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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담 칼럼니스트‧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
이성에서 온 여자 정소담
나이를 묻는 게 왜 실례야?
“아, 그 나, 나, 실례지만 올해 그 며, 몇”
“네…? 아, 나이요? 스물일곱이에요.”
“아, 숙녀한테 나이 묻는 게 실례인데 이거 참. 근데 워낙 동안이셔서 그 나이로 안 보이십니다. 고등학생이래도 믿겠네! 껄껄”
‘숙녀한테 고삐리로 보인다는 게 실례 아니냐….’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 건 언제부터 실례가 됐을까. 익어가는 과일더러 왠지 설익어 보인다는 게 언제부터 칭찬이 됐을까. 싱그러운 젊음을 향한 욕망의 시작점에 관해서라면 답은 간단하다. ‘처음부터’ 그랬을 터. 봄 꽃도 좋고 가을 낙엽도 좋다지만, 꽃놀이는 가도 낙엽 구경은 안 간다. 우리 모두 그걸 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다들 봉오리 타령이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이도 절반쯤 피어난 이도 일평생 봉오리로만 보이고 싶어 아우성인 게 동안 열풍 아니던가. 서른에게도 마흔에게 도 십대 같아 보인다는 이야기가 칭찬이 된지 오래다.
“내 뿜은 담배연기처럼 또 하루 멀어져간다”며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겨우 ‘서른 즈음에’ 참 별꼴인가하면 술집에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은 다 큰 ‘어른’의 입에서 나오는 농담은 근 십년 째 그대로다. “하하! 다들 봤지? 오늘 내가 쏜다!” 언제까지나 미성년으로 보이고 싶은 이상한 신드롬을 모두가 앓고 있다. 가는 세월이 왜 그렇게 아프기만 할까.
나이 든다는 건 사실 좋은 점이 참 많은 일이다. 든 것 도 쥔 것도 많아진다. 연애도 우정도 일도 사랑도 수월해 진다. 무엇보다 좋은 건 나란 인간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훨씬 너그러워 진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1년이 무던히 지 나간다. 이 참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한 살이라도 어린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리다는 건 가진 게 없어도 곧잘 용서 받는 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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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서울여대 시각디자인 3학년 유한을 학생 |
나이 드는 게 그다지도 싫은 건 나이에 걸맞은 걸 갖지 못한 현실과 마주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그 현실을 만든 게 나의 게으름이라는 것도 알기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싱그러웠던 때로의 ‘리턴’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흩어지기 전의 상태로 ‘리셋’하고 싶은 마음.
한편 나이 얘기에 더 민감한 건 언제나 여자 쪽인 듯보인다. 좋은 신랑감 만나려면 한 살이라도 어려야 한다는 둥 요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가만히 보면 주로 여자들이다. 여자를 횟감에 비유한 농담에는 파르르 떨면서 누가 나이를 물으면 죄인이라도 된 듯 한숨부터 쉬고 있지 않은가. 어린 여자를 찾는 남자들은 질색이라면서 연예인 A양의 동안 유지 비결에는 귀가 ‘쫑긋’이다.
왜일까. 세상이 변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시집만 잘 가면 장땡이던 세상은 슬슬 뒤꽁무니가 보이고,매력이니 능력이니 센스니 재능이니 경쟁 요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더 힘들어지기 전에 여자의 경쟁력은 그냥 ‘어리고 예쁜 거’ 정도로만 해두자고 다 같이 끌어내리려는 수작이다. 부디 속지 말자.
이른바 몸값이라는 건, ‘연차’가 늘수록 올라가고 ‘연식’이 오랠수록 떨어진다. 더해가는 내 나이는 연차일까 연식일까. 이십대 후반에 이르러 살짝 뒤를 돌아보니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나의 흑역사들. 허송세월로 보낸 수많은 날들이 가슴을 콕콕 찌른다. 무수히 반복되던 실수와 후회들.‘어리다’는 말의 어원이 왜 ‘어리석다’인지 알 것만 같다. 그러니 이제 더 잘해야지. 올한해는 알토란같이 채워 넣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계란 한판’이 꽉 찰 날도 꽤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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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감성에서 온 남자 이원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숫자조차 아니다!
뒤늦게 ‘심즈’라는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있다. 세상천지에 이렇게 얼척이 없는 게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게임의 룰은 단순하다. 그냥 ‘살아가면’된다. 먹고 싸고 청소하고 집짓고 만나고 헤어지고 결혼하고… 그런 과정들 하나하나가 레벨업의 조건이다.
이 게임의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캐릭터들에게 숫자로 부여된 나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기’ ‘어린이’ ‘성인’ 정도의 구분밖에 없다. 나머지는 이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일을 열심히 하면 유능한 사원이 된다. 취미에 몰입하면 요리나 낚시의 달인이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안 하면 그냥 살아만 있는 상태가 된다. 나는 ‘심즈’의 이 설정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네 인생보다 더 리얼하다고 생각한다.
나이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면 95%의 사람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찌나 이 말들을 많이 하는지 네이버 검색창에 ‘나이는’까지만 쳐도 ‘숫자에 불과하다’가 자동으로 완성될 정도다. 궤변 같은 얘기지만 나이는 숫자조차도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 단어가 비록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세상에 나서 살아온 햇수’라는 의미를 갖고 있긴 하지만 나이의 핵심은 숫자가 아니다. 하이데거 말대로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어른이 되 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내면에 생채기와 흉터를 남기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익힌다. 그걸 통해 새로운 자신으로 끊임없이 거듭난다. 나이는 시간으로 먹는 게 아니라 경험으로 먹는다는 의미다. 어려서부터 산전수전을 많이 겪은사람은 태어난 지 몇 년이 지났건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가 된다. 김연아나 박지성이 자기보다 어리다고 ‘동생’ 취급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쪽이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결국은 숫자의 질곡에서 벗어나 그 사람의 생이 어떤 궤적을 그려왔는지를 살피려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겠냐는 뭐 그런 얘기다. 만나자마자 호구 조사하듯이 몇 살인지 궁금해 하지도 좀 말았으면 좋겠는데, 한국어에는 형 누나 언니 등등 윗사람을 지칭하는 표현들이워낙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생 선배‘라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한다. 오래 살았다고 내가 상대보다 더 풍부한 경험을 했다고 확신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런 확신 자체가 그 사람의 미숙함을 소리 높여 방증해줄 뿐이다. 이런저런 경험을 쌓아 지혜로워진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인생을 편협한 자신의 관점 안에 몰아넣어 멋대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몇 살이니”라고 묻기 전에 그 사람의 경험치에 먼저 시선을 던져 보자. 다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 넓은 세상은 엄청난 인생의 내공을 지닌 우리의 ‘선배’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정소담 칼럼니스트‧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