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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운 미디어펜 논설위원 |
유승민 원내대표는 과연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4월 8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습니다. 빈곤층, 실업자, 비정규직, 초단시간 근로자, 신용불량자, 영세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장애인, 무의탁노인, 결식아동, 소년소녀 가장, 다문화가정, 북한이탈주민 -- 이런 어려운 분들에게 노선과 정책의 새로운 지향을 두고, 그 분들의 통증을 같이 느끼고, 그 분들의 행복을 위해 당이 존재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지당한 말이다. 정치는 바로 이런 분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 말 앞에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 대기업의 편이 아니라”라는 단서를 덧붙였다. 이것은 언뜻 보면 맞는 말 같지만, 도저히 섞어 넣을 수 없는 것을 섞어 넣은 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말한 기득권 세력의 편이 아니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정치가 특권이 있는 세력의 편을 들면 안된다. 그러면 그는 어떠한 특권이 지금 유지되고 있는지 말을 해야 한다. 우리가 없애야 할 특권을 말해줌으로써 그 특권을 없애기 위하여 함께 노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특권을 없애는 데는 아마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온 국민이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가 경제학자 출신의 정치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대기업의 편이 아니라고 했는데, 대기업이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커진 것임을 감안해볼 때, 그런 선언은 국민 다수 소비자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기업이 시장에서 소비자에 대한 봉사자이고, 소비자가 기업이 제공하는 좋은 것들(goods) 내지는 서비스에 사랑을 많이 해줄수록 기업이 더 커진다는 점, 그래서 대기업이 탄생했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국민 소비자들이 사랑하지 않는 세력의 편에 서겠다는 것인가?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심각한 것은 이처럼 시장경제의 봉사주의적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 외에도, 시장경제주의자(?) 답지 않게 은연중에 마르크스의 계급대립론을 끼워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이라는 대립구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유승민 원내대표는 은연중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혹은 자본가와 노동자 농민 연합전선의 대립을 사회변혁의 주동력으로 이야기했던 마르크스와 레닌 모택동 김일성 등의 사상을 수용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결과인지 몰라도 유승민 원내대표의 대표연설에 대해서, 새누리 당은 이례적이게도 공식적으로 이를 지지하는 대변인 논평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김무성 당대표도 개인의 의견발표라고 선을 그었다. 그만큼 당내 여론 수렴이 없었다는 증거다.
반면 새민련은 당내 여론 수렴이 없었던 것 같다고 격하시키긴 했지만, 상당히 칭찬을 많이 했다. 유은혜 대변인은 “우리나라의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준 명연설이었다”고 했고,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유승민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찬사를 보낸다”며 “드디어 보수가 꿈을 꾸기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대표연설의 무게를 감안하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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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민 원내대표가 8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어제의 새누리당이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에 치우친 정당이었다면, 오늘의 이 변화를 통하여 내일의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자유시장경제와 한국자본주의의 결함을 고쳐 한국경제 체제의 역사적 진화를 위해 노력하는 정당이 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기존의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 노선을 마치 기득권세력을 위한 것인 양 몰아붙이는 우를 범했다. /사진=연합뉴스 |
유승민의 노선 전환 선언은 대한민국 번영의 길에서 벗어난 잘못된 길을 택한 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또 “어제의 새누리당이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에 치우친 정당이었다면, 오늘의 이 변화를 통하여 내일의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자유시장경제와 한국자본주의의 결함을 고쳐 한국경제 체제의 역사적 진화를 위해 노력하는 정당이 되겠습니다.”라고도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함으로써 기존의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 노선을 마치 기득권세력을 위한 것인 양 몰아붙이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는 이런 말을 하면서 자유시장경제야말로 과거 봉건세력과 특권 길드의 국가주의적 구속을 풀어헤치고 등장하면서 진정으로 서민들을 위한 생산을 달성했었던 체제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던 체제라는 세계사적 경험을 외면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도 세계 시장에서 수출입국을 통해서 성장해왔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이촌향도(離村向都)현상을 불러 일으키면서 농촌 유휴인력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다는 경험을 잊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뒤를 따라 성장의 길을 걸어온 나라들도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는 점도 잊었다.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들의 모델이 된 것은 바로 큰 시장 수출입국 노선의 성공이었는데도...
비록 지금 일시적으로 어려움에 빠져있지만, 성장과 자유시장경제 노선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새로운 소비자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을 뿐이다. 지금 기업들이 어려운 것은, 전 세계에서 개발도상국들의 추격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현재의 수준에 맞는 소비자를 제대로 찾지 못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예를 들어보면 중국에서 샤오미가 치고 나오고 애플이 삼성의 고유 영역이었던 대화면 영역의 아이폰 6을 치고 나오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소비자의 사랑과 선택률이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삼성이 2014년 어닝쇼크(earning shock)를 겪었던 것이다. 이 어닝쇼크를 이겨내게 된 것은 갤럭시S6을 만들어내면서부터다. 이처럼 소비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영역을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어려움에 빠지게 되고 그 영역을 개척해야 다시 승승장구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제가 어려움에 처한 것도 삼성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법도 삼성의 경우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에 빠지게 된 인과관계를 살펴보면 세계 시장에서 대한민국 기업들이 제공하는 좋은 것들(goods)과 서비스가 가격 면에서든 품질 면에서든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노력방향은 그런 쪽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개선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런 쪽의 절치부심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복지의 균형적 발전이 새로운 노선이라고 하고 있다. 일시적으로든 구조적으로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자선과 부조(扶助)는 물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가 발전의 노선일 수는 없다. 사실 복지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는 것은 독재자가 소유권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시장봉사자의 결실을 빼앗아 나누어줄 수 있다는 발상에 기초하고 있다. 부자는 소비를 더 늘리지 않을 것이지만 부자의 돈 1억원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1백만 원씩 나누어주면, 1백 명의 사람들이 소비를 늘릴 것이라는, 즉 이런 방식으로 소비를 진작시키면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후생경제학의 (독재적 심성을 가진 경제학자의) 모델은 세계화시대에 맞지 않을뿐더러, 1689년 명예혁명 이후 발달한 근대 시민사회의 소유권 개념까지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다.
가뜩이나 법 앞의 불평등을 자랑하는 소득세법에 또 다시 불평등을 가속화시키자는 것이다. 이는 시장봉사자들이 자신들이 거둔 결실을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 사업을 직간접적으로 할 수 있음에도, 국가의 힘으로 ‘약탈’을 하고 정치인의 이름으로 ‘생색’을 내면서 베푸는 식의, 남의 공을 가로채는 못된 습성일 뿐이다. 이런 것이 ‘자유시장경제와 한국자본주의의 결함’을 고치는 것, ‘한국경제 체제의 역사적 진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의 내용이라면, 이는 국가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중부담 중복지? – 국민의 뜻을 위배한 국민부담 늘리기 보다는, 무분별 복지의 다이어트가 먼저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국민여론이 세금과 복지 이슈만큼 달아오르는 것이 없음을 이미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소득세 연말정산 사태에서 이를 생생하게 보았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금을 올린 정당은 재집권에 성공할 수 없다’는 정치권의 금언까지 제시하였다.
그가 그것을 인식했다면 그는 마땅히 복지 다이어트를 제시했어야 한다. 현재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복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들어보면, 첫째는 무분별한 무상급식이 있다. 청소년 학생들에 대한 급식에서 우리 사회는 이미 분별력을 상실하였다. 자기 호주머니에서 세금을 내고 그것을 돌려받으면 관리비가 들어가는 손실이 있다. 따라서 세금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은 급식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관리비도 줄이고 더 효율적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부 선동세력은 (실제 차이가 옷, 가방, 신발 등에서 드러나고, 무통장입급되는 급식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차별 폐지를 명분으로) 학부모들에게 무상급식을 제안하였다. 이에 현혹된 일부 학부모들은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 급식비를 줄이는 것을 실내용으로 하는 무상급식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 결과 학교 예산에서 다른 시설 개보수 등에서 펑크가 나게 되었다. 친환경 무상급식이란 허울 아래 농약 검출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분별력이 생기게 되어, 이제는 여유있는 층에서는 급식비를 부담하는 게 낫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경남도에서부터 용기있게 분별있는 급식을 하게 되었다.
둘째는 무분별한 무상보육이다. 무분별한 무상보육은 무상급식에 대한 맞불 성격의 것이었지만 이것도 보육시설 입소를 위해 신청이 몰리는 일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 지방교육청들이 무상보육 예산을 세울 수 없다는 거부사태를 불러오기도 했다. 2015년엔 임시로 국가 예산 보조로 해결했지만, 재정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는 보육문제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무분별한 보육예산 지원을 분별 있게 하자는 개혁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전향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물론 그가 박근혜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란 공약이 허구적이라고 지적한 것은 액면 그대로는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공약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공약이 나왔던 것은 분별력의 약화로 인해서 증세는 반대하고 복지는 찬성하는 모순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득세 연말정산 사태에서 보듯 국민들은 기본적으로 세금 증세에는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 대책은 무엇인가?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여 이해를 구하고, 무분별 복지를 다이어트하고, 합리화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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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민 원내대표가 시장경제체제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노선전환을 시도하면서 대통령과 당대표와도 교감을 하지 않은 채 대표연설을 한 것은 대한민국 정당정치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행위와 다름없다. /사진=jtbc 캡처 |
유승민 원내대표가 이런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겠다고 하면서 ‘중부담 중복지’를 들고 나온 것은 그에게 위임된 바를 벗어나는 월권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은 그에게,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 살림을 잘하는지 감시하라고 했지, 부담 증가를 국민들에게 훈계하라고 위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1215년 마그나카르타나, 1689년 명예혁명이나, 1776년 미국 독립혁명이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나 모두 가혹한 세금부담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양 고전에 나오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라는 말이 세금과 관련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그가 중부담 중복지를 위해서 ‘여야 합의기구’를 설치하겠다는 것은 입법부의 독재를 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명예혁명의 정신을 잘 정리했던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최고 권력 또는 입법권을, 그것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나 할 수 있으며 신민의 자산을 자의적으로 처분하거나 그 일부를 제멋대로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입법자들이 인민의 재산을 빼앗거나 파괴하고자 기도할 경우, 또는 인민을 자의적 권력 하에 놓인 노예로 만들고자 할 경우, 그들은 스스로를 인민과의 전쟁상태에 몰아넣는 것이며, 인민은 그로 인해 더 이상의 복종 의무로부터 면제”된다고 하였다.
“입법자들 곧 인민의 자유 및 재산의 보호와 보존을 위해서 선임된 자들이, 앞에서 밝힌 대로, 바로 그 자유와 재산을 무력으로 침해하여 박탈하고자 할 때는, 그들 역시 반란자와 다름없다고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 그들을 인민들의 평화의 보호자와 후견인으로 임명한 인민과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그리고 죄질이 가장 나쁜 의미에서 ‘전쟁상태를 재개하는 반란자들(rebellantes)’이 되는 것이다.” 여야합의기구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잘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치를 위하여 세금을 올린다면, 국민들은 선거 때 최소한 그런 ‘입법부의 반란’에 앞장선 그를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세금을 올린 정당은 재집권에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사회적 경제 찬양으로 시장경제를 진화시킬 수 있는가?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 사회적 경제를 바람직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 많은 국민들께서 사회적 경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복지와 일자리에 도움을 주며 양극화 해소와 건강한 지역공동체의 형성에 도움을 주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자활기업, 마을기업, 농어촌공동체회사 등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영역도 돌봄, 보육, 교육, 병원, 신용, 도시락, 반찬가게, 동네슈퍼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사회적 경제는 국가도, 시장도 아닌 제3의 영역에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으로서, 복지와 일자리에 도움이 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역사적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자활기업, 마을기업, 농어촌공동체 회사 등은 모두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시장경제가 아닌 제3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이 아니라, 시장경제 자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인 것이다. 따라서 그 활동들이 시장경제 속에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다양성 차원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시장도 아닌 제3의 영역에서 그러한 것들을 찬양 육성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오히려 그의 진화론이 마르크스의 유물론 역사법칙 5단계설처럼 사회주의로의 진화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한 것들이 시장을 대체한다면, 과거 무솔리니가 했듯이 협동조합 전국연합이 생산량과 가격을 결정하는 식으로 나아간다든지, 혹은 영국의 페이비안 사회주의자들이 했듯이 특권 길드들이 생산량과 가격을 결정하는 식으로 나아간다든지 해서 시장을 대체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파시즘의 경제를 이루는 것에 다름 아니다. 특권적 ‘조합주의(corporatism)’와 파시즘은 무솔리니의 핵심 경제 정치 노선이었었다. 2차세계대전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런 체제는 여전히 경계해야 할 경제체제, 정치체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해왔던 선진국들도 사회적 경제가 발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우리 19대 국회가 사회적 경제 기본법을 제정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진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라고 했을 때, 더구나 그것이 시장 밖에 있는 제3의 길이라고 성격규정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정말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집권당의 원내대표라면, 시장 밖에 있는 사회적 경제는 반드시 특권화될 수밖에 없는 경제라는 사실에 대해 역사적 성찰을 더 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만인이 만인에게 자유롭게 봉사하는 체제인 시장경제 체제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면서, 국가안보에서만은 정통보수의 길을 걷겠다고 할 때, 과연 어느 정도 그에게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또 이런 중차대한 노선전환을 시도하면서, 당론을 제기하고 토론하고 결집시키지도 않은 채 대표연설을 일방적으로 ‘감행’하는 것을 보고서,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더구나 대통령과도, 당대표와도 교감을 하지 않은 채 이런 대표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그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대한민국 정당정치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을까? /박종운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