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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형 서울시립대 교수 |
우수, 경칩이 있지만 아무래도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제대로 펴는 절기는 춘분인 듯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축제의 계절이 이어질 것이다. 스멀스멀 땅속에서 피어오르는 봄기운을 오감으로 느끼는 첫머리, 남녘의 여기저기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손짓하고 있다.
올해는 마침 지난 토요일이 춘분이었는데, ‘섬진강 매화축제’가 한참이라고 하여 주말 동안 그곳을 취재하기로 하였다. 축제 관련 프로젝트 팀원들과 함께 간다는 데는 진작 의기투합하였으나, 신학기에 다들 바쁜지라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떠나기 전부터 순조롭지 않았던 이번 취재여행은 좌충우돌 전말기가 되고 말았다. 오늘은 그 과정을 소개하면서 지역문화와 축제의 관계, 그리고 문화예술이 그 가운데서 할 수 있고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기로 한다.
말했듯이, 이번 여행은 계획단계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준비를 담당한 팀원이 여느 때처럼 인터넷 검색을 시작하였는데, 정확한 축제일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모 지식검색 사이트에 올라 있는 질문들은 이러했다. “하동군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도 공식적인 매화축제는 없는데, 하동군 어디로 가면 매화를 구경할 수 있나요?” “광양, 하동 두 군데 다 어려우면 구례라도 갈까 생각중인데, 산수유축제는 어떤가요?”
어디 가서 무엇을 볼까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 나오는 어이없는 질문들이다. 매화축제가 열리는 매화마을이 전라남도 광양군에 속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엉뚱한 곳을 검색하며 헤매는 경우도 생기고, 이쪽저쪽 헤매다 포기하고 아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도 생긴다. (산수유축제와 매화축제 둘을 한꺼번에 보는 관광코스도 있다.) 이런 형편이라서, 어디서 뭘 먹고 어디에 묵을까 하는 계획을 미리 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왕이면 노래 <화개장터>로도 잘 알려진 하동군 화개면에서 숙박하기로 했다.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자연스레 섞여서 들리는 풍경은 조영남의 노래 내용대로 인상적이었다. 문화적 다양성의 토대는 충분히 갖춘 셈이었다. 그렇기에 일찍이 경상도에서 전라도의 판소리 문화를 받아들인 지역이 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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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 매화축제 |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화개장터는 그렇고 그런 시골장터로 전락해 있었다. 어떤 볼거리도 없이 바가지 씌우는 상혼은 숙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유스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 등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숙박시설들도 필요하거니와, 시골의 모텔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비즈니스급 호텔만큼 숙박요금을 받는 횡포가 여전하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섬진강 건너편으로 ‘매화축제’의 현장인 광양 매화마을을 찾아갔다. 이른봄 유독 사랑받는 꽃, 매화. 옛 선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품고서 ‘탐매(探梅)’의 길을 나섰던 것이다. 지리산에 안겨서 소박하게 흐르는 섬진강, 그 줄기를 따라 피어난 매화들. 골짜기에 한 그루만 있어도 향기가 가득해진다는 매화 아니던가. 한 그루 한 그루는 절제의 미를 갖추었으되, 군무를 추듯 흐드러진 모습들은 이미 관능의 미를 풍기고 있었다.
세한삼우(歲寒三友) 가운데서도 매화가 유독 주목받은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아직 찬바람 불고 녹지 않은 눈길을 밟으며 선비들이 탐매의 길을 나선 이유가 단지 꽃과 향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기만 했다면 다다익선이었겠으나, 선비들은 매화를 귀하게 여겼다. 온 골짜기를 찾아 헤맨 끝에 겨우 한 그루를 발견하고, 그 아래에서 시를 읊으며 풍류와 아취를 즐겼던 것이다. “오동은 천 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네.”라고 한 신흠의 뜻을 따라가노라면, 성찰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오늘날 우리도 전국 각지의 유명한 매화나무가 있는 곳으로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판 탐매문화로 불러도 좋을까. 지천으로 널린 매화이다 보니 사람들은 귀한 줄 모르고 사진 몇 장 찍은 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정신을 쫓지 않은 채 그 꽃과 향기도 일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소비될 뿐인 것이 오늘날의 사정이다.
배나무, 복숭아나무 같은 유실수들은 그 열매와 꽃에 대한 관심이 동시에 있었지만 매화나무는 단연 꽃에 대한 관심이었다. 나무의 이름부터 열매가 아니라 꽃을 달고 있지 않는가. 매화는 매화인 것이다. 그러니 매실 수확용 매화나무 감상 이외에 역사와 기품을 지닌 고매(古梅)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고즈넉한 산사에 홀로 피어 더 빛을 발하는 매화. 순천 금둔사(金芚寺)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이르면 음력 섣달 말부터 납월매(臘月梅)가 핀다. 눈을 뚫고 피어난다는 이른바 설중매(雪中梅)가 그것이다. ‘꽃 절’로 이름난 순천 선암사(仙巖寺)에는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된 선암매(仙巖梅)가 있고, 영산제 등 불교의식 위주의 작은 축제도 열린다.
광양 매화마을의 매화축제(?)는 우리가 기대한 축제가 아니었다. 한 주 전인 3월 14일에 광양시내에서 단 일회로 끝난 행사를 제외하고는 전문적이고 수준있게 기획된 프로그램이 없었다.
팔도에서 모여 이런 류의 행사만 따라다닌다는 상인들이 주공간을 점령하고 먹거리장터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대다수의 주민들은 참여하지 않은 채 방관하거나, 이에 질세라 성수기 휴가철에나 만날 것 같은 바가지 상혼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마디로 축제다운 축제가 부재하다 보니 제대로 된 주민들의 참여 또한 부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축제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엇보다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을 잘 기획할 필요가 있다. 어떤 지역의 문화와 그 지역의 구성원들은 상호규정적인 관계를 이루는 바, 주민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지역문화가 형성되어 나가지만 이미 형성된 지역문화는 그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작용한다. 이런 정체성의 확보에는 ‘스토리’가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다. 문화라는 말 속에 이미 내장된 ‘히스토리’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엮고 현재적 맥락으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도 그러하다. 잘 기획된 바람직한 축제란 바로 이러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주민들의 능동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프로그램을 가진 축제이다.
사실 ‘매화 이야기’만큼 풍부한 콘텐츠를 지닌 스토리는 흔치 않다. 18세기의 시인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가 노래한바 “매화는 꽃송이 하나하나가 각각의 우주를 담고 있다.”라는 구절은 화두에 가깝다. 뿐이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매화를 노래했던 퇴계 이황, 그림값 받아 매화 사는 데 탕진했던 김홍도. 그리고 19세기 중후반 가곡 예술의 마지막 보루였던 운애산방(雲崖山房)의 풍류는 <매화사(梅花詞)> 여덟 수에서 절정을 맞이한 바 있다.
눈으로 期約(기약)터니 네 果然(과연) 퓌엿고나
黃昏(황혼)에 달이 오니 그림자도 셩긔거다
淸香(쳥향)이 盞(잔)에 ᄯᅥᆺ스니 醉(취)코 놀녀 허노라
지리산과 섬진강이 지닌 인문지리적 성격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한반도 남쪽의 3개 도를 아우르는 공간, 예부터 전해오는 탈속적인 이야기에 현대사의 갈등과 화합의 아이콘이 모두 여기에 있지 않은가. 매화가 지닌 문화적 맥락, 이 지역이 지닌 역사성 등을 재료로 삼은 스토리텔링의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스토리텔링을 통하여 프로그램에 주제를 부여하고 성공적인 행사로 발전시킨 사례를 보며 오늘의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분천역(汾川驛) 축제의 경우이다. 분천역이 소재한 봉화는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남은 청정지역 중 하나인 북부경북 지역에 속하여 ‘강원남도’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의 축제는 천혜(?)의 자연 덕분에 어떤 의미를 담은 주제보다는 그 자연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분천역 축제의 경우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는지 점검해보자. (겨울 동안 열리는 축제는 눈이 대세이고, 빛을 내세우는 경우들도 있다.)
“67가구 경북 산골마을의 기적”이라 알려진 이 사례는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수 있다. 첫째, 분천역은 하루에 10명도 찾지 않아 폐쇄 위기에 몰렸으나 코레일의 ‘역발상 경영’에 따라 관광열차를 투입하자 하루 1500명이 북적댄다는 것. 둘째, 오지마을에 스토리를 입힘으로써 2년간 열차 수익만 78억 원을 올렸을 뿐더러 지역주민들도 함박웃음을 짓게 되었다는 것. 특히 둘째의 경우, 낙동강이 시작되는 천혜의 자연환경에 ‘산타마을’이라는 스토리를 입힌 역발상의 결과라는 것.
산타마을이라니, 살짝 뜬금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천리는 분천역이 스위스관광청, 레일유럽 등과 협약을 맺은 덕분에 ‘한국의 체르마트(Zermatt, 마터호른 인근)’로 변신한 바 있다. 체르마트 명패 옆의 줄을 당기면 황금색 종이 맑은 음을 내며 마치 스위스에 온 듯한 느낌도 준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이것이다. 억지춘양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은 이 스토리는 코레일, 봉화군, 지역주민들이 협의하여 만들었는데 결과가 놀랍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2개월간 분천역 산타마을을 조성하자 하루 평균 2000명 가량이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곧 기존의 스토리를 활용하여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스토리에 동참하면서 잠시 현실원리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치유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베네치아의 가면축제만이 아니라 유럽의 축제들은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담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이웃 일본의 마츠리들도 신에게 제사지낸다는 제의의 원래 의미를 살리면서 ‘허구에의 동참’이 가능하도록 심리적 기제를 제공해준다.
우리가 축제 하면 떠올리는 낭만적인 느낌이란 기실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지역문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탈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스토리, 그리고 그것을 즐기면서 메시지도 전달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잘 조직화하는 기획. 이 두 가지가 절실했던 춘분 나들이였다. /조세형 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