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서울 강남 한 복판, 빌딩 숲 속 ‘오아시스’ 같은 삼릉공원 안에는 조선 제9대 성종과 제2계비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宣陵), 그의 아들 중종의 능 정릉(靖陵)이 있다. 이 둘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부른다.
사적 제199호 선정릉은 당당한 ‘유네스코 문화세계유산’ 조선왕릉의 하나다.
성종(成宗)은 1457년 의경세자(뒷날 덕종으로 추존)와 소혜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도 못되어 의경세자가 죽는 바람에, 할아버지인 세조(世祖)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세조는 일찍이 손자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총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세조 14년(1468)에 자을산군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11월 숙부인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그 후 7년 동안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았다.
세조의 ‘안목’대로, 성종은 치세에 능한 왕이었다. 성종은 권신과 사림세력을 균형 있게 기용, 국가권력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유교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기초를 완성함으로써,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또한 정책적으로 편찬사업을 육성, 세조 때 시작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이 1485년 완성됐고, ‘국조오례의’,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악학궤범’ 등이 간행됐다.
성종과 같이 묻힌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는 정비였던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연산군의 생모)에 이은 성종의 3번째 부인이자, 중종의 생모다. 우의정 윤호의 딸로 성종 4년(1473) 숙의에 봉해졌고, 1479년 윤씨가 폐비되면서 이듬해 왕비에 책봉됐다.
이후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대비의 자격으로 친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승인, 연산군을 폐위시켰다.
성종 19년(1488)에 태어난 중종은 정현왕후 윤씨 소생으로, 성종의 차남이다. 성종 25년(1494)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가,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오른다.
중종은 신진 사림파(士林派)들을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권력의 균형을 이루면서 새로운 왕도정치와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등의 옥사로 이어지는 ‘정쟁’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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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릉입구 홍살문과 정자각/사진=미디어펜 |
지하철 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로 나온 후, 왼쪽 골목길로 직진하면, 정면에 선정릉 입구 매표소가 보인다.
여느 조선왕릉에 다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世界遺産) 돌비석과 안내판 앞에, 선정릉의 전체 형태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동판이 눈길을 끈다.
동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종 부부가 묻힌 선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같은 능원 안에 있으나 언덕은 달리하는, 이른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반면 중종의 정릉은 봉분이 하나인 단릉(單陵)이다.
선정릉 입구를 들어서 서북쪽으로 보이는 것이 성종의 무덤이고, 정현왕후의 능은 건너편 동북쪽의 숲 속에 있다. 꽤 멀찍이 떨어진 두 능침 사이는 울창한 숲과 산책로가 조성됐다.
매표소 왼쪽 산책로를 따라 재실(齋室)을 지나면, 관리사무소를 겸한 ‘선정릉역사문화관’이 있고, 그 왼쪽에는 수령 500년을 훌쩍 넘는 은행나무 거목이 보인다. 선정릉의 수호수(守護樹) 같은 노거수다.
이어 선릉의 입구, 홍살문이 나타난다.
능을 향해 올라가다보면, 능역과 부속건물의 배치가 여느 능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분으로 오르는 경사진 언덕 전면(사초지) 중앙에 있어야 할 정자각(丁字閣)이 오른쪽 측면에 놓였는데, 이것은 동원이강릉 구조 때문이다.
정자각을 두 개의 능침 앞에 하나씩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있기 때문에, 봉분 및 사초지와 정자각이 일직선에 놓이는 일반적인 왕릉배치와는 다른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
성종의 능은 불쑥 솟은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어, 정자각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다른 능도 마찬가지다. 멀리서는 봉분이 보이지만 가까이 접근할수록 안 보이는 방식을 채택, 우러러보게 하고 왕릉의 위엄을 더하기 위한 목적이다.
세조와 예종의 능에도 없는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된 것이 이례적이다.
성종릉 오른쪽 언덕에 있는 정현왕후 윤씨 능은 옆으로 올라,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두르고 봉분도 비교적 낮아, 조촐한 모습이다.
선릉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파헤치는 수난을 당하면서, 시신이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소나무 숲길을 넘어가면, 친아들이 묻힌 정릉이 보인다.
원래 중종은 1544년 승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에 안장됐으나, 사후에 왕과 함께 묻히길 희망한 문정왕후에 의해 명종 17년(1562) 현 위치로 옮겨졌다. 그러나 장마 때면 물이 차오르는 등 풍수상의 결함으로, 결국 노원구에 있는 ‘태릉’에 따로 묻히고 말았다.
즉 정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릉(合葬陵)도 아닌, 중종만 묻힌 ‘홀아비’ 능이다. 다만 홍살문과 정자각, 봉분은 일직선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정릉 입구를 나와 왼쪽 담을 따라 올라가면, 대로가 나온다. 우회전해 도로를 따라가니, 지하철 9호선 삼성중앙역이다. 이 사거리를 대각선을 건너 좀 더 가면, ‘봉은공원’과 봉은사다.
봉은사(奉恩寺)는 강북 조계사와 함께, 대표적인 서울 도심의 대사찰로 쌍벽을 이룬다.
사실 봉은사는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다. 이웃 경기고등학교와 사이에 있는 언덕, 수도산(修道山)에 자리한다. 봉은사 일대 1만8000여 평이 사찰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이 절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때인 794년(원성왕 10)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처음 창건, 견성사(見性寺)라 했다.
1498년(연산군 4)에 정현왕후가 선릉의 원찰(願刹)로 삼아, 능의 동편에 있던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라고 개칭했으며, 1501년 절에 왕패(王牌)를 하사했다.
특히 1551년(명종 6) 봉은사를 ‘선종’의 수사찰(首寺刹)로, 보우(普雨)를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도량이 되게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됐다가, 1637년(인조 15)에 경림.벽암스님이 중건한 후, 조선왕실의 주도로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다. 일제강점기 ‘31본산시대’때는 경성(지금의 서울) 일원을 관장하는 본산(本山)이 됐다.
대로변에 일주문이, 그 안쪽에 ‘진여문’이 각각 서있다.
진여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위로 즐비한 부도(浮屠)와 고승의 비석들이 이 절의 내력을 말해준다. 중앙에는 보우대사의 ‘봉은탑’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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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은사 대웅전과 3층 석탑, 석등/사진=미디어펜 |
이어 웅장한 대웅전(大雄殿)이 불자와 길손들을 맞는다. 대웅전 편액은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글씨다. 그 앞에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날렵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봉은사에는 목 사천왕상(四天王像), ‘홍무25년 장흥사명 동종’, ‘목 삼불상’ 및 ‘대웅전 불화’들이 있다. 모두 서울시 유형문화재들이다.
다른 절에는 없는 독특한 건물인 판전에도, 서울시 유형문화재들이 있다. ‘판전 현판’,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목판’ 및 ‘판전 신중도 및 비로자나불화’ 등이 그것이다.
판전 내에는 화엄경소를 비롯한 많은 목판본(木板本)들이 보관돼 있다. 총 16부 1480매에 달한다. 그래서 판전이다.
판전(板殿) 현판은 추사 선생이 죽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소박하면서도 힘과 기상이 넘치는 글씨다. 판전 옆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 기적비’가 있다. 노지에서 눈비를 맞아야 하지만, 바로 옆 비각 안에 들어가 있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영세불망비’보다 더 눈길이 간다.
필자는 절집 맨 뒤, 경기고와의 경계인 언덕을 따라 반원형으로 사찰을 빙 둘러싼 산책길인, ‘봉은사 명상길’을 강력히 추천한다.
특히 검은 대나무, 즉 오죽(烏竹)이 길 양쪽에 늘어선 구간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옛 성터 같은 느낌이 드는 곳도 보인다. 이곳 수도산에는 옛 한성백제(漢城百濟) 때 도성 외곽 방어시설이던 ‘삼성리’ 혹은 ‘삼성동’ 산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강남개발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봉은사역과 청담역 사이 고갯마루에, 표석 하나만 외롭게 남았다.
마지막으로 한 곳, 더 들를 데가 있다. 바로 도산공원(島山公園)이다.
강남구 신사동 649-9번지에 있는 도산공원은 1973년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조성된 공원이다. 도산 선생과 부인 이혜련 여사의 묘소, 동상, ‘도산안창호기념관’, 말씀을 새긴 비석들, 체육시설 등이 있다.
매년 3월 10일, 선생이 만든 흥사단(興士團)과 도산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추모행사가 열린다.
공원 입구에서 중앙통로를 따라 직진하면, 맨 안쪽에 선생과 부인을 합장한 묘소가 있다. 공원이 생기면서,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에 있던 선생과 미국 소재 부인의 유해를 옮겨왔다.
묘소 동쪽으로 선생의 동상이 우뚝하고, 동상을 중심으로 산책로가 둥글게 나 있다. 곳곳에 선생의 말씀을 새긴 비석들이 보인다.
공원 입구 바로 옆은 도산안창호기념관이다.
기념관에는 사진 71점, 선생이 미국에 있을 때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부터 받은 서한 등 편지 19점, 흥사단에서 활동할 때 작성한 문서 48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사료집, 도산일기 등이 전시돼 있으며, 도산어록과 연보·사진은 터치스크린으로도 볼 수 있다.
입구에는 태극기 아래 선생의 대형 사진이 걸려있고, 그 앞 벤치에 선생이 앉아 계시다. 정중히 인사를 드린 후, 잠시 옆에 앉아본다.
이렇게 선정릉~봉은사~도산공원을 이어 걸으며, 서울 강남(江南) 한복판에서 역사를 찾았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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