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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2015년 6월 3일은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사망 140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 모두가 이미 비제를 알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오페라라고 말해도 좋을 ‘카르멘’이 바로 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광고에서 우리는 지금도 ‘카르멘’을 접하고 있다. 많은 연주자들, 특히 대다수의 메조소프라노들은 카르멘 역할을 ‘인생의 미션’으로 여기기도 한다.
‘카르멘’은 비제의 인생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1838년 성악 교육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비제의 모든 것이 이 작품 안에 응집돼 있다. 열 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이래 열일곱에 ‘교향곡 제1번’을 완성한 천재의 이 야심작은 1875년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됐다.
결과는 대실패. 프랑스인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비제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난의 포인트가 오페라의 ‘내용’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소설가 메리메의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청순가련한 여성(미카엘라)과 미래를 약속했던 남자주인공 돈 호세가 집시 여인 카르멘에 마음을 빼앗겨 파국으로 치닫는 팜므 파탈 스토리의 전형이다.
21세기엔 너무 흔해서 문제일 이 줄거리가 당시에는 지나친 파격으로 문제가 됐다. 거대한 스케일의 무대 정중앙에서 청순가련형 여주인공이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서정극에 맞춰져 있던 당시 유행에서 ‘카르멘’은 크게 벗어나 있었다. 작품이 초연된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경우 가족들이 함께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었던 터라 반발은 더욱 거셌던 것 같다. 사람들은 질투와 욕정이 난무하고 살인과 치정이 얽힌 이 일대기를 불편해 했다.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中 '하바네라' /영상=로얄오페라하우스 유튜브 채널)
‘카르멘’을 비장의 무기로 생각하고 있던 작곡 천재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그만 낙심하고 말았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모든 재능이 담겨 있는 ‘카르멘’의 촘촘한 곡 구성이 아닌 극 내용의 ‘막장성’에 먼저 반응하고 분노했던 것이다. 결국 초연 이후 3개월 만인 1875년 6월 3일 비제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고 만다.
비제의 죽음에 ‘카르멘’ 실패의 마음고생이 큰 영향을 차지했을 거라는 건 하나의 중론이 되어 있다. 서른여섯의 젊은 예술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절망감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숨을 거둔 그는 ‘카르멘’의 돌풍이 자신의 고향 프랑스가 아닌 오스트리아 빈에서 먼저 시작되는 진풍경을 끝내 보지 못했다. 자신의 작품이 오페라의 역사 그 자체를 바꿔놓는 쾌거도 당연히 목도하지 못했다.
한 세기 반의 시간이 흐른 지금 비제의 죽음은 우리에게 파격의 최전선에서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혁신자가 감당해야만 하는 고뇌의 무게를 상기시킨다.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은 전부 태워버려서 남아 있는 작품이 적다는 후문을 남기기도 한 조르주 비제의 예민한 삶은 행복했을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어쩌면 그의 삶 자체가 ‘예술이라는 팜므 파탈’에 헌납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2015년 6월 3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