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57)- 휴머니스트의 르네상스 찬가
레오나르도 브루니(1370~1444)의 <피렌체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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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세계 최고의 문화예술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꽃이었다. 안정된 정치체제, 번성한 상업을 바탕으로 최고의 문화 강소국으로 부상한 피렌체는 당대 세계인의 찬탄을 받았다. 메디치 가문의 문화 애호 정책은 이탈리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천재적 예술가들을 배출하게 한 토양이 되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문화를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게 한 그 진원지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한 가운데서 활약했던 레오나르도 브루니(1370~1444)는 자신의 조국 피렌체의 이러한 위대함을 노래했다. 그가 경탄하는 피렌체 공화국의 탁월성은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건축물의 화려함이나 교회의 아름다운 장식들, 쾌적한 도시 공간과 같은 외양보다 그는 공화정체의 우수성, 시민들의 공화적 덕성에 대해 더 뜨거운 찬사를 보내고 있다.
브루니는 피렌체의 자연 환경적 우수성, 선조들의 유래를 살피고, 이탈리아 최고의 도시가 되게 만든 도시의 덕성과 정치제도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있다. 피렌체는 산악 지대와 평원 지대 모두에 걸쳐있고, 아드리아 해와 남부 지중해에서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 해안 도시의 위험성을 피할 수 있는 지정학적으로 탁월한 위치에 있다. 날씨도 쾌적하고 깨끗한 기후대에 속해 있다.
피렌체 번영의 핵심 동인은 자유정신에 기초한 휴머니즘이었다. 브루니는 자유와 평등의 관념에 기초하여 민주주의를 창안했던 고대 그리스 정치체제의 탁월성에 주목했다. 그가 아테네의 웅변가 아리스테네스가 쓴 <아테네 찬가>를 본떠 <피렌체 찬가>를 쓴 이유도 이와 관련된다.
브루니는 시민의 동등한 참여가 보장된 자유로운 정치체제의 가치를 간파했다. 작은 도시국가였던 아테네가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굴종을 거부한 아테네인들의 자유정신과 민주정체의 힘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페르시아 전쟁은 곧 민주정과 전제정의 체제 대결이었던 것으로 본 것이다. 브루니는 14~15세기의 전제군주가 다스리던 밀라노와 공화정을 채택한 피렌체의 정치적, 군사적 대결 구도를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투쟁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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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 정치의 중심지였던 베키오 궁전과 그 앞의 넵튠 분수대 ⓒ박경귀 |
나아가 브루니는 피렌체 시민들이 공화정체를 통해 번영을 구가한 로마인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부하고 있다. 피렌체가 그리스 민주정의 가치를 계승한 로마 공화정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피렌체 인들이 탁월했던 고대 문명의 적자(嫡子)라는 인식은 피렌체가 전제군주제를 거부하고 공화주의에 헌신적으로 전념하게 만든 토대라고 볼 수 있다.
피렌체는 로마 공화정의 우수성에 주목했을 뿐 잔혹했던 황제정은 닮으려 하지 않았다. 브루니가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나 티베리우스의 폭정을 비판하는 것도 피렌체 공화정의 존엄함과 대비하기 위해서다. 브루니는 피렌체의 융성은 아테네 민주정의 탁월성과 로마 공화정의 덕성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피렌체 공화정체의 우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가 피렌체의 정치와 문화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자부심은 이런 연원에서 나온 것이다.
피렌체는 어떻게 이탈리아 최고의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 시민의 근면성과 우수성이 시민 공동체의 영광을 만들었다고 브루니는 말한다. 피렌체 “시민들의 종교적 경건함, 경제력, 동료 시민에 대한 애정, 시민들의 업적”에서 타 도시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브루니는 또 피렌체가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 중 이탈리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매우 헌신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맹국들과의 협정과 약속을 반드시 지켜 신뢰를 얻었고 동맹국이 외침이나 곤경에 처했을 때 흔쾌히 구원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했었음을 강조한다.
브루니는 1312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침공이나, 밀라노의 비스콘테 공작의 군사적 압박과 침략을 막아낸 피렌체군의 용맹성도 극구 칭송한다. 브루니의 글에서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이 경제적, 군사적 패권을 다투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브루니는 피렌체가 자유 수호를 위해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용맹함으로 이탈리아의 평화 수호에 기여했다고 역설한다. 그는 밀라노 공국의 전제정에 맞섰던 것을 피렌체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민주정의 아테네가 전제정의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그리스 세계를 구해 낸 방파제 역할을 했든, 피렌체 역시 이탈리아의 자유 공화국들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피렌체가 강력한 공화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군사력과 공화주의에 입각한 체계적인 정치 및 행정제도의 운용에 있었던 것이다. 9명으로 구성된 최고위원회를 두었지만, 과두정으로 흐르지 않도록 임기를 두 달로 제한했다. 또 네 구역으로 나뉜 구역별로 2명씩 선출함으로써 대표성을 고르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장점으로 볼 수 있다.
때로 12인 위원회나 무장을 한 ‘정의의 기수단’이 도시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사법권을 외국인으로 충원하여 시민들 사이의 적개심과 반목을 억제하도록 한 점도 흥미롭다. 여러모로 피렌체의 정체(正體)는 로마의 공화정과도 다르고 아테네의 민주정과도 다른 창의적 정치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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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 본 피렌체 시가 전경. ⓒ박경귀 |
민주적 원리에 토대를 둔 과두적 공화정체 성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두적 요소를 띤 최고위원회의 임기를 짧게 하고 보다 많은 시민들에게 공직을 개방함으로써 민주적 요소를 강화하고 시민의 공공심을 높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브루니는 “세상 어디에도 피렌체보다 모든 사람에게 더 동등하게 정의를 구현하는 곳은 없다"고 단언한다. 부자나 강자는 스스로 보호받고 약자는 정부가 개입하여 보호하는 정치체제를 지향했던 것 같다. 이를 통해 “정의와 형평의 정신이 시민들 사이에 관용과 인간적 유대를 촉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유와 시민적 덕성, 공화주의가 조화롭게 추구된 피렌체가 강소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알게 된다.
브루니의 글에서 피렌체의 ‘용비어천가’를 보는 듯하지만, 피렌체가 14~16세기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를 주도한 공화국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짧은 글 속에서 피렌체가 르네상스를 이끌 수 있었던 근원적 역량이 어디에 기인하는 지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전제정을 극도로 경계하고 공화정에 대한 열렬한 찬양과 구현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고, 피렌체의 서기장 등 고위 공직을 역임한 브루니의 체험적 통찰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공화주의적 시민으로서 진정한 근대인의 원형으로 불린 까닭이 여기에 있다. 브루니는 공화주의를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고 구현할 수 있는 위대한 관념이자 정치체제로 칭송하고 있다. 피렌체가 최고의 상업적 번영과 문화의 화려한 만개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위대한 공화정체의 착근에 있었다.
한반도에는 아직도 전체주의의 북한과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이 대립되고 있다.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국시(國是)로 채택하여 건국한 것만으로도 이미 대한민국은 넘치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에 하나 사회주의를 채택하였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멀리 아테네 민주주의와 로마 공화정의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체제이다. 브루니의 찬탄을 넘어 이제 전 세계 국가의 보편적 가치와 정치체제가 되었다. 나아가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국가의 번영을 이끄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되어 시너지를 내고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는 공화주의적 시민 덕성이 고양되어야 한다. 피렌체의 번영에서 우리는 이런 점을 배워야 한다. 그러한 때에 비로소 우리는 <대한민국 찬가>를 부를 자격이 있을 것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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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도서: <피렌체 찬가>, 레오나르도 브루니 지음, 임병철 옮김, 책세상(2002), 14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