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경기옛길’ 중 ‘조선시대’ 한양(漢陽)에서 ‘강원도’를 잇는 길을 복원한 것이 ‘평해길’이다.
이 평해길의 제5구간이 ‘물끝길’이다. ‘양근나루길’이라고도 한다.
‘경의중앙선’ ‘신원역’에서 ‘국수역’과 ‘아신역’을 지나 양평역(楊平驛)으로 이어지는, 14.2km 길이 코스로, 4시간 30분 남짓 걸린다.
물끝길은 남한강(南漢江)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힐링로드다.
‘양근나루’는 ‘서울’ ‘마포’나 ‘뚝섬’에서 실은 새우젓을 이 나루에 내려, 육로를 통해 강원도 홍천이나 횡성까지 마차로 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 물길이 끝나고 육로교통(陸路交通)이 시작되는 요충으로 사람과 물자, 문화를 연결해주던 양평 사람들의 오랜 삶이 담긴 곳이다.
정겨운 시골길과 나무향이 가득한 숲길, 도랑 옆의 물소리에 발맞춰 걷다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이 물끝길을 걷기 위해, 신원역(新院驛)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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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 '물끝길'/사진=미디어펜 |
신원역은 출구가 하나뿐이다. 역 광장 바로 길 건너에, 물끝길 안내판이 있다.
도로변을 벗어나, 한강변으로 내려왔다. 이 길은 ‘하늘사랑길’이라고도 한다.
인근에 감호암(鑑湖岩)과 ‘감호정’이 있다. 이 곳은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가장 존경하며 흠모했던, 대학자 ‘권철신’의 흔적과 채취가 남아 있는 유적지다. 감호암 위에 있던 정자 감호정에서 당시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열고,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우리 일행은 그 반대쪽, 천주교 ‘양근성지’ 쪽으로 간다.
드넓은 강 저 멀리, 양평읍내의 아파트들과 강을 가로지르는 ‘양근대교’가 보인다.
양근(楊根)이란 지명은 ‘고구려’ 때 처음 생겼다. ‘양근’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예로부터 남한강 변에는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다.
버드나무는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속성수로,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폭우(暴雨)로 인한 제방의 붕괴를 막는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殉敎者)들의 나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내리기 시작하자, 로마 황제들은 신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그러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계속 퍼져나갔다.
길 왼쪽 담 안쪽은 식물원 같다. 정자들이 있고, 돼지, 곰, 다람쥐, 토끼, 기린 등 동물 모형들이 많이 보인다. 유리온실(琉璃溫室)과 비닐하우스들도 있다. 자색자두나무 꽃이 화려하다.
옛날 오빈역(娛賓驛)이 있던 곳이 나타났다. 조선시대 지금의 오빈리에는 오빈역이 있었다.
오빈역은 1896년 역참(驛站)이 폐지되면서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오빈리에 아직도 ‘역말’이란 자연부락이 있다.
그런데 2010년 12월 부활했다. 처음엔 없던 경의중앙선 오빈역이 양평군의 요청으로, 추가로 생긴 것. 오빈역은 수도권전철 중 이용객이 가장 적은 역으로, 적자를 군이 보전해주고 있다.
강변길에는 쉽게 보기 힘든 하얀 민들레, 현호색도 많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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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양근성지'/사진=미디어펜 |
소하천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지나니, 양근성지(楊根聖地)가 보인다.
양근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의 도입기에 ‘천진암’ 강학을 주도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이자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한 명인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 형제의 생가 터는 한 때 강상면(江上面) ‘대석리’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나, 후손들과 교회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현재 ‘양평읍 읍사무소’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청나라’ ‘베이징’의 북당(北堂)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자다. 그는 조선에 돌아와, 한양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李檗)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 후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과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에게도 세례를 해줬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몸소 조과(朝課, 아침기도), 만과(晩課, 저녁기도),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 기도) 등을 바치며,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당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천주교 창립의 주역들은 신부의 역할을 하며, 2년간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다.
이처럼 양근성지는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다.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됐다.
이런 의미에서, 양근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또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이들은 결혼생활 15년 동안 마치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동정을 지켰고, 마침내 ‘동정(童貞) 순교부부’가 됐다.
1837년 1월에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한양에 도착하자, ‘모방’ 신부는 양근으로 가서 머물며, 4주일 동안 조선말을 공부한 다음 그 읍내 신자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를 양근으로 불러, 함께 부활절(復活節)을 보냈다.
아울러 양근성지는 청나라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베이징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4촌 여동생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이 참수형으로 순교한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방한한 교황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123위 중, 양근성지와 관련 있는 복자는 조용삼(베드로, 1801년 3월 27일 순교),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1802년 1월 29일 순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802년 1월 30일 순교), 조숙과 권천례(1819년 8월 10일 순교)다.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이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버려졌다.
가까운 곳에 있는 ‘용문사’는 권일신이 1785년 봄, 명례방(명동)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가, ‘형조’ 관리에게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이후, 양근 사람 ‘조동섬’과 함께 8일간 침묵 피정을 한 곳이다.
양근성지는 대형 십자가와 기념성당, 한강변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순교자광장’에 ‘이숙자’ 수녀가 제작한 ‘십자가(十字架)의 길 14처’, 조숙과 권천례 동정순교부부상, 순교조형물을 세웠고, 감호암 위에 있었던 감호정과 ‘직암정’, ‘녹암정’, 쉼터 등을 광장에 복원했다.
또 예수와 마리아,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 및 권일신의 동상이 있고, 1868년 5월 서소문(西小門) 밖 형장에서 순교한 ‘권복 프란치스코’(권일신의 증손자)의 유해를 성지 내에 안치했다.
당시 순교자들의 피처럼, 분홍색 현호색이 성지 앞 풀밭에 흩어져있다.
성지를 지나 ‘물안개공원’ 앞에는, 한강에 떠있는 ‘양강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부교(浮橋)가 놓여있다. 이 뜬다리는 2019년 ‘경기도 균형발전사업’의 일환으로, 하천점용허가를 받아 조성된 것으로, 홍수 시에도 수직상승하고, 중간 아치형 다리가 분리 가능한 구조로 건설됐다.
양강성에 있는 ‘영원(永遠)으로 가는 사다리’는 양근대교 좌우 백사장과 양근관아 옥사에서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물이다. ‘양강섬 순례길’이 이어진다.
무엇이든 늘 반대로 하는 ‘청개구리’ 이야기도, 이 곳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양강섬 앞 작은 산 ‘떠드렁산’이 그 현장이다.
‘인조’ 때 ‘이괄(李适)의 난’을 일으켰던 무신 이괄은 어렸을 때 성질이 난폭하고, 아버지의 말에 항상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언행을 하곤 했다.
이괄의 부친은 풍수(風水)에 밝아서, 자신의 묏자리를 당대에 왕이 날 곳인 떠드렁산에 잡았는데, 그 곳은 시신을 거꾸로 묻어야 할 자리였다. 그래서 아들에게 유언으로, 시체를 똑바로 묻고 도토리와 콩팥을 함께 묻으면서, 이괄의 손금이 올라가면 그때 거사를 치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괄은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 말씀을 어길 수 없다며, 시신(屍身)을 바로 묻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금이 올라가지 않자, 칼로 손금을 찢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패해 죽었다.
나중에 관군(官軍)이 이괄 부친의 무덤을 파 보니, 주검이 거의 용이 되어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같이 묻은 도토리와 콩팥 역시 군사가 되다가 말고 죽어 있었다. 시체를 거꾸로 묻었으면, 용이 된 아버지가 아들의 거사를 도와, 반란(反亂)이 성공하게 했을 것이라는 전설이다.
양강섬 강변 쉼터에서, 간식을 함께 나누며 쉬어간다.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 안 가 보이는, 두 손과 둥근 원이 같이 있는 강철(鋼鐵)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이제 양근대교가 성큼 눈앞에 다가왔다.
낚시와 취사, 야영금지인 양강섬은 남동쪽 끝에서 육지와 붙어있다. 양근대교 바로 밑이다.
여기서 양근천(楊根川)이 한강과 합류한다. 이젠 양근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제법 폭이 넓은 하천이다. 천변 둑에 거북이 조형물이 붙어있고, 그 밑에 작은 나무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 계속 따라간다.
왼쪽에 옛 ‘양근나루터’를 상징하는, 나룻배 모양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양근천 왼쪽 위 육지에는 ‘양평군립미술관’, ‘양평군 평생학습센터’, 양평문화원(楊平文化院), ‘물 맑은 양평체육관’, ‘양평군보건소’, ‘양평군 교통약자이동지원센터’가 모여있다.
천변을 떠나, 위로 올라왔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전통시장이다.
이 ‘양평 물 맑은 시장(市場)’은 오래 전부터 ‘경기 3대장’으로 유명했다. 강원도와 충청도의 산나물과 임산물, 서해안에서 올라온 해산물이 모여 성시를 이뤘다. 강원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물품들은 양근나루를 거쳐야 했으며, 자연히 큰 장이 섰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금도 400여 개의 점포의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5일장(五日場)이 열리는 날이면 200여 개의 노점이 펼쳐진다. 교통편이 물길에서 육로와 경의중앙선 전철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시장에 모여든다.
양평에서 생산되는 채소와 과일, 용문(龍門)에서 채취한 산나물 등의 농산물 판매가 활발하고, ‘양평해장국’과 국수와 전, 수수부꾸미 등 시장의 흥겨움을 더하는 즉석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시장을 나와, 다시 다리를 건너고 중앙대로에서 우측으로 직진하면, 양평역이 나온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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