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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펜= 김진호 부사장 |
한비자(韓非子)는 조국인 한나라를 구하려 진나라로 들어갔다. 떠오르는 신흥강국 진나라의 주인인 정(政)은 당시 스타급 학자인 한비자를 추앙하는 것으로 소문난 만큼 자못 성공의 가능성도 높아보였다. 하지만 한비자는 설득에 실패하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혹자는 논리정연한 글과 달리 말더듬이었던 한비자에 실망한 정이 한비자를 질투하던 측근 이사(李斯)의 농간에 빠졌다고 하지만 뒷일까지 살피면 달리 보인다. 한비자는 후일 진시황(秦始皇)으로 불리는 정을 만나 "진나라의 속국과 다름없는 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실익이 없고, 공격하면 다른 나라들의 신망을 잃을 것" 등의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한비자의 설계 실수로 보인다. 춘추시대 패자(覇者)의 지위가 아니라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천하를 손아귀에 쥐려는 진시황의 야망을 읽었다면 천재의 머리에서 다른 설계도가 그려졌으련만 아쉽다.
한비자는 진나라로 오기 전에도 여러 나라에서 유세를 했으나 모두 실패하자 '역린(逆鱗)'으로 유명한 세난편을 지은 적이 있다. 이 글에서 한비자는 상상 속의 절대권력자 용(龍)을 비겨 한탄했다.
"무릇 용이라는 동물은 길들이면 사람이 타고 다닐 정도로 온순하다. 하지만 목 아래 직경이 한 자나 되는 비늘이 거꾸로 나 있어서 만약 이를 건들리면 필히 죽인다. 임금에게도 이 같은 역린이 있는데 유세하는 자는 이를 건들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다"
30대 나이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당대표로서 자기 자리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내 다선의원과 장관 등을 역임한 중진그룹은 당대표를 어린애 취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각종 회의에서 구성원의 하극상에 가까운 발언과 행동에 망신도 당했다. '차기 기대주'라는 립서비스를 받았지만 이는 "아직 차례가 안됐어"라는 뜻을 읽혔다.
각종 토론과 팟캐스트, 유튜브 방송을 통해 전투력과 경쟁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를 독립변수가 아닌 종속변수로 보는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젊은 당대표는 잠시의 위기와 소나기를 피하기 위한 소모품을 여기는 듯했다. 당연히 반격에 나섰고 명석한 이 대표는 방법을 찾았다.
충돌과 갈등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오히려 조장하는 담대함도 보였다. 상대가 아버지뻘인 중진의원이거나 대통령일지라도 가리지 않았다. 소위 역린을 건드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를 거치는 동안 이 대표는 역린의 정치로 항룡(亢龍)의 자리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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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대 나이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당대표로서 자기 자리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선 ·지방선거 이후 급격하게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한국적 정치지형에서 대통령직 피선거권도 없는 젊은이가 거대 정당을 끌고 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여 진다. 일찍 정치권에 입문해 여러 번 선거에 나섰으나 모두 실패한 정치이력을 미루어 자신을 호위할 정치세력 곧 계파를 만드는 것은 애초 불가능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직 정치지형의 변화에 따라 형성된 우호 여론 즉 '이대남(20대 남성)'에 의지해 불합리한 갈등구조를 노정함으로써 당원과 국민의 지지로 당선된 대표라는 공적 지위를 극대화했다.
이 대표는 무소속이던 윤석렬 대통령이 국민의힘 입당과정과 후보시절 윤 대통령과 갈등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려 했다. 여러 대선 후보들과 경쟁을 펼치던 윤 대통령을 향해 "곧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 파문을 일으켰다.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후에는 자신을 압박하는 소위 '윤핵관(윤석렬 핵심관계자)'에 반발, 당무를 거부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선거가 한창인 때 당대표가, 그것도 선거의 승패를 가를 20대 남성층의 높은 지지를 받는 이준석 대표의 이탈은 치명적이었다. 후보였던 윤 대통령은 머리를 숙이고 측근들을 2선으로 후퇴시켜 이 대표를 달래야 했다.
검찰총장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윤 대통령은 자기 감성을 우선하는데 정치권에서는 흔히 '자존심'이라고 지칭한다. 부장검사 때는 국회에 나와 "개인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일갈했고 검찰총장 때는 법무부장관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생각을 관철키 위해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독대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또 정치권에 입문하고도 사석에서는 "대통령을 안하면 안했지…, ○○○는 안돼"라는 자의식이 강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윤 대통령의 취임 후 거침없는 인사와 파격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여론의 부담과 주변의 조언에도 한동훈 법무부장관, 이복현 금감원장 등을 밀어붙였고 보수진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는 파격을 보였다. 이 또한 노회한 정치적 계산이나 "누가 시켜서 하는 정치가 아니라" 평소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다는 평가가 힘을 얻는다. 그러기에 기존 정치권의 행보나 계산과 다른 행보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준석 대표의 비서실장인 박성민 의원이 어제(6월30일) '당대표 비서실장'직을 사퇴했다. 알려진 대로 박 의원은 윤 대통령의 측근으로 친윤 중에도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윤 대통령이 정치를 하기 전, 검찰에서 물먹던 시절부터 지근거리에 있던 오래된 핵심이자 "윤 대통령과 대화가 되는 사람"이다.
그런 박 의원이 대통령이 해외순방으로 국내 부재중인 때에 물러났다. 이 대표는 "윤 대통령의 뜻은 아니다"며 자신의 사퇴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윤 대통령의 의지없이 박 의원이 물러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세상이 알고 이 대표도 안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 대표는 한비자와 달리 설계를 잘못하지는 않았고 자신의 정치 자산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지금은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자기 정치를 하는 시간이다.
"용은 역린을 건드린 사람을 반드시 죽인다"고 한비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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