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북악산은 서울 경복궁(景福宮) 북쪽에 솟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진산이다. 높이는 해발 342m다.
고려 숙종 때 북악산 아래는 남쪽의 수도인 남경(南京)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였으며, 당시에는 북악산을 ‘면악’이라 했다고 전한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북악산을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렀는데, 백악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악산(北岳山)이라고 불렀다.
풍수지리상 북악산이 주산이고, 남쪽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 남산으로 안산(案山)에 해당한다. 동쪽의 낙산은 좌청룡(左靑龍), 서쪽에 있는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다. 또 도성 한가운데를 청계천이 흘러, 경복궁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을 이룬다.
북악산은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아난 형상으로, 주변의 산에 비해 도드라져 보인다. 힘과 패기, 위엄이 넘친다. 강한 지기를 지닌 화강암 바위산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 이성계의 신망이 두터웠던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왕가의 기운을 받은 명산으로 칭송했으며, 그 아래 궁궐을 세우고 도읍으로 정하게 됐다. 1394년(태조 4년)에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신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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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장전망대'에서 본 북악산 정상과 인왕산/사진=미디어펜 |
이렇게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정상부에는 백악산신을 모시는 신사가 만들어졌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인 경무대(景武臺)도 이곳에 있었다. 현재도 청와대가 북악산 아래 위치한다.
북악산, 인왕산·낙산(駱山)·남산 등,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능선을 연결한 한양도성 성곽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축조됐다.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돼 있고,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에는 서울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이 남아 있으며, 부암동 뒤쪽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 계곡이 있다.
북악산은 예전부터 소나무가 울창한 경승지를 이뤄, 조선 선비들이 계곡을 찾아 탁족회(濯足會)를 자주 열었던 곳이다. 하지만 소나무가 벌채로 사라지고, 현재는 참나무 종류가 많다.
창의문에서 정릉(貞陵) 입구까지 ‘북악스카이웨이’가 북악산 주봉 북쪽 사면을 끼고 돌면서, 북동쪽 능선을 따라 달리고, 남동쪽 기슭에는 삼청공원이 있다.
이 북악산 남동쪽 기슭에 있는 동네가 성북동이다.
성북동(城北洞)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속한 행정동 및 법정동이다. 지난 1968년 11월 ‘월간문학’에 실린, 김광섭 시인의 서정시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동네다.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의 한양도성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싼 성북동은,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北屯)이 1765년(영조 41년)에 설치된 연유로, 이런 동명이 붙었다.
한양도성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惠化門)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성북동은 예로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이 어울린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곳이다.
부자와 정치인 등 유력 인사들의 집과 세계 각국 대사관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대표적 부촌의 하나며, 각종 문화유산과 명소들이 한 지역에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악산은 과거 군사지역(軍事地域)으로, 일반인이 함부로 오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꾸준히 개방을 확대해 왔는데, 2020년에도 추가 개방이 있었다.
오늘은 이 새로 개방한 길을 걷다가, 성북동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지하철역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버스를 갈아타고, 자하문(紫霞門) 고개에서 내린다. 같은 부암동을 가더라도, 고개로 올라가지 않고 터널을 통해 지나가버리는 노선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조선시대 창의문은 평소에는 닫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높고 험한 고개로, 호랑이도 자주 나타났던 곳이다.
그런데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 문이 활짝 열렸다. 반정군이 지금의 홍제동에 모여, 성문을 도끼로 부수고, 바로 궁궐을 습격했다. 그리고 쿠데타 성공 후, 고개 반대쪽 밑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었다고 전한다.
고개에는 고 최규식(崔圭植) 경무관의 동상이 있다. 북한 무장공비(武裝共匪)들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1968년 1.21 사태 당시, 적들을 막다가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 바로 그다.
창의문을 통과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길을 건너, 큰 도로로 가지 말고 아래 골목길을 따라간다. ‘동양방앗간’ 앞에서는 직진한다.
왼쪽 아래 CCC 한국대학생선교회(韓國大學生宣敎會) 건물이 보인다. 좀 더 가면, 길옆에 ‘Art for Life’라는 멋진 한옥 카페 겸 전시관이 있다. 한번 들러볼 만한 곳이다.
얼마 안 가, 오른쪽에 굴다리가 나온다. 여기가 새로 개방한 북악산 둘레길 코스 입구다. 지도 안내판이 서 있다.
굴다리를 지나면, 계단이 있다. 군인들이 사용하던 길이, 이젠 등산객들의 차지가 됐다. 경사가 급해 숨이 차지만, 조금 오르면 뒤쪽으로 북한산(北漢山) 조망이 탁 트인다.
계단 길옆에 옛 경계초소가 있다. 북악산과 인왕산, 청와대(靑瓦臺) 외곽 경계를 담당하는 ‘제1경비단’에서 사용하던 초소다. 1.21사태 이후 ‘특정경비지구’로 되면서, 경계 작전을 위해 설치됐다. 2006년 4월 북악산 탐방로가 개방되면서 사용하지 않고, ‘기억의 공간’이 됐다.
이 곳처럼 활짝 개방된 초소는 현재 쓰지 않는 곳이고, 비어있더라도 잠겨 있는 곳은 사용 중인 듯하다. 물론 유사시에는, 안 쓰던 초소도 향토예비군(鄕土豫備軍)이 투입될 것이다.
계단 길을 좀 더 오르면, ‘청운대안내소’가 보인다. 여기부터가 본격적인 북악산 성곽구간이다. 출입증을 받아 찍고 들어가지만, 신분증은 필요 없다.
땀을 닦으며 조금 더 올라가면, 앉아 쉴 만한 곳이 있다.
이어지는 길을 오르락내리락 따라가다가 철책(鐵柵)을 통과하면, 드디어 한양도성 성곽이 나온다. 여기는 기존 코스다. 오른쪽 길로 가면 북악산 정상으로 갈 수 있지만, 우린 왼쪽을 택했다. 성곽 밑을 조금 걸으면,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곽 길을 따라 도는 것을 순성(巡城)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순성이 성을 튼튼히 다지는 것이자, 일종의 놀이였다.
‘순성놀이’를 하며 걷다보니, 왼쪽으로 전망대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여기부턴 또 새 개방코스다. 바로 곡장(曲墻), 즉 성곽 중 방어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성벽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이다. 지대가 높은 곳을 성벽으로 둘러싸기 위함이다. 당연히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곡장전망대’에 서니, 사방의 조망이 탁 트여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오른쪽으로, 북악산 정상인 ‘백악마루’와 인왕산(仁王山)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성곽이 구불구불 흘러내려온다. 뒤로는 북한산이 운무에 싸여 있다. 정면은 당연히 남산이다.
‘사진 찍기’ 놀이를 즐기다가, 출발한다. 성벽 밖으로 나가, 오른쪽으로 간다. 팔각정 쪽이다.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머지않아 철책을 나갈 수 있다.
여기서 우회전,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북악팔각정(北岳八角亭)으로 향한다.
팔각정 가는 길은 도로 바로 옆 데크 길이다. 시원하고 아름다운 숲길이다. 중간 중간 쉬어갈 수 있는 곳도 있다. 30~40분 정도면 팔각정에 도착한다.
1970~1980년대 신혼여행(新婚旅行) 떠나기 전에 들리는, 필수 코스가 북악 팔각정이다.
조선시대부터 명승지로 소문 난, 독특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으로, 한국 전통미를 살린 팔각형 2층 정자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서울 도심 속 관광 명소다. ‘족두리봉’부터 북한산의 연봉(連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식, 양식,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그 앞 북악스카이웨이는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높다. 정릉 아리랑 고개에서 부암동까지 약 10km 거리다.
길옆으로 성북구는 성북구민회관에서 팔각정까지 약 4km, 종로구는 부암동(付岩洞) 창의문에서 팔각정까지 약 3km, 도합 7km ‘북악하늘길’을 조성했다. 바로 우리가 걸어온 길이다.
팔각정 옆 군부대 앞에서 길을 건너, 하산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전망대가 반겨준다.
계단과 숲길을 번갈아가며 내려간다. 계단 각 층마다 끝부분에 노란 야광(夜光) 페인트 줄이 보인다. 병사들의 야간 순찰용이다. 문이 굳게 잠긴, 사용 중인 초소도 볼 수 있다.
어느새 성북천(城北川) 발원지까지 내려왔다. 청계천의 지천 중 하나로, 작은 샘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려온다.
바로 위가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다. 조선시대 이 문은 항상 닫혀 있었다. 역시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는 데다, 북문을 열어놓으면 도성의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고, 남녀 간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래서 ‘숙정’이라고 했다.
오른쪽은 ‘김신조 루트’로 이어진다. 북악산 둘레길 중 가장 험한 코스로, 김신조 등 1.21사태 당시 무장공비들이 실제로 달아나다가 사살된 곳이다. 루트 꼭대기에 있는 호경암(虎警岩)에는 당시의 총탄자국이 여럿 남아있다.
왼쪽으로 하산을 계속한다.
길옆으로 네모난 받침돌 위에 세모진 자연석을 얹은 비석이 서 있다. 2007년 4월 5일 제62회 식목일(植木日)을 맞아, 당시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 조림을 한 곳이다. ‘바보 노무현’, 그 분이 그립다.
곧 산길이 끝나고, 차도가 시작된다. 바로 왼쪽이 삼청각(三淸閣)이다.
삼청각은 원래 요정, 즉 고급 요릿집이었다. 1960~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서울의 4대 요정이 종로3가에 있던 오진암, 지금의 길상사인 대원각, 청운각, 그리고 삼청각이었다.
지금은 서울시가 관리하는 한정식집이다.
이 요정들은 당시 ‘요정정치’의 상징이다. 박정희(朴正熙), 김종필, 이후락, 정일권, 차지철 등 군사정권 실세들이 애용했다. 한때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정인숙 사건’도 삼청각에서 발생했다. 죽은 정인숙의 자식이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의 아들이니, 그녀는 첩(妾)이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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