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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
한진그룹 설립자 조중훈 회장은 1920년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자랐다. 휘문고보(지금의 휘문중학) 재학 때 종로에서 직물점을 하던 아버지가 부도를 맞아 학업을 중퇴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진해에 있는 국비 교육기관인 진해고등해원(海員)양성소(지금의 해양대학의 전신)에 진학하였다.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機關科)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1937년이었다. 졸업 후 일본 고베(新戶)에 있는 후지무라(藤村) 조선소에 취직되어 일본에 갔다.
17세의 나이에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3년 만에 1급 기술자 대우를 받았고 이내 2등 기관사의 자격증을 획득하여 화물(수송)선 기관사로 천진, 상해, 홍콩, 마카오, 마닐라 등 동남아시아 일대를 두루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국제적인 도시들을 보면서 세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조선회사에서 엔지니어 기술을 익힌 경험은 훗날 대한항공의 항공기나 한진해운의 선박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분야로 진출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조중훈에게 좌절이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도라꾸’ 1대로 시작하여 항공기 145대의 세계적인 항공사로
“나는 사업을 하면서 남이 터를 닦아 놓은 곳에 뛰어들어서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내가 먼저 생각한 일에 남보다 앞서 가려고 노력해 왔다.”(조중훈, 『내가 걸어온 길』, 서울: 나남, 1996, p.31.)
1942년 일본에서 돌아와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 목탄차 엔진을 수리하는 이연(理硏)공업사를 차렸다. 마모된 중고 트럭 엔진을 수리하는 회사였다. 일본에서 엔진 수리를 배워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1일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때 받은 보상금과 그동안 저축한 돈을 모아 인천시 해안동에서 '한진상사'('韓進’은 韓民族의 前進을 의미)를 창업했다. 인천에서 부두 하역 작업을 보면서 부두에서 공장까지 또 다른 수송(輸送)이 필요함을 직시했던 때문이다. 수송업이라는 블루 오션(blue ocean)의 발견이었다.
창업 2년 만에 화물자동차 10대를 보유하게 됐다. 1947년에는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받았다. 창업 5년째 되던 해에는 종업원 40명, 트럭 30대, 화물운반선 10척을 보유한 운송 전문회사로 성장했다. 조중훈은 근면했고, 정확했고, 사업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한진의 화물자동차 15대가 군수물자로 차출돼 파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중훈에겐 억척과 부지런함이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폐(廢)트럭 '도라꾸’(트럭의 일본말)를 얻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7년에는 처음으로 미군과 7만 달러짜리 수송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급성장했다.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運送權)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미군의 귀국 이사 짐까지 맡아 운송했다. 1960년 한해 계약고만 220만 달러, 용차를 포함한 가용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1961년 8월에는 주한미군 중고 통근버스 20대를 사들여 서울 종로 2가와 인천을 오가는 버스, 당시 최초의 '직통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한진고속’의 시초였다. 물건을 실어 나르고 사람을 실어 나르는 운송업은 이렇게 '도라쿠’ 한 대로 시작한 것이었다.
부실한 공기업을 세계적 민간 항공 기업으로 키우다
사업 수완이 남달랐다. 1967년 대진해운을 설립하고 이듬해 동양화재해상보험, 한국공항, 한일개발, 인하대를 차례로 인수했다. 그의 기업가적 재능과 성실함을 눈여겨본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항공공사’(1946년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를 1962년 정부가 인수하여 만듦) 인수를 강권했다. 1969년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적자투성이 공기업을 강제로 떠넘긴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이것을 한진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정경유착 특혜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잘못된 시각이다. 5·16 군사혁명정부는 KNA(대한국민항공사)를 살리고자 운영감독관을 파견하고 정부 보유 외화 중 상당 금액을 융자하기로 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결정하고 나섰다.
그에 따라 조중훈은 과거에 설립했던 '주식회사 한국항공’(Air Korea)을 사업 승산 없음으로 생각하여 과감히 매각했었다. KNA를 지원하여 살리기로 결정한 군사혁명정부에 맞서서 기업을 경영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군사혁명정부가 살리고자 전폭 지원했던 KNA는 1962년에 문을 닫았다. 뒤이은 '대한항공공사’ 역시 적자 누적으로 파산의 상태에 있었다. 결국 파산 상태의 공기업을 조중훈이 인수하여 살려내고 세계적인 민간 항공 기업으로 키운 것이다.
물론 그냥 키워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정부 공기업이라는 성격 때문에 직원에 비해 자리만 꿰차고 앉은 임원이나 간부급이 너무 많은 역(逆)피라미드 조직이었다. 본인과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회사를 정상화시킬 방안과 걱정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허다했다고 한다.
조중훈은 이후 과감한 투자와 서비스로 세계 선진 항공사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대한항공의 성장은 1970년대 초반 수출품을 실어 나르는 항공 화물운송에 치중하면서 내실을 다진 것, 1970년대 중후반 시작된 중동 건설 붐에 맞추어 노동자를 실어 나르고 해외수출 판로 개척을 위해 해외로 나선 회사원을 실어 나르면서 여객운송의 규모를 키워간 전략이 적중했기에 따라온 성공이었다.
대한항공이 시작부터 정부 특혜로 또는 정경유착으로 흑자 공기업을 손쉽게 인수하여 키운 것으로 보는 세간의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조중훈의 사업가적 용기와 판단, 투자, 그리고 불굴의 노력 없이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민간 항공사를 가질 수 있었을지 의심이다. 조중훈은 공기업 민영화의 필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대한항공공사의 실패는, 경제활동이란 결국 민간의 자율에 순리적으로 맡겨져야지 정치력(政治力)에 의해 억지로 주도(主導)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조중훈, 『내가 걸어온 길』, 서울: 나남, 1996, p.41.)
'기업이 정치력에 의해 억지로 주도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완곡한 표현을 썼지만 정부가 기업을 하는 것은 정보와 의지력의 부족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민간이 인수하여 살려내고 규모를 키워 국가 경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조중훈식 민영화 필요론이다.
부실기업 '대한항공공사’에서 세계적 민간 항공사 '대한항공’으로의 민영화 성공은 국가의 핵심 기간사업이라 할지라도 조속히 민영화하여 기업을 국내외 경쟁 속에서 키우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운송으로 전문화된 기업그룹
한진그룹은 한국에서 드문 전문 대기업집단이다. 육지(육)와 바다(해)와 하늘(공)의 운송에 집중했다. 그리고 종합 수송망을 갖춘 운송 그룹으로 성장했다. 누구도 권하거나 강제하지 않았다. 스스로 전문화했고 집중화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에 전문화한 기업집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영학자나 언론인들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특히 전문화는 좋고, 다각화는 나쁘다는 단순화된 이분론은 옳지 않다. 다각화하지 못한 코닥(Kodak)과 소니(Sony)의 추락 그리고 전자(電子)에서 다각화하여 성공한 제너럴 일렉트릭(GE)이 좋은 예이다. 또 관련 다각화는 좋고 비관련 다각화는 나쁘다는 견해도 현실을 무시한 사고(思考)이다.
기업은 기업 환경의 변화에 생존을 위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고, 그것이 전문화이든 다각화이든 그것은 기업의 경영판단에 의한 것이지 외부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사안은 아니다. 한국의 많은 경영학자나 언론인들이 한국에는 전문화된 기업이 없고 그래서 한국의 재벌은 문제라는 식의 주장이 있는데 한진그룹과 같은 수송 전문 기업집단이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설립하거나 인수한 기업들은 거의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사업 보조에 필요한 기업들이었다. 컨설팅 업체인 베인 & 컴페니의 크리스 주크(Chris Zook)의 『핵심에 집중하라(Profit from the Core)』(2002)의 격언처럼 조중훈의 한진그룹은 핵심 사업에 집중하면서 관련 다각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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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는 사업에는 손대지 말라”라는 조중훈의 칼럼 |
2002년 조중훈 회장 사후(死後) 한진그룹은 중공업 사업인 한진중공업을 한진그룹에서 분할하여 한진중공업 그룹으로 출범했다. 금융업 계열사인 한진투자증권과 동양화재도 있었으나, 2000년 메리츠증권 및 메리츠화재로 사명을 변경했고 2005년에 한진그룹에서 분할하여 메리츠금융 그룹으로 출범했다.
고속버스 운송업인 한진고속도 있었으나, 물류운송과 항공업에 집중하기 위해 2006년 동양고속에 매각했다. 조중훈 회장 사후 형제간 재산 분할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계열사 정리로 수송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남은 주요 기업들은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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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1> (현)한진그룹 주요 계열사 |
글로벌 스탠다드 경험으로 만든 경쟁력
6·25 전쟁 직후와 월남전에서 번 돈으로 그룹을 기업을 키웠지만 전쟁 덕분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조중훈은 남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피하고자 했던 전쟁 속에서도 기회를 잡은 것이고, 전쟁을 극복하고 기업을 키운 것이다.
6·25 전쟁과 월남전 속에서 한진은 미군과의 계약을 체결했고, 미군과의 까다로운 계약과 계약이행 과정을 통해 시장경제에서의 계약의 중요성과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를 배웠다. 미군과의 계약 체결과 이행은 세계 시장에서 통용되는 국제적인 경영규범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세운 현대건설의 경우도 동일했다. 6·25 전쟁과 월남전에서 미군과의 계약체결과 계약 이행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능력을 키우고 기회를 가지게 된 셈이다. 이렇게 기업의 세계화는 이미 1950년 6·25 전쟁으로 시작된 것이며 정부를 포함하여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닌 기업의 발전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기업의 이익과 국익의 일치화
조중훈 회장은 기업의 이익과 국익을 일치시키려 노력한 전형적인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이다. 그래서 국가가 도와달라는 일에는 거절하지 못하고 정성을 다했다.
“우정은 우정이고, 사업은 사업이다.”라는 본인의 원칙에 국가는 예외였다. 국가는 곧 '내나라’였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의 '내나라’는 자신의 사업의 토대였기 때문이었다. 삼성에게 국가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대상이 듯이, 한진에게 국가는 '운송보국’(運送報國)의 대상이었다.
한진그룹이 집중해온 항공운수산업이 어떻게 국가에 기여하는지 조중훈 본인의 글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수송은 국가 기간사업의 하나로서, 국가경제 및 사회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업종이다.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것은 모든 산업의 공통된 사항이라 할 수 있으나, 국토방위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국가적 과제로 안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항공운송업은 국가경제와 사회 및 안보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여타 업종과는 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항공운송업은 무엇보다 경제 발전의 촉진제 역할을 수행해 왔다...자국 외화의 유출방지 및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작용하여 국제 수지 개선에도 커다란 기여를 한다.
둘째, 항공운송업은 국가 지위의 상징 및 대외 정책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정부의 특정한 대외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사업성이나 타당성이 없는 노선 또는 국가에 불가피하게 취항하는 예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셋째, 항공운송업은 사회·문화교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넷째, 항공은 국가 안보에도 기여한다. 항공 전문인력과 항공기재는 곧 국력이며, 특히 대한항공의 경우에는 항공기 제작업체로서 전투기 및 헬기 등을 제작하여, 국가 방위력 증강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강조는 필자. 조중훈, “항공운송사업의 역할과 발전,” 『군사논단』, 제9호, 1997년 겨울, p. 281.)
없는 길을 새로이 만든 기반은 자유 시장경제
조중훈은 하늘과 바다와 땅에 없는 길을 만들며 나아간 창조적 기업인이었다. 하늘길이든 바닷길이든 항상 지도에 없는 새로운 길이었다. 이는 북한으로 막혀 대륙으로 뻗을 수 없는 섬나라와 같은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요인 때문이었다.
당시 대륙으로의 길은 전체주의 공산체제와 교통하는 '빈곤’으로의 길이었고, 바다로 진출하고 항공으로 나아가는 길은 미국, 일본, 유럽 등 자유민주 시장체제로의 길로 '번영’의 길이었다. 길이 열린 곳에 산업(産業)이 있었고, 산업이 있는 곳에 번영(繁榮)이 있었다. 조중훈 회장은 물류 운송으로 번영의 길을 열은 것이었다.
이렇게 번영의 길로 먼저 들어선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기업인들이었다. 부정적인 국제정치 환경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일은 기업인이 담당해야할 몫이자 고유의 역할이고,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6·25 전쟁이 대한민국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남겼지만 그러한 부정(否定)을 긍정(肯定)으로 만든 이들은 기업가였다. 기업가는 미군이 쓰다가 버린 '도라꾸’를 수리하여 화물운송을 담당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역할을 기업가가 해낸 것이고 또 기업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 국내 교역과 국제 무역을 허용하는 시장경제가 존재했기에 한진과 같은 종합 수송기업이 가능했던 것임을 생각한다면,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자유로운 교환이 없었더라면 물자의 수송도 없었을 것임을 생각한다면,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택한 이승만 대통령의 탁견과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주도 경제성장으로의 매진은 기업 경영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나아가 조중훈이 천직으로 여긴 운송사업은 제조된 물품을 회사든 개인이든 소비자에게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시장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한진그룹은 교역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 시장경제 안에서 성장하였고, 교역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킨 것이고 한국경제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예를 들어 한진그룹의 일원으로 1968년 8월에 설립된 한일개발주식회사는 197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군막사를 건설하였고, 이란의 코람샤항에서 화물하역과 부두작업을 맡아 실적을 쌓았다. 대한항공은 물론 건설 노동자의 수송을 담당했다.
대한민국의 수출주도 경제성장으로 많은 수입물자가 들어오고 수출품이 대규모로 증가하였고, 그리고 건설기업들의 중동 건설 진출 역시 한진해운과 대한항공이 기업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자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진정 교역과 무역의 증가와 사람의 이동이라는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작동이야 말로 (주)한진, 한진해운, 대한항공이 사업을 키울 수 있는 배경이었다. 공산주의 계획경제에서의 물자의 부족은 수요를 예측하지 못하는 지식의 한계에서도 오지만 운송 시스템의 미비와 운송수단의 부족에서도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국민의 삶의 향상은 적절한 생산과 적절한 운송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과 운송의 적절한 결합은 시장경제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에 의하여만 조화롭게 이루어진다. 생산한 물건을 적절한 장소에 배달하는 일을 맡은 수송그룹 한진은 결국 서민의 삶을 크게 개선하였고, 그로써 사회에 기여한 기업집단이 되었다.
월남전 파병 역시 국제정치적으로는 미군의 6·25 참전에 대한 보답의 성격으로 볼 수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새로운 사업의 기회와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다. 광대한 블루 오션이 열린 것이다. 이 또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공산주의 계획경제 국가들이 외국에 파병한다고 해서 사업의 기회가 함께 따라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진상사가 월남에서의 운송이라는 국제적 사업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우리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하지 않았었더라면 한국의 기업들이 세계적인 항공사와 해운사로의 도약하는 기회내지는 세계 시장 개척이라는 도전 정신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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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3월 월남의 퀴논항을 신상철(申尙澈) 당시 주월대사와 시찰하고 있는 조중훈 회장 /사진=월간조선 |
기업가는 외교관
길을 낸다는 것은 '관계 맺기’의 시작이다. 대한항공이 새로운 국가, 새로운 도시로 취항한다는 것은 그 나라, 그 도시와 외교관계 맺기였다. 그리고 돈독한 외교 관계 없이 항공사의 취항은 이루어질 수 없다.
대한항공은 취항을 위해 냉전시대에 정부의 외교관이 해야 할 외교를 꾸준히 해왔고, 그것은 정부의 외교를 직·간접으로 도와주는 것이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은 외교를 외교관보다 기업가가 잘 할 수 있음을 그것도 더 잘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외교 사례 하나를 본인의 회고를 통해 보자.
“(1964년) 무렵 취임한 지 몇 개월 지난 장기영 부총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심각한 외환위기 극복에 필요한 2천만 달러를 일본에서 변통(變通)해 오는 사절(使節)로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 가용외화가 4천 7백만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에 2천만 달러는 큰 금액이었다...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었는데다가 정상적인 절차를 통한 대일차관(對日借款)이 가능한 시점이 아니어서 주저되기는 했으나, 나라 형편을 생각한 정부의 요청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일본으로 건너갔다....다나카 씨를 만나기 전에 밤을 지새며 궁리를 거듭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단 몇 마디의 말로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말이 좋을까 하는 연구를 한 것이다.
결국 이왕에 제공할 것이라면 일을 서두르자는 나의 집요한 설득 끝에 2천만 달러에 달하는 협력기금차관(協力基金借款)이 성사되었다.”(강조는 필자. 조중훈, 『내가 걸어온 길』, 서울: 나남, 1996, p.51.)
기업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던 조중훈 회장의 '국가 심부름꾼’론은 장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도 이어진다. 조중훈 회장이 1981년 당시 독일 바덴바덴 국제 올림픽 조직위원회(IOC) 총회에 참석하여 서울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프랑스 및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 국가 IOC 위원들을 마지막까지 설득하여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권 따내기라는 기적을 이루어서 가능했다.
조양호 회장은 30년 뒤 2018년 개최되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도왔고 또 그 올림픽의 개최를 위해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준비하고 있다. 한진그룹의 최고경영자(CEO)는 외교관의 DNA를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부족한 기술과 경험을 현장경영으로 극복하다
조중훈 회장은 현장을 중시한 기업가다. 기술과 경험이 부족한 한국의 기업이 선진국을 따라 잡는 방법은 실제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현장성과 신속함이었다. 앨리스 앰스덴(Alice Amsden)은 『아시아의 다음 거인(Asia's Nest Giant)』(1989)에서 후발산업화 국가인 한국, 한국 경영자의 특징으로 '(생산) 현장경영’(shop floor management)을 그 특징으로 들었다.
기술 축적이 되어 있지 않은 기업이 생산 현장에서 지속적인 작업 개선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직원과 경영자가 상호 소통한다는 것이다. 즉 기술개발부서(R&D)가 아니라 생산현장에 치중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신속히 위기를 대응하여 극복하고 기업을 키운다는 이론이다.
최근 현장 경영(MBWA, management by walking around)론은 톰 피터스와 로베트 위터맨(Thomas J. Peters and Robert N. Waterman, Jr.)이 『초우량 기업의 조건(In Search of Excellence)』(2005)에서 소개한 개념으로 경영진이 현장을 방문해서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회의 방식에 비교해 상당한 효과를 내는 방식이다.
경영진이 현장을 방문하여 걸어 다니며 사원들과 소통하며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러한 현장경영으로 기업을 일구어낸 경영의 대가는 정주영 회장이었다. 조중훈 회장도 인천, 월남의 전장, 새로운 취항 도시 등 현장에서 무수한 밤을 지세며 문제를 해결하며 기업을 구하고 키웠다. 바꾸어 이야기 하면 조중훈은 현장에서 실패를 몸으로 겪으며 이겨낸 기업가였다.
극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시련들
조중훈 회장은 신생 항공사인 대한항공에 닥친 많은 사고(事故)를 수습하면서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만들고 사업을 키웠다. 인명사고를 동반한 큰 사고들은 북한의 납북이나 소련의 격추, 북한 공작원의 공중 폭파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1997년 '괌 사고’는 착륙 실패에 의한 것이었다.
'괌 사고’의 경우 조종사들이 위계질서를 지키느라 기장과 부기장 사이에 커뮤니케이션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괌 사고는 이후 대한항공은 사내 문화를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은 사고를 겪으며 세계적인 항공사가 된 것이다. 조중훈 회장이 겪어낸 주요한 항공 사고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958년 2월 16일에 부산발 서울행 더글러스 DC-3(창랑호;HL103)이 평택 상공에서 납북됨
▪ 1969년 12월 11일에 강릉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던 YS-11이 대관령 상공에서 납북됨
▪ 1971년 1월 23일에 대한항공 F-27 이륙 후 강원 고성에서 피랍돼 비상착륙, 2명 사망, 26명 부상
▪ 1978년 4월 21일에 소련의 수호이 요격전투기가 대한항공 902편 보잉 707(HL7429)을 공격, 기체가 대파된 뒤, 비상착륙을 감행 무르만스크 시 주위 호수에 착륙. 이 사고로 승객 2명이 사망. 나머지 승객 전원은 4일 뒤인 4월 24일 러시아에서 팬암 항공 보잉 727로 핀란드 헬싱키 도착한 후, 김포공항을 통해 무사귀국 함
▪ 1983년 9월 1일에 뉴욕을 출발해 앵커리지를 경유,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230B(HL7442)을 소련의 전투기가 격추함. 탑승객 269명이 모두 사망함.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음
▪ 1987년 11월 29일에 아부다비를 출발하여 방콕을 경유, 서울로 올 예정이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HL7406)이 북한 공작원(김현희, 김승일)에 의해 공중 폭파됨
▪ 1997년 8월 6일 대한민국 김포국제공항에서 출발한 801편이 미국의 괌에 있는 앤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에서 착륙에 실패, 추락하여 승객 231명과 승무원 23명을 합쳐 총 254명 중 총 225명이 사망하였고 총 29명이 부상을 입음
기업을 키우는 경영과 사람을 키우는 교육을 함께한 기업인
조중훈 회장이 집안 사정으로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진해고등해원양성소로 진학하여 기술을 배웠음은 설명한 바 있다. 재계에서 조중훈 회장은 방대한 독서로 직원들을 쩔쩔매게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항공기 기술 관련 서적이나 선박 관련 서적뿐 아니라 다양한 서적을 읽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한 것은 '중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대신 배움에 목마른 직원들에게 배움에 대한 기회를 보장하고자 일찍부터 대한항공 내에 '정석대학’을 만들어 직원들이 항공물류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인하대, 한국항공대 등의 잇따른 인수를 통해 보건데 조중훈 회장은 기업 키우기와 '사람’ 키우기를 동일한 중요한 사업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종신지계막여수인(終身之計莫如樹人), 즉 '한평생 살면서 사람을 심는 일만 한 것이 없다’는 중국 고서 관자(管子)의 말을 경영철학으로 삼은 데서 왔다.
현재의 한진그룹, 재계 10위의 위치
현재의 한진그룹은 2014년 1분기 기준 자산총액이 37조630억원으로 재계 10위에 위치하고 있다. 재계 8위인 자산 규모 58조870억원의 GS그룹이 재계 8위이고, 최근 한화케미칼이 삼성종합화학 및 삼성토탈 인수함에 따라 총자산 규모가 약 55조원으로 증가하게 되어 한화가 9위, 한진이 그 뒤를 잇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진그룹은 순환출자에 대한 사회적 비난 때문에 지주회사 체제로 변환하고 있다. 한진→한진칼→정석기업→한진으로 이어지던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총수 일가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바꾸고 있다.
이전에는 '㈜한진(5.33%)→한진칼(48.27%)→정석기업(19.41%)→㈜한진'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였지만, ㈜한진이 한진칼 지분을 매각함으로써 '한진칼→정석기업→㈜한진’으로 이어지는 수직 구조로 바뀌는 것이다. 한진칼의 지주사 체제는 '총수 일가(26.14%)→한진칼(48.27%)→정석기업(21.63%)→한진'으로 개편되었다.
문제는 최근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의 실적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대한항공은 부채가 700% 가까이 되고 있다. 세계 1위였던 항공 화물 운송 부문은 아랍에미리트 항공에 역전 당하였고, 여객 운송 부문 역시 중국의 동방항공, 남방항공, 국제항공의 공세에 밀려 세계 10위권을 힘들게 유지하고 있는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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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이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동안 미군과 용역사업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총1억 2,000만 달러였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 정도였고 1964년 7월 한국은행의 가용 외화가 4,700만 달러였으니 상당한 금액의 외화 획득이자 수출임을 알 수 있다. /사진=한진그룹 홈페이지 |
그리고 조중훈 회장의 3남 조수호 회장이 경영하던 한진해운의 경우 2006년 조수호 회장 사후 부인 최은영 회장이 운영해왔으나 해운업의 불황으로 실적이 악화되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으로부터 1,500억원의 운영자금을 긴급 수혈 받았다.
조중훈 회장이 만들어낸 한진의 전진(前進) 신화(神話)가 2세 조양호 회장 시기에 위기에 직면한 것이며,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빚은 사회적 물의로 그 위기는 심화되었다. 조중훈 회장이 월남전 등에서 보여준 불굴의 투지와 기업가 정신이 다시 필요한 시기임이 분명하다.
몇 가지 에피소드: (1) 신용을 얻게 한 미군과의 완벽한 계약 이행
한진상사는 1956년 11월 미군과 계약 금액 7만 달러, 6개월 잠정으로 수송계약을 맺게 된다. 수송 도중의 사고로 인한 손해는 한진상사가 모두 배상하며, 수송에 필요한 유류는 미군이 현물로 지급하는 계약이었다. 그런데 임차한 트럭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 파카를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겼음을 조중훈 사장은 알게 된다. 용역사업 초기라서 이익을 내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미군 파카를 팔아넘긴 사람들은 물품을 인도한 사인(signature)까지 받아왔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만 보면 굳이 변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물품 전달이라는 신용을 중시 여긴 조중훈 사장은 직원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켜 놓고 물건이 나오기를 기다려 현금으로 추가 이익을 보태주고 1,300벌에 달하는 파카 전부를 회수하여 인계한다.
이로 인해 한진상사는 미군의 확실한 신용을 얻게 되고 이후 미군의 한진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고 본인은 회고하고 있다.
한진상사는 미군과의 계약체결을 통해 시장에서 계약이행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된다, 즉 완벽한 계약이행으로부터 신용은 생기는 것이고 새로운 사업의 기회가 열리는 것이며 그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업경영의 원칙임을 배우게 된다.
(2)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 본 월남에서의 운송사업
최근 개봉된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 윤덕수는 부인에게 월남에 돈 벌러 가겠다고 설득하며 자신은 전쟁이 참가하는 군인이 아니라 기술자로 일을 할 예정임을 강조한다. 기술자의 일은 한진상사와 같은 물자 수송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덕수’는 대한상사라는 회사의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당시 파견 기술자의 70%가 한진상사와 경남통운, 현대건설, 한양건설, 공영건업 등 5개 업체에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한진은 운수·용역업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미군의 물자 수송으로 큰 돈을 벌어 그룹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대한민국이 월남에 참전한다고 해서 바로 미군의 일감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중훈은 워싱턴으로 동생과 함께 가서 과거 한국에 주한미군으로 왔었고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장교들에게 읍소하여 미군 물자 수송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월남 퀴논항에서 물자 수송이 시작된 직후 한국인 인부들이 탄 트럭에 베트콩의 공격이 있자 인부들은 무서워 수송에 나서지 않게 된다.
그러자 당시 조중훈 사장은 간부진들과 함께 맨 앞에서 선도 트럭을 타고 수송단을 진두지휘하였다. 총탄의 죽음을 무릅쓴 운송이자 사업 개척이었고 그로 인해 한국인 인부(직원)들은 본국으로 월급을 송금할 수 있었다.
미 국방성 수송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으로, 월남에서 한진이 물자 수송 중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대항하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한진은 1966년 미군과 79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였고 당시 국내 기업 가운데 월남에서 수주한 최대의 용역이었다. 1967년 한진이 미군과 맺은 2차 계약은 3400만 달러로 1차 계약의 5배에 달했다.
한진이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동안 미군과 용역사업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총1억 2,000만 달러였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 정도였고 1964년 7월 한국은행의 가용 외화가 4,700만 달러였으니 상당한 금액의 외화 획득이자 수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수출입국(輸出立國) 달성은 정부가 계획한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에 이겨낸 기업이 이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부의 수출계획은 계획뿐이었고, 죽음을 담보한 기업가와 기업의 노력이 없었다면 달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