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정조대왕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그 4대문 밖에 제방을 쌓고, 4개의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그 중 현재 3개가 남아있다. 북문인 장안문 밖에 있는 만석거(萬石渠), 서문인 화서문 외곽의 서호(西湖), 서도세자 묘역인 화성 현륭원 앞 만년제(萬年堤)가 그것이다. 동쪽 저수지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형체를 알 수가 없다.
이 저수지들은 주변 백성들의 풍년농사와, 화성을 지키는 장용위(壯勇衛) 장졸들의 급료지급을 위한 것이니, 정조의 애민정신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서호는 축만제(祝萬堤)라고도 한다. 서호를 만든 제방 이름이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축만제는 경기도기념물 제20호다. 지금은 전북 전주로 이전한 옛 농촌진흥청 북서쪽 여기산 밑에 있는 저수지로, 현재는 농진청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 시민들의 쉼터인 서호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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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호 낙조. 반대편이 여기산/사진=미디어펜 |
이 축만제의 축조연대는 1799년(정조 23)으로, 당시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로 조성된 관개용 저수지다. 수원성을 쌓을 때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內帑金) 3만 냥을 들여 축조했다고 한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이 있으며, 비석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규모는 문헌상 제방의 길이가 1246척,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돼있다. 제방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듯, 아직도 노송 등 고목들이 서 있다.
축조 후 4년 만에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 도감관.감관.농감 등을 두어 관수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고, 이에서 생기는 도조는 수원성의 축성고에 납입했다는 것을 보면, 제방 아래 몽리구역(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받는 곳)의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는 축만제 남쪽에 풍광이 아름다운 항미정(杭眉亭)을 지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호낙조’(西湖落照)는 ‘수원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다. 항미정은 1908년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융.건릉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잠시 쉬어간 정자이기도 하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식량 수탈을 위해 1906년 이곳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설치했고, 이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農村振興廳)이 생겨 ‘한국농업 메카’의 맥을 이어왔다.
현재는 서호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와 같은 서호의 역사적 배경과 중요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지난 2016년 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제67차 집행위원회에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世界 灌漑施設物 遺産)으로 국내 최초로 등재됐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데, 약 30분 남짓 걸린다.
수도권전철 1호선 화서역(華西驛)에서 내려 역 뒤쪽으로 나오면, ‘서호꽃뫼공원’이다. 이 근처 아파트들 중에 ‘꽃뫼’란 단어가 붙은 단지가 여럿인데, 야트막한 산 이름이다.
여기는 슬픈 전설이 있다.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효녀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머슴에게 겁탈을 당하고, 산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그녀의 묏자리에서 꽃나무가 무성히 자라났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안타까워, 꽃뫼라고 불렀다는 전설이다.
다른 설로는, 여기가 삐죽 튀어나온 지형인 ‘곶’이므로, 꽃뫼라고 했다고도 전한다.
서호꽃뫼공원은 이름처럼 꽃이 만발하고, 산책하는 시민들과 우레탄 바닥의 축구, 농구장에서는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
공원을 지나 작은 실개천을 건너면, 과거 농촌진흥청 시설의 일부였던 구 농민회관(農民會館)이 있다. 지금은 예식장으로 쓰인다. 그 앞뜰에 농진청 시절 세워진 대형 석비가 남아있다. ‘전국 농촌지도자 일동’이 세로로 새긴 ‘흙에 뻗은 뿌리’ 글귀가 선명하다.
예식장을 나오면, 바로 서호다.
공원 입구의 화장실 지붕에는 두루미 형상의 조형물이 올라가 있다. ‘백로화장실’이란다.
그 옆에는 여기가 ‘새마을운동’의 요람(搖籃)임을 말해주는 돌조각과 안내판이 있다. 과거 새마을 지도자들이 집합 연수를 받던 새마을지도자 연수원 터다. 여기와 농민회관에서 지난 1973년 4월부터 1983년 3월까지, 새마을국민정신교육이 1주일 내외 합숙교육으로 진행됐다.
호숫가로 발을 옮겼다. 정말 아름다운 호수다.
서호로 흘러드는 하천 이름도 서호천(西湖川)이다. 광교산 줄기에서 흘러내려온 서호천은 서호를 지나, 수원 남쪽 일반산업단지 끝에서 황구지천으로 흘러든다.
평일인데도 걷는 사람들이 많다. 간간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호수공원은 꽃과 나무, 조각품과 조형물도 많다. 반대쪽 화장실에도 백로(白鷺)가 보인다. 곳곳에 각종 운동기구가 있어, 이를 이용해 운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공원 반대쪽 끝 나무 정자 옆에는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몇 줄로 뻗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 시원하고 아름다운 숲길에는 ‘우드볼’ 경기장도 있다. 기력이 달리는 어르신들도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종목이다. 나무들 사이로 잔디밭으로 우드볼이 힘차게 굴러간다.
숲 밖으로 ‘꼬리명주나비’ 생태정원(生態庭園)이 보인다.
꼬리명주나비는 나비목(鱗翅目) ‘호랑나비과’의 곤충이다. 봄과 여름에 나타나며, 느리게 날아다닌다. 유충은 쥐방울덩굴 등의 잎을 먹는다. 한국.중국.아무르.연해주 등지에 분포한다.
축만제 주변은 이 나비의 서식지다. 하지만 하천정비 등으로 먹이식물인 쥐방울덩굴이 사라지면서, 위기에 처한 생태자원이다. 2009년부터 서호공원에서 영복여고, 수원지속가능발전협의회, ‘서호를 사랑하는 시민모임’ 및 수원시가 협력, 생물다양성 증진을 위해 노력 중이다.
마침내 축만제 제방(堤防)에 올라섰다.
폭도 제법 넓은 둑길에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많다. 그 양쪽으로 축조 당시 심었던 나무들이 아람드리 고목으로 자라,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제방 왼쪽은 농촌진흥청 시험답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수원역 쪽으로 가면, 시험전(試驗田)도 있다. 이들 전답들은 작물개량시험에 쓰인다. 다양한 품종의 작물을 각기 파종 시기나 경작법을 조금씩 달리해, 시험경작 중이다.
그래서 이 논은 모내기할 때 완전 수작업에 의존, 한 달 넘게 걸린다.
즉 이곳은 ‘통일벼신화’를 창조한, 우리나라 녹색혁명(綠色革命)의 산실이다. 옛 농진청 구내에 가면,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친필 글씨로 세운 ‘녹색혁명성취’ 비석을 볼 수 있다.
농진청은 전주로 이전했지만, 이 곳에 한 부서가 남아 시험 전답을 관리 중이다.
둑길을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에 ‘축만제’라 쓰인 돌비석이 서있다.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다. 좀 더 가면, 수문이 있다. 축만교(祝萬橋) 다리를 통해 수문을 건넌다.
왼쪽 위로 항미정(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이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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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 때 건립된 '항미정'/사진=미디어펜 |
항미정이란 정자 이름은 서호의 아름다움을 중국의 명승지 항주(杭州)에 비유한 것으로, ‘항주의 미목(眉目)’이란 소동파의 시에서 따왔다. 항주의 절경인 서호가 마치 춘추시대 월나라의 ‘경국지색’ 미녀 서시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소동파가 노래한 시구다.
이젠 옛 농진청 담을 따라가는 길이다.
왼쪽 위는 여기산(麗妓山)이다. 능선이 초승달을 엎어놓은 듯 부드럽고 미려한 타원형을 그린 모습이, 수려한 기생 눈썹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항주의 미목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이 산은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인 백로와 재두루미, 왜가리, 황로 등이 서식하는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출입금지다. 넓지 않은 산 전체가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안 나무마다 희귀 철새들의 둥지가 있고, 녀석들의 울음소리와 군무를 감상할 수 있다.
여기산과 서호, 서호천 일대는 희귀철새 외에도 중대백로,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가마우지 등 새들의 낙원이다. 호숫가에는 사람 몸을 숨긴 채 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간이 탐조대(探鳥臺)가 있다.
옛 농진청 옆 수변 길은 봄철에는 벚꽃, 가을엔 단풍으로 장관을 이룬다. 길 양쪽으로 이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었다.
길 끝 부분에서 호수 건너편이 보인다.
반대쪽 둑 밑, 서호천이 흘러 들어오는 길목에는 먹이 활동에 지친 많은 새들이 모여 앉아 쉬고 있다. 징검다리도 있지만 안전 문제로 폐쇄, 이젠 새들의 차지가 됐다.
이제 서호천을 건넌다. 왼쪽은 차들이 다니는 콘크리트 다리, 오른쪽은 사람 전용의 철교다.
‘새싹교’ 다리를 건너 왼쪽 둑길로 서호천을 따라 가는 코스는 서울 남태령고개와 평택 안성천을 잇는 장거리 트레일코스 ‘삼남길’의 일부다. 정면은 서호꽃뫼공원이고, 오른쪽이 서호공원이다. 1호선 화서역이 지척이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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