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서울 도심 남쪽에 솟은 소중한 녹지 공간,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처가 남산(南山)이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남쪽 성곽이 지나고, 정상에는 전국의 봉수들이 집결하는 최종 목적지인 남산봉수대(南山烽燧臺)가 있다.
이 남산은 일제강점기 때는, 침략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일제는 당시 경성(京城)의 얼굴 격인 남산에 조선인을 ‘위압’하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립하고, 침략의 최고 원흉인 메이지 천황과 일본 건국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셨다. 오기신사와, 신궁이 생기기 전에는 당시 식민지 이 땅 최대 신사였던 경성신사도 여기에 있었다.
식민통치의 본산인 통감부(統監府)와 통감관저를 세우고, 일본인 집단거주지를 조성한 곳도 이 곳 남산과 그 아래 명동과 충무로일대였고, 서남쪽 기슭인 용산에는 일본 주둔군사령부가 총칼로 식민지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남산 기슭에는 민족의 영웅 안중근(安重根)의사 동상과 기념관, 그의 글씨들을 새긴 비석들이 있고, 그 아래 백범광장(白凡廣場)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다. 또 2021년 6월 개장한 남산예장공원에는 이회영 선생의 기념관도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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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사진=미디어펜 |
8월 29일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합방조약이 공포된 국치일(國恥日)이다.
그 후 109년이 지난 2019년 국치일, 서울시는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남산 예장동 자락에 약 1.7km 길이의 ‘국치길’ 조성을 완료하고,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들을 함께 걷는 역사탐방 행사를 개최했다.
치욕의 역사도 되새김질해야 하는 역사라는 점에서, ‘암흑(暗黑)의 시대’를 되돌아보는 길을 걷는, 이른바 '다크투어리즘'이다.
국치길은 김익상(金益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한국통감부 터(왜성대 조선총독부 터)에서 시작,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된 한국통감관저 터와 ‘남산 인권숲’, 노기신사 터,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한 일제가 세운 ‘갑오역 기념비’, 경성신사 터를 거쳐 조선신궁 터로 이어진다.
2019년 8월 14일 ‘위안부 기림의 날’에 제막한, ‘서울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도 볼 수 있다.
국치길 보도블록 곳곳에는 길을 형상화하고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한글 자음 ‘ㄱ’자 모양의 로고를 설치했고, 각 역사의 현장에는 ‘ㄱ’자 모양의 스탠드형 안내 사인도 세웠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 날, 남산길을 걸으며, 시대의 시련과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해방(解放)을 일궈 낸,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로 나와, 언덕길을 올라간다. 곧 길 건너편에 남산예장공원(南山藝場公園)이 보인다.
서울 중구 예장동 일대는 조선시대 무예 훈련원(訓練院)의 ‘예장’이 있던 곳이다. ‘무예장’이 줄임말로 예장이 된 것. 이후 일제 강점기,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및 일본인 거주지가 조성됐고, 1961년에는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 건물이 들어섰다.
2021년 6월 9일 남산예장공원이 개장됨으로써, 12년에 걸친 ‘남산 르네상스 사업’에 마침표가 찍혔다. 이 사업은 남산의 생태환경과 전통 역사문화유산(歷史文化遺産)을 복원하고, 경관과 접근성을 개선하는 사업으로, 2009년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한 바 있다.
예장공원은 일제와 군사독재(軍事獨裁)의 아픔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시민들의 쉼터다.
서울시는 남산의 자연경관을 가리고 있던 옛 중앙정보부 및 TBS교통방송 건물을 철거하고, 면적 1만 3000㎡, 서울광장의 2배 규모에 달하는 녹지공원(綠地公園)을 조성했다. 남산의 고유 수종인 소나무 군락을 비롯, 다양한 나무도 식재했다.
공원은 크게 지상과 지하공간으로 조성됐다.
지상은 녹지공원과 명동~남산을 연결하는 진입광장, ‘기억6 메모리얼 홀’ 등이 위치해 있고, 지하에는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기념관과 남산 일대를 달리는 친환경 녹색순환버스 환승센터, 관광버스 주차장(40면)이 조성됐다.
지상공간 ‘샛자락 쉼터’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오솔길’을 돌아, ‘빨간 우체통’ 모양의 기억6 메모리얼 홀로 향한다.
이 곳은 일제강점과 독재정권 인권침해(人權侵害)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 공간이다. 주변에는 재생사업 과정에서 발굴된 일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사 터, 콘크리트 잔해들이 보존돼 있다.
메모리얼 홀 지하엔,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고문실(地下拷問室)을 재현해 놓았다.
예장공원 가운데,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지하 1층에 내려가면, 우당 이회영 기념관이 반겨 맞아준다.
기념관 앞 ‘예장마당’에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주역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학생 3300명을 기리는 의미로, 테라코타가 천정에 매달려 있다.
기념관 안에서는 ‘난 잎으로 칼을 얻다’라는 상설전시가 열리고, 우당 선생의 후손들이 기증한 유물 42점과 우당 6형제의 독립운동 일대기 등이 전시돼 있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선생이 남긴 항일 독립운동기록인 서간도시종기(西間道侍從記) 육필원고도, 그 일부다.
예장공원 지상에서 교량 보행길이 남산 인권숲으로 이어진다. 남산 인권숲은 일제 ‘통감관저터’에 조성한 ‘일본군 위안부(慰安婦) 기억의 터’ 일대를 말한다.
다른 길로는,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 앞에서 대로를 건너 작은 도로를 직진하면,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있다. 그 앞길을 건너면, 서울유스호스텔 입구다. 그 곳이 남산 인권숲이다.
이곳에 1906년 통감관저(統監官邸)가 설치됐으며, 1910~1939년까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특히 1910년 8월 22일, 이 곳에서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합방조약을 체결한,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현장이다.
이 치욕의 자리가 위안부 기억의 터로 변신한 것은, 탁월한 역발상(逆發想)이 아닐 수 없다.
일부러 ‘거꾸로 세워 놓은 동상’이 이를 상징한다. 1936년 세워진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받치고 있던 판석(板石)을 거꾸로 세움으로써,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는 의미를 강조한다.
그 뒤로, 이 곳에 통감관저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그 위에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해 우린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등의 문구와 함께, 위안부 피해자(被害者) 할머니 247명의 명단이 새겨진 조형물들과, 국치길 스탠드형 안내 사인이 서 있다.
벽에는 세계인권선언(世界人權宣言)이 새겨져 있고, 외곽 도로변에는 할머니들을 상징하는 노랑나비들이 흰 장미 위를 날아다닌다.
기억의 터 입구에 우뚝 서서 역사를 직시해 온, 수령 450년의 은행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다시 대한적십자사 앞으로 돌아와, 길 건너편으로 남산을 오른다. 서울예술대학교 드라마센터 앞에 있는, 한국 극작가의 ‘대부’ 동랑 유치진(柳致眞) 선생의 흉상을 보고 가는 게 좋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안쪽에 통감부 터가 있다.
통감부는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폐지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됐다. 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 앞에 신청사가 신축되면서 그 곳으로 옮겨가고, 기존 건물은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쓰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다.
1921년 9월 12일, 의열단(義烈團) 단원 김익상 의사는 당시 총독부 건물에 폭탄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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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기신사터/사진=미디어펜 |
조금 더 가면 리라유치원과 리라초등학교가 나온다. 초등학교 담을 따라 돌아가면,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이 보이는데, 그 안에 노기신사 터가 숨어있다. 노기신사(乃木神社)는 일본 메이지시대 러일전쟁의 영웅이자, 군신(軍神)으로 ‘조작’된 노기 마레스케를 모셨던 곳이다.
지금은 세심(洗心)이란 글귀와 신사에 석물을 봉납했다는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석조, 뒤집힌 채 놓여있는 석등의 일부 같은 석물, 그리고 안내판이 남아있다.
리라초교 맞은편에는 숭의여자대학교가 있고, 그 교정 안에 경성신사(京城神社) 터가 있다.
숭의여대 정문을 들어서 올라가는 언덕길 보도블록에 국치길 금속 표지판이 박혀있다. 교내 예배당 입구에는 1927년 7월 이 여대 설립자인 미국인 선교사(宣敎師)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 박사의 흉상이 있다.
그 뒤 건물 한 구석, 경성신사 터임을 알려주는 안내판 2개와 기둥 주춧돌 1기가 있다.
경성신사는 1898년 10월 한양의 일본 거류민단이 일본 이세신궁의 신체 일부를 가져와,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창건, 1916년 5월 경성신사로 개칭했다. 이후 조선신궁이 완공되기까지 10여 년간, 식민지정권의 국가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인근에는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일본인들이 1899년 건립한 갑오역 기념비가 있는데, 이 기념비에서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를 자주 거행했었다.
다시 남산을 오르는 ‘소파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남산터널 바로 위쯤에 한양공원(漢陽公園) 비석이 있는데, 한양공원 조성을 기념하는 이 비석의 글씨는 고종황제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한양공원은 1910년 개장됐다가, 조선신궁이 세워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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