 안씨 지묘’라는 비석이 나타났다.
선빈(善嬪) 안씨이기도 한 숙선옹주는 조선 3대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했다가, 세종 때 숙선옹주로 봉해졌다고 한다. 서울시기념물 제43호인 숙선옹주묘에는 분묘 1기와 문인석 2기, 장명등과 상석 및 산신제석 각 1기 씩 남아있다. 그 앞 도로도 ‘숙선옹주로’로 불린다.
이 산길에서 조선왕실(朝鮮王室)의 유적을 만난 것은 뜻하지 못한 ‘보너스’였다.
다시 길을 따라간다. 먹골파출소 앞을 지나 조금 더 가니, ‘정자묵 마을마당’이 있다. 이곳 묵동이 조선시대 먹을 만들던 먹골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쓰여 있다.
묵동(墨洞) 즉 먹골은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먹을 만들던 고장으로, 먹의 품질이 좋아 궁중에도 진상했다.
당시 먹골 근방에는 연적과 벼루를 닮은 연못이 있어 연촌 혹은 벼룻말이라고 했다는데, 지금의 노원구 월계동이다. 또 현재의 하계동은 필동 또는 붓골이라 불렀는데, 두 동네와 묵동을 연결하면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3개가 삼각형 모양이고, 이 안에서 인재들이 나온다고 했다.
현재 그 안에 있는 것은 광운대, 서울과학기술대, 육군사관학교 및 서울여대 등이다.
또 세조 때 금부도사였던 왕방연(王防衍)이 왕명으로 단종 유배를 호송하고 사약을 전달한 것을 뒤늦게 통탄, 눈물로 관직을 버리고 필묵과 벗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 바로 여기다. 당시 어린 단종의 애절한 눈빛을 잊지 못한 왕방연이 심었던 나무가 배나무라고 전한다.
경기도 구리시의 특산물 ‘먹골배’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지금의 신내동, 중화동, 상봉동은 물론, 구리와 남양주로 배나무 밭이 퍼졌다. 이 동네는 일제 때 구리였다가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됐고, 지금은 아파트와 공원 등이 증가하면서, 배 밭은 거의 사라졌다.
정자묵 마을마당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 쭉 내려오면 7호선 먹골역이 나온다. 대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 동네 유래를 말해주는 큰 자연바위 모양의 비석이 서 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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