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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담 아나운서 |
그 길은 항상 자욱했다. 인천공항을 향해 뻗은 영종대교의 한 가운데. 출국을 앞둔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상(心狀) 탓일까. 교량 위 자욱한 안개가 피워내는 정서는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드는 듯한 설렘이기도 한편은 불안이기도 했다.
기분 탓이 아니었던 걸까. 지난 11일 영종대교 상부도로 서울방향 13.9km 지점에서 발생한 106중 추돌사고. 이 사고는 관광버스가 안개 속에서 앞서가는 차량의 후미를 들이받으며 시작됐다. 사고 당시 영종대교 일대는 짙은 안개로 인해 운전자들이 시야를 확보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06이라는 숫자가 주는 중압감이 아니더라도 연초부터 발생한 사고는 이미 지난 해 수많은 재난을 겪은 국민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이른바 ‘후진국형 재난’이 또 다시 발생한 것이다.
후진국형 재난은 무엇인가. 안전 불감증(정확히는 ‘위험 불감증’이라고 해야 옳다), 시설의 미비, 도덕적 해이와 미흡한 대처 등을 동반하는 이 여섯 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진국과 선진국을 가르는 그 경계부터 마땅히 논해야 할 것이다. 저급한 안전의식도 부족한 대처능력도 결국엔 한 국민의 민도(民度)를 드러내는 ‘국민성’인 바, 그 경계점도 한 국가가 지닌 국민성에서 찾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안전 불감증, 시설의 미비, 도덕적 해이와 미흡한 대처 등은 모두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임에 틀림없으나 재난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못한다. 후진국형 재난을 야기하는 데에는 사회안전망의 부재보다 더욱 고질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자기 역할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의 부재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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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엉켜 있는 106중 추돌사고 사고차량들 /사진=뉴시스 |
나라 전체를 잠식한 세월호의 침몰. 이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메마른 장작들이 놓여 있는 한 가운데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불을 당겼다. 선장으로서의 역할과 책무의 망각, 철학과 자부심의 부재는 불쏘시개가 되어 도처에 놓인 수많은 장작들을 맹렬히 집어 삼켰다. 마른 섶에 당겨진 불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여전히 논박이 진행 중인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은 어떤가. 독선(獨善)으로 항공기의 항로 변경을 지시한 조현아 전 부사장의 행동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항공기의 ‘키’를 잡고 있던 기장의 역할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출항한 배의 선장과 마찬가지로 기장은 항로에 선 시점부터 기내의 모든 상황을 통제할 권한을 지닌다. 또한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 곧 기장으로서의 책무가 있다. 항공보안법은 기장에게 탑승 중인 모든 승무원과 승객, 화물의 안전을 지킬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승객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기장의 권한으로 리턴을 결정한 것은 자신의 직업적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경계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책임감과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에 있다. 분신(奮迅)하는 재난. 그 맹렬한 화기를 만드는 수많은 장작들은 충분히 위협적이나 결코 스스로 분신(焚身)하지 못하는 탓이다.
마른 섶에 불을 놓는 것은 결국 한 명의 인간이 되곤 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을 가져야, 그리고 그것이 곧 이 나라의 국민성이 되어야 후진국형 재난의 발생을 막을 수 있다.
재난의 발생 이후 국민에게 주어지는 역할과 책무도 마찬가지다. 국민이란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을 의미한다. 발생한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처에 미흡한 점이 매우 많았을 지라도, 정부에 대한 비판 시위 현장에 가기 위해 벨트를 매지 않고 과속을 하는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소담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