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우현 기자]61년 전인 1961년 8월 16일,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 초대회장에 선임됐다. 이병철 회장이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직에 이름을 올린 순간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1년 동안 전경련의 주요 역할인 자유시장경제 창달과 민간 외교관 역할의 근간을 만들었다. 평생을 민간에서 사업을 일구는 데 썼던 이병철 회장이 이른바 ‘감투’를 쓴 건 시대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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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선대회장 /사진=삼성 제공 |
그해에 군사혁명을 주도한 당시 박정희 의장은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혁명공약을 내세우는 한편, 일종의 ‘재벌개혁’을 통해 경제 활력을 도모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재벌개혁의 대상에는 활발히 경제 활동을 했던 이병철 회장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될 처지에 놓여있던 이병철 회장은 주눅이 들기 보단 박정희 의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의장에게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며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하도록 규정돼 있어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하면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박정희가 납득하는 태도를 보이자 이병철은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 위축으로 나타나고, 이렇게 되면 당장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강조한다.
이에 박정희는 공감한다는 뜻을 표하면서도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민했고, 이병철은 “국가의 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맞받아친다.
이병철의 설득으로 탄생한 것이 한국경제인협회다. 이후 한국경제인협회은 1968년 전국경제인연합회로 이름을 바꾸고 재계 맏형 역할을 하며 민간 경제 활력을 주도한다. 경제 활력의 주축이 된 울산공업단지 등도 한국경제인협회를 주축으로 계획됐다.
당시 회장직에 오른 이병철은 정부에 경제인들이 차관 교섭 등 대외경제 활동 차 해외에 나갈 때 신속히 여행 허가를 해주고 외화 여비의 할당을 우선해줄 것을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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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국경제인연합회 사옥에 걸린 전경련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
또 차관도입을 할 때는 정부가 지불보증을 해준다는 원칙 요구와 함께, 신규 투자를 할 때에 정부는 큰 테두리만 결정하고,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부적인 구체적인 사항은 기업가에게 맡기자는 ‘민간 주도 성장’의 근간을 마련했다.
이밖에도 정부와 기업인의 이른바 ‘정경협력’을 위해 개개인의 창의와 자율성이 최대한으로 보장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정부 개발 5개년 수행에 중요한 추진력이 될 기업인들의 활발하고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해주는 것이 긴요하다는 설명이다.
당시에 그런 말은 없었지만 ‘반기업 정서’에 대한 우려도 표했다.
이병철은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거나 기업의 성장을 죄악시하는 사회풍조 시정에 노력하고, 기업의 성장이 곧 국리민복의 증진과 국민경제의 부흥촉진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계몽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기술적 도움이 필요한 기업인을 일본의 경제단체나 개인에게 연결시켜주는 등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자유시장경제 창달에 앞장서는 동시에 전 세계 경제인들과 협력해 민간외교관 역할을 하는 전경련 역할의 자양분이 됐다.
이후 민간 경제의 역할을 해오던 전경련은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되고, 삼성·SK·현대·LG 등 4대 그룹의 후원이 중단되면서 ‘위상 회복’이 시급한 과제가 됐다. 하지만 최근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민간주도성장’이 주요 경제 정책의 근간이 되면서 전경련의 역할이 더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을 죄악시 여기고, 징벌적 세금을 부과하는 행태는 반복돼온 역사”라면서 “당시 이병철이라는 기업가가 민간주도성장을 외치며 새 역할을 구축했듯, 현재 기업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할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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