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66)-즐겁게 베풀고 감사히 보답하는 건강한 유대
세네카(BC 4?~AD 65) 『베풂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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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무언가 타인에게 베풀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더구나 베푼 은혜가 받은 이가 갈구하였던 것이거나 기꺼워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좋은 일일테다.
그러나 은혜를 베푸는 일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베푸느냐에 따라 때로 은혜가 되기도 하고, 외려 원망을 살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BC 4년?~AD 65년)의 역저 '베풂의 즐거움'은 바로 은혜 베풂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세네카가 들려주는 철학적 '은혜 사용설명서'이다.
은혜는 관계적 개념이다. 늘 상대가 있어야 성립된다. 이런 속성은 필연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과 은혜를 입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의식과 태도가 은혜가 어떤 의미를 띠게 될지를 좌우하게 된다. 세네카는 이런 관점에서 은혜 이해당사자들의 의식과 행태를 구체적으로 살핀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서 은혜의 의미를 성찰할 만한 숱한 예화들을 들어 은혜의 조건과 올바른 은혜의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다.
세네카는 먼저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묻는다. 혹 은혜를 갚으라고 교만하게 군 적은 없었는가? 은혜를 베풀고 변덕이 생겨 은혜 베푼 일을 후회한 적은 없었는가? 모욕적이거나 공격적인 태도로 은혜를 베풀지는 않았는지? 모욕을 주기 위해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닌지? 이러한 질문들에 시인한다면 그는 적정한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다.
세네카의 권고는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도출된다. 은혜는 남모르게 베풀어야 한다. 은혜를 입는 사람에게 교만하고 모욕적으로 은혜를 베풀었다면 그가 베푼 은혜의 가치는 뚝 떨어진다. 심지어 은혜가 아니라 원한을 사게 될 지도 모른다. 부탁을 받기에 앞서 은혜를 베풀고 상대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베푸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은혜를 베풀 때에도 예의를 갖춰야 하고 은혜를 베푼 일조차 잊어야 진정한 은혜다. 또 설사 은혜 입은 사람이 감사할 줄 몰라도 지속적으로 은혜를 베풀라는 게 세네카의 거듭되는 말이다.
세네카는 은혜를 베푸는 방법과 은혜를 입는 방법, 그리고 은혜를 갚은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은혜를 어떻게 베풀어야 마땅한가? 세네카는 은혜를 베푸는 이가 갖춰야 할 덕성을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꼭 필요한 은혜를 먼저 베풀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유용한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또 그 다음으로는 즐거움을 주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은혜라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 세네카는 은혜를 베푼 이는 겸양의 덕을, 은혜를 입은 이는 염치의 덕을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은혜를 베푼 사람은 은혜를 베푼 일을 즉시 잊어야 하고,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은혜를 입었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곱씹어 볼수록 의미가 깊은 말이다. 은혜를 베푼 사실을 은혜를 입은 이에게 지나치게 자주 상기시키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다.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베푼 은혜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은 은혜를 입은 사람을 성나게 하거나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은혜를 입는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도 제시하고 있다. 은혜를 입는 사람은 우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은혜를 베푼 이에게 어떻게 해서든 보답할 기회를 갖고 "감사하다는 말만으로도 마치 은혜를 갚은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되도록 감사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면 더 좋다.
은혜를 입은 이가 절대 피해야 할 것은 배은망덕이다. 세네카는 배은망덕의 원인 세 가지로 은 자만심과 탐욕, 그리고 질투를 들었다. 은혜를 입은 이가 은혜를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자만심이 배은망덕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또 더 많은 이익을 가지려는 끝없는 탐욕이 은혜로 받은 수혜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특히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와 자신이 입은 은혜를 비교하여 시샘하면서 배은망덕의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은혜를 입는 이는 자신의 자만심과 탐욕, 질투로 인해 자신이 많은 은혜에 대해 가벼이 여기는 교만함이 생기고 이는 배은망덕의 중대한 악덕을 저지르게 한다는 것이다.
무릇 작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은혜도 받을 자격이 없다. 세네카는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배은망덕이라고 말한다. 그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은혜를 입는 것도 은혜를 베푸는 것 못지않게 힘든 일이다.
은혜는 그 자체로 덕을 지녔다. 베푸는 이를 즐겁게 하고 받는 이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선(善) 그 자체에 이끌린다. 감사하는 마음은 받은 것에 대해 무언가 갚으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은혜를 입고 감사의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이런 것보다 더 선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은혜가 선량한 사람들 사이에 이런 선한 마음이 돌게 한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은혜의 유용은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세네카는 은혜의 사회적 유용성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은혜가 공동체 구성원간의 우애와 협력을 증진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믿음에서다. 특히 은혜를 주고받는 게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이라는 확신에서다. 인간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만큼 깊다.
"감사의 태도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악으로서 피해야 한다. 감사하지 않는 태도만큼 사람 사이의 화합을 막거나 해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서로 돕는 것 외에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은혜를 주고받는 것, 그것만이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맞서 우리의 삶을 지켜준다."
인간은 협력을 통해 자연과 동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 이 협력의 기반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은혜를 주고받는 것이다. 은혜를 풍성하게 만들어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은혜 입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넘치면 더 많은 은혜를 산출하게 만든다. 세네카가 감사하는 마음보다 더 고결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한 배경이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한 것도 올바른 베풂을 통해 로마 시민들의 건강한 유대를 만들어내고자 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것이야말로 스토아 철학자로서의 그에게 꼭 맞는 실천적 철학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이제 은혜를 갚은 방법에 대한 세네카의 통찰도 들어보자. 은혜를 갚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은혜로 보느냐, 은혜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보느냐에 따라 보은의 방식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누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었다고 해서 항상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이 나 아닌 누구에게나 베풀어진 호의라면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반드시 보은해야 할 은혜는 아니다.
또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얻을 목적으로 은혜를 베풀었다면 이 역시 갚아야 할 은혜의 대상은 아니다. 받은 은혜가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내가 다른 도움을 그에게 이미 베풀었다면 은혜 그 자체에 대해 보답해야 할 몫이 따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세네카는 은혜를 갚는 일은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한다. 은혜를 베푼 이가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그것을 필요로 하도록 강요하거나 억지로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태도라는 것이다.
"은혜에 빚진 채로 있는 일에 대해서 어떤 불안도 갖지 말 것,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찾되 절대로 그것을 일부러 만들어내지는 말 것, 한시라도 빨리 의무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욕망이야말로 배은망덕이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자. 자기 의사와 달리 진 빚을 갚는 것은 누구에게도 행복한 일일 리 없고, 받은 은혜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선물이 아니라 부담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은혜를 갚지 않고 마음에 오래도록 간직해 주는 것도 은혜를 갚는 것일 수 있다는 역설! 세네카의 혜안이 빛난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에게서 은혜를 받고도 이를 베푼 이가 아무런 사례를 받기를 거절할 때, 빨리 그 은혜를 갚고자 안달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양심이 아니라 평판 때문에 남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은혜 베풂에 대한 세네카의 담론은 철학적 논의를 넘어 논리적 논증방식으로 전개된다. 베풂에 대한 여러 명제들을 제시하고, 그 의미를 탐색한 후 현실의 사례를 들어 하나 하나 입증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적 교훈들이 등장한다. 독자들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현실적 사례들은 오늘날 우리가 부딪히는 현실의 일들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이 2천여 년을 넘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그만큼 크다./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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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도서: 《베풂의 즐거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혁·오병석·홍석준·안승택 옮김, 눌민(2015). 385쪽. |
[박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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