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충청북도 제천(堤川)시의 지명은 이 고장 대표 역사유적인 의림지에서 비롯된 것을 보인다. 큰 둑(제방)이 있는 내’란 뜻이기 때문. 제천의 옛 이름인 ‘내토’와 ‘내재’도 같은 어원이다.
제천지역은 한반도의 중간 부분에 위치하다 보니,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쟁탈전이 이어졌다.
4세기 초에는 백제의 영토였고, 5세기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 영토로 편입된 이후에는 내토군(奈吐郡), 순우리말로 ‘냇둑’이 됐다. 그러다 진흥왕 때 신라 영토에 포함된 이후, 경덕왕 때 내토군은 내제군(奈堤郡)으로 바뀌었다.
다시 고려 때인 940년에 제주군(堤州郡)으로 개칭됐다가, 조선시대 들어 1413년 전국의 ‘주’자가 들어간 고을 이름 상당수를 ‘천’이나 ‘산’으로 개명하면서, 비로소 ‘제천’이라 했다.
모두 의림지와 관련 있는 지명들이다.
의림지(義林池)는 빠르면 삼한, 늦어도 삼국시대에 축조된,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수리시설 중 하나다. 김제 벽골제(碧骨堤), 밀양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대표적인 고대 인공 저수지로, 국사교과서에 소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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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 의림지/사진=미디어펜 |
벽골제와 수산제는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둑을 쌓아 가뒀다는 데서 ‘제’라고 하고, 의림지는 연못 바닥에서도 샘물이 솟고 있으므로 ‘지’라고 명명, 구분했다고...
축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진흥왕 때 가야(伽倻) 출신 악사인 우륵이 은퇴 후 이 곳에 살면서 쌓았다는 설과, 조선시대 이 고을 현감인 박의림이 축조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하지만 지명 분석에 근거, 삼한~삼국시대 초기 조성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 둑을 의림제(義林堤)라 하고, 정인지에 의해 2차례 수리됐다.
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의림지가 최소한 삼국시대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확인됐다.
제방 길이 320m에 둘레 약 1.8km, 수심은 최대 13m에 달한다. 저수면적보다 관개면적이 상대적으로 넓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효율적인 관개시설이란 평을 받고 있다.
제방은 흙으로 쌓았는데, 하부에서 발견된 부엽공법(敷葉工法)과, 물이 새거나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한 기술 등은, 고도로 발달한 토목기술의 결정체다. 부엽공법이란, 연약한 지반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흙 사이에 나뭇잎과 풀 등을 번갈아 쌓아 올리는, 고대 건축공법이다.
둑 위에는 소나무 군락과 버드나무 숲이 빼어난 경치를 자랑, 예로부터 제림(堤林)이라 불렸으며, 정자와 누각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의림지와 제림은 조선후기 화가 이방운(李昉運)이 그린 ‘사군강산삼선수석’에 나오는 명승지 8곳 중 하나로, 전통적인 경관지다. 대한민국 정부도 이 곳을 ‘명승(名勝) 제20호’로 지정했다.
전설로는, 거북바위를 돌려놓아 부잣집이 몰락했다는 이야기와, 탁발승을 홀대해 부잣집이 망하고 그 자리에 호수가 생겨났다는 설이 전해진다. 또 큰 ‘이무기’가 사람이나 가축을 해쳤는데, 어씨 오형제가 이 놈을 잡아 안심하고 살게 됐다는 어장사참사기(魚壯士斬蛇歌)도 있다.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湖西地方)라는 지명도 ‘호수의 서쪽’이란 뜻으로, 의림지가 기준이다. 호수의 남쪽인 ‘호남’도 마찬가지다.
백두대간의 한 복판 내륙산간 분지인 제천에서 오래전부터 벼농사가 성했던 것은, 이 의림지가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관개문화유산(灌漑文化遺産)으로 지역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으며, 지금도 의림지 아래 넓은 들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호수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 발길을 옮긴다.
의림지를 상징하듯, 공원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사람은 데크길로 통행한다. 그 중간에 ‘무자위’라는, 농경지에 물을 퍼 올리는 농기구가 복원돼 있다. 수차(水車) 또는 답차(踏車)라고도 하는, 인력으로 바퀴를 밟아 돌리면서 날개로 물을 퍼 올리는 것이다.
그 위 의림지 역사박물관 관람은 조금 미루고, 호수를 향해 걷는다.
의림지가 워낙 많은 관광객이 찾는 탓인지, 차량이 오가는 도로 오른쪽에 ‘의림지 파크랜드’의 각종 놀이기구들과, 놀이동산의 우주전투기, ‘디스코팡팡’, 회전목마(回轉木馬) 등도 보인다.
드디어 호수 변 둘레길에 들어섰다.
제천시 캐릭터인 ‘박달신선’과 ‘금봉선녀’가 반겨 맞는다. 조선 중엽 경상도 청년 박달도령과 충청도 처녀 금봉낭자의 러브스토리가 전해지는, 대중가요로 유명한 ‘울고 넘는 박달재’의 고향 천등산(天登山)이 바로 제천에 있다.
두 남녀의 사랑은 현세에선 이루지 못했지만, 박달은 신선(神仙), 금봉은 선녀(仙女)가 됐다.
그 옆에는 ‘제천 10경’ 중 제1경인 의림지를 대표하는 물의 요정(妖精) ‘방울이’ 캐릭터가 활짝 웃는다. 방울이의 역동적인 이미지는 의림지의 발전성과 흥겨움을 나타내고, 물방울 모양의 푸른색 캐릭터는 가시성을 높여준다.
호숫가를 따라 걷는다.
오른쪽으로 또 다른 작은 호수가 있다. 건너편으로 데크길이 이어져있다. 가운데는 분수도 있는데, 지금은 조용하다.
한옥 ‘맞배지붕’의 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데크다리가 있고, 그 왼쪽에 유리전망대(琉璃展望臺)가 붙어있다. 호수의 수문에서 물이 떨어지는 ‘용추폭포’를 건너는, 투명 유리다리다.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푸른 숲 사이로 흘러 내려가는 거센 물살을 감상할 수 있다.
용추폭포는 예로부터 ‘용터지기’로 불렸다.
하류에서 올라온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昇天)하지 못하고, 이 곳에서 터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실제 수문을 열면, 물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용의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용추폭포라고 한다는 것.
건너편에는 사각형 정자인 홍류정(紅流亭)이 날아갈 듯하다. 조선 후기 문인 김이만의 시 ‘홍류정’과 ‘무릉교’를 적은 나무판이 걸려있다.
작은 호수 데크길을 따라간다.
인공 바위굴이 보인다. 호수 쪽으로 창이 뚫려 있어, 이색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곳으로, 사진촬영 명소로 최근 전국적으로 ‘핫플레이스’가 됐다고 한다. 데크길에는 제천문인협회(堤川文人協會) 회원들의 시 작품이 줄줄이 걸려있다.
작은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유리전망대 앞으로 왔다. 그 왼쪽에 낮은 언덕이 있는데, 후선각(候仙閣) 터란다. 조선 중엽 밀양군수 김봉지가 세웠다는데, 지금은 석축만 남았다.
하지만 그 바로 옆에는, 2층 누각 경호루(鏡湖樓)가 당당하게 서있다.
제천시 향토문화자료 제23호인 경호루는 1948년 당시 제천군수 김득연, 경찰서장 김경술의 발의로, 투자를 받아 세웠다. 영호정과 더불어, 의림지를 찾는 이들의 대표적 휴식처다.
그 너머는 제방이 이어진다.
‘의림지’라 새긴 대형 돌비석에는 ‘농경문화(農耕文化)의 발상지’라는 문구도 새겨졌다. 건너편 호숫가엔 현판도 단청도 없는, 그러나 담백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사각형 정자가 있다.
둑길에는 제림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즐비하고, 수려한 경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 한쪽 구석엔, 애국지사 이범우(李範雨) 선생 추모비도 보인다.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이 선생은, 제천 출신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서울에서 태극기 10장을 얻어 귀향해 동지들을 규합, 4월 17일 장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시위행진을 주도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연행돼, 10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제방을 지나 호숫가를 좀 걸으면, 영호정(暎湖亭)이 나타난다.
영호정은 조선 순조 7년 이집경(李集慶)이 건립한 것으로,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가 1954년 후손인 이범우 선생이 중건했다. 특히 구한말 의병장 이강년(李康年) 선생이 제천 천남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 곳에서 부하장수들과 후사를 논의했다.
제천은 한말 의병활동의 중심지로, 많은 의병장들이 본거지로 삼은 탓에, 일제에 의해 고장이 초토화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제천의 의병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시작된 ‘을미의병’과 군대해산 이후의 ‘정미의병’이며, 유인석(柳麟錫) 선생과 이강년 선생 등이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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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륵정. 가야 출신 악사 우륵이 인근에 살면서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설이 전해진다./사진=미디어펜 |
이제 역사박물관 반대쪽으로 왔다. ‘우륵정’ 사각정자가 보인다.
대표적 전통현악기인 ‘가야금’의 창시자인 우륵 선생은 은퇴 후, 제천 ‘돌봉재’에서 살았다고 한다. ‘우륵당’ 옛 집터와 우물로 사용했던 ‘우륵정’이 있었고, 의림지 호반에서 가야금을 자주 탔다고 전해진다.
이에 제천시가 2007년 ‘의림지 명소화 사업’으로, 이 곳에 우륵정(于勒亭)을 건립했다.
그 너머에는 넓은 너럭바위, 그리고 호수 바로 옆 바위가 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탄 장소라는 우륵대(于勒臺)로, 이 대의 저수지 안쪽에는 이석조가 쓴 연암(燕巖. 제비바위) 각서가 있다.
호수 변을 계속 걸었다.
의림지 가운데 작은 섬이 하나 있다. 호수에 통상 있는 섬인가 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의림지 확장.준설공사 당시, 뜻밖에 생긴 곳이었다. 동원된 인부들이 가난으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힘이 없어서, 미처 옮기지 못한 준설토(浚渫土)가 쌓여 생긴 섬이라고 한다.
일제의 식량 수탈은 내륙 한가운데인 여기, 제천도 그냥두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덧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의림지 역사박물관(歷史博物館) 앞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그 문을 열고 들어선다.
박물관은 제천의 신석기 유적지인 ‘점말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에서 시작, 의림지 일대를 둘러싸고 장구하게 이어져 온 농경문화의 흔적과 유산들을 보여준다. 옛 ‘제천농지개량조합’과 ‘농업기반공사’, 그리고 ‘한국농촌공사’ 현판들과 관개작업에 사용하던 농기구들도 보인다.
충주호를 제천 사람들이 부르는 다른 명칭인, 청풍호(淸風湖) 수몰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도 함께 전시돼 있다.
의림지는 이 고장 제천의 뿌리이자 산 역사이다. 청풍호와 호수의 규모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한반도 농경문화의 고향’이라는 점에서의 무게감은 훨씬 크고, 깊고 무겁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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